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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822화 (822/1,277)

##  822화

하늘에 머무는 비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바닥에 닿아서 잘게 부서질 때 비로소 시끄러워질 뿐이다.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난 그 부서지는 소리에 내 목소리와 우리의 이야기가 반쯤 묻히길 기대하며 입을 열었다.

한참 후에야 세연은 대답했다.

{옳다면 하고, 옳지 않으면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날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의 목소리는 빗소리 따위엔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명료하게 들려왔다.

너무나 정확하게 들려도 난 그 말을 바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슨 뜻이죠……?}

{네가 에르네스트를 가엾게 생각해서 아무것도 못 하겠다고 한다면 옳아도 하지 못할 테고, 그보다 큰 가치를 따른다면 옳지 않아도 하겠지?}

마치 자신이 이해한 바를 단조롭게 설명하듯 그녀가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건 내 깊은 곳에 있는 고뇌를 그대로 찔러 들어오는 것 같은 말이었다.

세연은 이 상황에 구태여 발을 들여놓을 이유가 없었다.

그저 주변을 맴돌았어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방관자로 있길 원하지 않았다.

진지하게 세연이 이어 말했다.

{그런데 둘 다 아닌 거지. 그 중간에 서서 넌 당위를 찾고 있어. 타티아나.}

그 말에 난 반론하기 힘들었다. 세연은 생각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상황과 나를 알아보고 있었다.

감정에 굴복해 무너지거나 음악에 더욱 몰입하는 대신 난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조각들을 하나씩 모으고 있었다.

내 존재가 곧 저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그 조각 중 하나일 뿐이었다.

늘 판단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는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이렇게 다친 상황에서도 그럴 수 있는 건 사람으로서 잘못되어 있는 것이란 생각 또한 든다.

스스로에 대한 변호를 하고 싶은 생각은 딱히 없지만, 지금 세연에게 묻고 싶은 건 많았다.

{그럼 당위를 찾는 건 잘못된 건가요?}

{아하하, 이런 이야기는 끝이 없겠다. 그치?}

괜히 평가하는 것 같은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는 듯 세연은 웃어넘기려 했다.

이 이상 이야기를 끌어봐야 무의미하다는 건 그녀도 나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이미 난 며칠이나 혼자서 생각에 파묻혀 봤다. 둘이서 파묻힌다 한들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진 않다.

이런 어려운 일은 나 혼자서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난 이쯤에서 세연을 다시 밀어내려 했다. 지금까지만 해도 충분히 고마웠으니까.

{끝없는 이야기에 말려들지 마세요. 찾던 이유는 혼자서 계속 찾아볼게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구나.}

하지만 세연은 짐짓 한숨까지 쉬어가며 웃었다.

난 살짝 신경질이 났다.

충분히 이해했다.

난 에르네스트를 가엾다고 여기는 것 자체만으로도 죄라고 생각하는 꽉 막힌 사람이고, 큰 가치라 할 수 있는 음악계 전체의 손익 등에 대해선 이제 허무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배교자였다.

이쯤 하면 된 것 아닌가?

에르네스트도 그렇고 세연도 대체 내게 더 이상 무엇을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딱히 네가 뭔가 찾아내길 바라는 건 아니야.}

그런데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세연이 이야기했다.

흠칫 놀란 내가 바라보자 세연은 손가락을 세워 위아래로 길게 그으며 말했다.

{중요한 건 네가 그 중간에 주저앉아 있는 게 아니라, 서 있다는 거라고 생각해.}

{……서 있다고요?}

{응.}

{전 전혀 서 있지 않아요.}

정말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난 학교도 나가지 않았고 피아노도 만지지 않는다.

공부도 요리도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었다.

여긴 우리 둘뿐이었다. 그러니 세연에겐 더 이상 쓸만한 말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리낌없이 말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도 그렇게 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

{네가 꼼짝도 않을 것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

구세프 선생님이 그런 것처럼, 에르네스트도 정말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강할지언정 잔인하진 않다.

똑같이 길 중간에 있다 하더라도 서 있는 사람과 웅크려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야 할 방법은 다르다.

그런데 난 아마 서 있는 것처럼 보였나보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서 있는 나에게 앞으로 갈 수 있도록 살짝 등을 떠밀어 주었다.

그렇게 한다면 일단 어떻게든 발 디딜 곳을 향해 균형을 잡게 될 테니까.

난 조금 후회가 되었다.

정말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은 기분으로 가까스로 서 있는 것에 불과한데.

