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3화
가을비는 곧 그쳤다. 이제 정말로 추워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아마 다음에 하늘에서 내릴 건 비가 아니라 눈이 되겠지. 모스크바의 추운 날씨는 굉장히 혹독한 편이다.
그러나 난 이미 이곳에서 몇 번이나 그 추위를 견뎌 왔다. 이번에도 생각하고 대비하며 마주할 뿐이다.
{돌아갈까요.}
전화로 빅토르를 부르자 그가 차를 끌고 내 앞에 도착했다.
차에 올라타니 빅토르는 말없이 조용히 출발했다.
선글라스 너머로 그가 룸미러를 힐긋거리며 우리 쪽 분위기를 살피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그 역시 걱정이 많은 사람인 것이다.
룸미러를 통해 시선이 마주했다는 기분이 들었을 때, 괜찮다는 뜻으로 가볍게 웃어 보였더니 그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천천히 모스크바 외곽 쪽으로 빠져나가는 차 안에서, 난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스마트폰을 꺼냈다.
여전히 산산이 깨져 있다. 하지만 쓰는 데에 문제는 없었다.
깨진 조각이 튀어나와 손에 상처를 입히지도 않고, 깨진 모양 그대로 충실히 작동하는 중이다.
이런 기계에서도 배울 점이 있을 것 같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지만, 좋은 부분을 조금 배우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여전히 마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들끓고 있다. 하지만 난 이전보단 조금 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세연.}
{응, 응?}
내가 부르자 세연은 흠칫거리며 되물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깜짝 놀랄 정도로 어른스럽게 잘 이야기하더니, 이제 와서 뒤늦게 그게 부끄러워진 모양이다.
뭔가 어색해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그래도 여기서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아까 하셨던 말씀 있잖아요…….}
{뭐, 뭐였더라?}
{구도와 전승에 대한 이야기.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셨던 건가요?}
연주자의 삶과 가치 등에 대해선 나 역시 여러 번 곱씹어 생각해 본 적이 많다.
내 자긍심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게 정리했다고 생각해 왔었고.
하지만 여전히 난 미숙하고 나약했다.
막상 침착함이 필요할 때 전혀 그러지 못했고, 원망과 혼란에 파묻혀 들어가고 있었다. 기준이 없는 난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런 내게 움직일 당위를 다시 한번 되새겨 준 건 세연이었다.
이야기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와의 경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나이인 세연이 떠올리기에 쉬운 생각은 아니었다.
난 그녀가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조금 놀라웠다.
내가 정말로 감탄 중이라는 걸 느꼈는지, 세연은 적이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그, 뭐, 그게 딱히 내 생각이었던 건 아니고. 교수님이 가끔 하시는 이야기를 주워들었다고 해야 하나…….}
{그런가요?}
{솔직히 이상했지? 그냥 나 창피하지 말라고 이해한 척해 준 거지? 아, 진짜. 시간이 있었다면 조금 더 잘 말할 수…… 아니려나.}
{……후후.}
{왜…… 왜?}
귀여워서 웃었다고 하면 화내겠지. 그리고 지금 세연에게 도움을 받은 내가 그런 말을 할 처지도 안 되고.
난 대답하지 않고 다시 좌석에 몸을 기대었다.
지금까지 난 세연을 책임이자 잠벌이라 여겨 왔다. 내 이기적인 죄책감이 만들어 낸 정말 미안한 관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어엿한 연주자임을 분명히 해 주었다.
세연에게 받은 도움을 오늘 하루의 안식으로 넘겨 버려선 안 되겠지.
무작정 그녀의 응원을 따라서 열심히 해 보겠다고 약속할 순 없었다. 단지 지금 이 정도 대답은 해 줄 수 있었다.
{오늘 해 주신 말씀들 고마웠어요. 제가…… 잘 생각해 볼게요.}
{……응! 그래. 그거면 괜찮아.}
세연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역시도 지금 그녀가 웃어 준다면 이 정도로 괜찮았다.
***
해가 뜨고 나서 눈을 뜨는 건 오랜만인 것 같다.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킨 나는 침대에 앉은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제 세연과 집으로 돌아온 뒤, 우린 함께 무언가 하지 않고 각자 방에서 이른 시간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어제 누웠던 시간으로부터 계산해 보면 지금 10시간 가까이 기절한 듯 잤다는 계산이 나왔다.
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난 내가 지난 며칠간 하루 한두 시간도 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
내 몸도 거의 한계상황이었던 것이다.
“…….”
그간 정말 내 몸 상태를 되돌아보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지내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도 엉망이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난 무의식중으로 이젠 컨디션 관리를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팔을 들어 올렸다.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얼마 전부터 시작된 이 경련은 여전히 내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란 증거였다.
빨리 원인을 찾아서 해결해야 하지만, 그건 지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대신 난 신경을 집중했다. 정말 몸이 안 좋았을 때도 어떻게든 해 왔던 경험이 많은 나는 지금 역시 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팔의 떨림을 잡고, 손목과 손을 통해 손끝까지 완벽하게 통제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여전히 으슬으슬한 기분이 내 주변을 맴돌면서 날 추위에 떨게 만들었지만, 지금 난 어떻게든 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은 되찾은 것 같았다.
손을 바로잡은 뒤엔 다시 거꾸로 올라와 천천히 몸 전체의 컨디션을 체크했다.
‘좋진 않네.’
얼마 전, 정말 좋았었던 때와 비교하면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목과 허리에선 통증마저 느껴진다. 잠을 자지 않고 너무 웅크리고 있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대로 난 몸 상태를 다시 되돌리는 재활에도 꽤나 자신이 있었다.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시작해선 필라테스의 동작 몇 개와 알렉산더 테크닉으로 넘어갔다. 굳어 있던 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제 컨디션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앉아서 조용히 상념에 잠겼다.
“…….”
에르네스트는 날 피아노 앞으로 보내고 싶어 했다.
난 그냥 그가 자신을 돌보는 것에만 집중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내가 피아노를 찾지 않고 병실을 찾는 것을 좋게 생각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후회할 것이라 했다.
세연 역시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닐 거라면서 비슷한 취지의 이야기를 했고.
결론적으로 두 사람 모두 내게 선택을 맡겼다.
대단하면서도 가혹한 친구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걸 봤다면 그냥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결국 내겐 지금 아주 약간의 당위와 의욕이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3일…….’
가을 연주회까진 3일 남았다.
물론 꼭 연주회에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에르네스트가 정말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내가 스스로 원해서 피아노 앞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연주회의 성공이 아닐 테니까.
심지어 난 억지로 연주회 무대에 올랐다가 엉망진창으로 무대와 커리어를 망치는 상상까지 했다.
그건 현실화될 가능성이 꽤나 높은 상상이기도 하다.
차라리 깔끔하게 연주회는 접고 그냥 천천히 다시 피아노를 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는 연주회라면 되살려 볼 노력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그게 곧 에르네스트의 회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더더욱.
“…….”
난 3일을 72시간으로 쪼개고 그중 내가 쓸 수 있는 시간들을 생각하며 가능성의 저울의 양 옆에 추를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했다.
저울은 좌우로 왔다 갔다 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생각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현실 세계에서 실현이 가능한지, 직접 몸으로 증명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의 한계에 내가 맞출 수 있을지 직접 확인해야 한다.
난 침대에서 내려와선 옷부터 갈아입었다. 그대로 가볍게 세수만 하고는 머리를 묶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10월의 공기가 휙 하고 스치고 지나간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웠지만, 난 웅크리지 않고 별관으로 향했다.
“왕!”
“벨카.”
근처에서 혼자 돌아다니고 있던 벨카가 날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뛰어왔다.