누군가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은데.

그래서 심지어 누군가 넘어뜨려 주길 바라고 있었는데.

그런 내 속도 모르고 단지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걸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버렸다는 건, 굉장히 복잡한 기분으로 내게 다가왔다.

{제가 그에게 여지를 주었다…… 그런 말인가요?}

{여지? 무슨 여지.}

{그를 내버려 두고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일 만한 여지요.}

중얼거리며 이야기하자 세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화와 이해라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는 표정이다.

당연히 그런 표정을 마주한 난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불만 어린 눈으로 바라보니 세연이 천천히 이야기했다.

{그 정도로 네가 독한 사람이었다면 내가 여기 오지도 못했겠지. 친해질 수나 있었을까?}

{…….}

누가 보더라도 난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

애초에 내가 모조리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독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겠지.

그리고 세연을 더 멀찌감치 피해 버렸을 테니 아마 친해질 이유도 전혀 없었을 테다.

차라리 그렇게 혼자서 동떨어진 삶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였다.

{……!}

비로 차가워진 공기로 천천히 식어 가던 내 손에 갑자기 따뜻한 온기가 찾아들었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세연이 휙 다가와선 손을 붙잡고 있었다.

손의 떨림은 구세프 선생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세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놀란 난 손을 빼려고 했지만, 세연은 아예 양손으로 내 손을 붙잡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경련하듯 떨리던 손은 그녀에게 전해진다. 이 불길함과 불안은 누구에게나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

난 그녀에게도 내 어두운 부분이 전해질까 두려웠다.

내가 두려워한다는 건 세연 역시 알아차린 듯하다.

떨어져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나는 많이 불안해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세연은 내가 그녀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면 전혀 상관없는 것 같았다.

더 세게 내 손을 잡아 주며 세연은 다가왔다.

{아까 나한테 좋은 말해 줬던 거 기억해?}

{……무슨 말을 했었죠.}

{……그, 있잖아. 뭐라 했더라. 올곧고 바르다 했든가 어쨌든가…….}

자기 입으로 말하기엔 부끄러운지 세연은 횡설수설하더니 다시 번쩍 고개를 들고는 이야기했다.

{교수님과 오빠가, 그리고 네가 날 그렇게 봐 주는 것처럼, 에르네스트는 널 그렇게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해.}

내가 세연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으로 힘을 얻는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는 차 안에서 그 부분을 정확하게 꿰뚫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난 적잖이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세연은 그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대신 나 역시 누군가에겐 힘을 주는 사람일 수 있음을 일깨워 주려 했다.

{…….}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난 항상 친구들에게 힘이 되길 바라 왔으니까.

{제가 에르네스트를 망가뜨렸어요.}

{……무슨 말이야?}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세연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붙잡혔던 손을 가볍게 떨쳐내고, 난 빗줄기 속을 바라보았다.

먼 곳을 보고 있다 보면 며칠 전 있었던 일이 마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뇌리를 장악해온다.

목 근처부터 다시 떨림이 시작된다.

여기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울어 버리면 그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라 생각하며 난 이를 악물며 천천히 이야기했다.

며칠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에르네스트가 저렇게 된 것이 왜 내 탓인지.

그는 끝까지 사고는 사고일 뿐이고 누구의 탓이라 할 것은 없다고 잘라 말했었지만 난 이번에도 고집스럽게 세연에게 그렇게 설명했다.

{그랬구나…….}

이야기를 다 전해 들은 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뉴스만 본 그녀는 아마 에르네스트가 혼자서 계단에서 떨어진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전말을 알게 된 세연은 조금 더 상황을 잘 이해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에르네스트가 내게 연주회를 종용하는 게 얼마나 심한 일인지도 이해해 줄까?

그건 단순히 내가 서 있을 수 있다고 해서 당연히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세연은 모든 이야기를 이해하고도 초점을 에르네스트 쪽이 아닌 내 쪽으로 맞춰 놓았다.

{혹시…… 아까 오후엔 그래서 다가오지 말라고 했던 거야?}

{…….}

{네가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생각하니 그냥 바보 같다고 할 수도 없네.}

내가 조용히 침묵하자 세연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섰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옆을 보더니 몇 걸음 나아갔다. 그리곤 손을 뻗는다.

땅으로 떨어졌어야 했던 빗방울들이 세연의 손 위로 떨어져 튀어올랐다.

{차갑네.}

10월의 가을비는 차갑다.

잠깐 손을 내밀고 있었을 뿐인데도 세연은 이 빗방울이 마냥 견디기 힘들다는 듯 이야기했다.

금방 젖고 차갑게 되어 버린다. 특히 피아노 연주자들이라면 이렇게 잠깐 손이 젖는 것만으로도 연주를 할 수 없다.

손을 적신 세연은 빗물에 젖은 손을 다시 끌어당겨 내려다보더니 힘없이 웃어 보였다.

{세상이 참 가혹하네. 우린 너무 약하고. 넌 그걸 항상 두려워했었구나.}

비에 젖는 정도로 크게 어떻게 되진 않는다는 건 알지만, 난 이제 정말 모든것이 무서웠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는데 세연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너무 무서워하진 마. 타티아나.}

그리고 그녀는 다시 내게 다가왔다. 젖은 손을 내 앞으로 뻗는다.

난 떨리는 손으로 나도 모르게 그 손을 붙잡았다.

섬뜩한 차가움이 전해져 온다. 그리고 세연은 내 떨림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차가움도 떨림도 천천히 사라져 갔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렇지도 않게 우린 마주 볼 수 있었다. 세연이 밝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반드시 회복할 수 있어.}

{…….}

{그러고 네가 회복시키는 거야.}

갑자기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 난 의사가 아닌데.

그 의문을 드러내자 세연은 말을 잘못한 게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우린 각자의 길을 걷는 구도자이지만 동시에 전승자이기도 하니까. 우리 세상에선 아무도 사라지지 않아.}

{아무도…….}

{그러니 안심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안심이라는 그 말은 지금 내게 정말로 와닿지 않고 불필요한 말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 뜻이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편안하게 느껴졌다.

우린 각자의 증명을 행한다. 나도 그렇고 에르네스트도 그러하며 세연 역시 같다.

때문에 음악을 행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수백년 전 인물들의 음악을 옮겨 와서 행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의 육신이 죽었을지언정 혼은 살아 영원하다. 전 세상에 걸쳐서.

언젠가 들었던 영생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 또한 음악으로서 영생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언뜻 해 본 적이 있지만, 사실 그것보단 난 스스로를 타파하고 나감으로서 오롯이 영생하는 바닷가재가 어울리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세연은 당연하다는 듯 전승으로서의 영생을 믿고 있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했었던 것과 비슷하지만, 정말로 따뜻하고 투명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

에르네스트를 대신해서라도 내가 더더욱 피아노 앞에 앉아 있어야 하나.

진득한 죄책감으로부터 비롯된 그런 생각은 불현듯 찾아들어 날 괴롭히곤 했었다.

그러나 미하일 선생님은 죄책감으로 무대에 서진 말라 하셨고, 세연은 억지로 짊어지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우리가 함께하며 나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건 맹목적으로 믿을 수 있는 진리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곧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일이었다.

난 천천히 손을 놓았다.

세연에게서 옮겨온 물기가 여전히 조금 남아 있었지만,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난 손아귀를 틀어쥐며 그 물기와 함께 무언가를 움켜쥐어 보았다.

{제가 미리 길을 밝혀 놓으면 에르네스트가 편하게 올 수 있을까요.}

{응.}

한 점 의심없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 세연이 말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난 문득 세연과 블라디보스토크에게 만났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이미 그녀는 내가 한참이나 앞서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바라보고만 있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내게 살짝 보여 주길 요청했다. 난 그것에 응했고.

그것을 익힌 세연이 내 뒤를 쫓아오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연은 너무나 당당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전승자이지만 동시에 그녀는 당연한 구도자이다. 고집스러운 음악가의 혼은 그 누구도 바꾸어 놓을 수 없다.

난 멍하니 세연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강해져 있었다.

지금 난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연주를 하는지 듣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위에 에르네스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또한 그가 바라는 것이 내가 이 괴로움을 그대로 이겨 내고 앞으로 내딛는 것임을 확신한다.

풀어져 있던 눈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세연은 나지막이 웃더니 말했다.

{어제 전화로 내가 그랬지. 어떻게 연주회를 할 수 있겠느냐고. 네가 무슨 초인이냐고.}

보통 사람이라면 모두 취소하고 포기하는 게 당연하다고. 그녀는 그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날 이해하는 그녀는 그런 기준은 멀리 내던졌다.

{하지만 넌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닐 거야. 타티아나.}

평소 난 부정적인 의미로 그런 생각을 해 왔다.

하지만 세연은 정말 밝고 긍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렇게 날 보통 사람에서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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