내가 며칠간 운동도 산책도 하지 않아서 그런지 꽤나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 그간 하지 못했던 만큼 난 벨카를 잔뜩 쓰다듬어 주었다.
제대로 보상을 해 주려면 1시간 정도는 산책도 해 줘야 마땅했다. 벨카도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하는지 들뜬 모습으로 보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부족하다.
난 벨카의 목을 쓰다듬어 주면서 사과했다.
“미안해요. 나중에 더 놀아 줄게요.”
“?”
벨카는 왜 그러냐는 듯 날 올려다보다가, 곧 얌전해졌다. 내가 이렇게 부탁하면 잘 들어주는 편이라 다행이다.
강아지처럼 마구 뛰어다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늠름한 모습으로 벨카는 앞장서기까지 했다.
내가 놀아 주지 않으면 무엇을 하는지 이미 아는 것이다. 난 낮게 웃으며 벨카를 따라 별관으로 향했다.
“…….”
별관의 연습실은 내가 쓰고 있지 않아도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상태였다.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며칠 정도 만지지 않았을 뿐인데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피아노 연주자는 단 하루만 피아노를 만지지 않아도 감각을 많이 잃는다. 난 얼마나 잃었을까.
“안녕.”
가볍게 피아노에게 인사하고, 손 끝을 그 옆면에 대었다. 그리고 난 천천히 피아노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까맣게 칠해진 나무의 질감. 그 느낌은 서서히 내 안에 있던 무언가를 이끌어냈다.
벨카는 아예 자기 지정석으로 가서 돌돌 말려 있었다. 난 벨카가 얌전히 있는 걸 보고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하나씩 확인한다는 기분으로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
건반 단 하나를 누르는 것뿐인데도 이전까진 신경도 쓰이지 않았던 물리적 한계가 날 덮쳐 왔다. 이래서 할 수 있나. 걱정부터 덜컥 든다.
하지만 내겐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되어 있는 전승이 있다.
의심하지 않고 곧바로 펼쳐서 현실에 드러낼 수 있는 음악들. 그 첫 번째 곡으로 떠올린 건 바흐의 인벤션이었다.
두 개의 손으로 진행하는 두 개의 선율.
일반인은 이런 동작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다른 악기 연주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보통은 양손으로 악기를 연주하게 되니까.
하지만 바흐의 인벤션은 양손과 양 귀를 독립시키며 피아노 연주자로서 천천히 탈바꿈할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
몸 상태는 엉망이지만 전부 잊진 않은 것 같다.
그간 내가 어떻게 한계들을 극복해 왔는지, 그 모든 건 여전히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여러 저항과 장벽이 차례로 부서져 간다.
20분쯤 지났을 때. 난 바흐의 평균율을 연주할 수 있었다.
이번엔 네 개의 선율이 독립적으로 펼쳐진다.
그 전부를 하나하나 엉키지 않게 풀어나가면서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제대로 가늠해 들어갔다.
연주회는 3일 뒤였지만, 그 직전까지 상태를 정상화시킨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수천 명이 몰리는 연주회는 어느 한순간 내 마음대로 취소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아직 알렉산드라에게서 연락이 온 건 없지만, 아마 오늘을 넘기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연락이 온다면 그건 분명 연주회 취소에 대한 결정이 난 뒤의 연락일 것이 분명했다.
난 그 전에 스스로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하고 결정을 내린 뒤에 알렉산드라에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결정해야만 했다.
‘할 수 있을까.’
무너져 있던 컨디션이 차츰 더 빠르게 돌아오는 느낌이 든다.
평균율을 연주하기 시작하고 15분쯤 지나서 난 하농 스케일과 아르페지오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방식으로 각 조성을 오르내렸는지, 그건 내 손에 모두 기억되어 있었다. 그 기억을 다시 하나씩 떠올린다.
스케일과 아르페지오 연습은 딱 10분 만에 마쳤다.
그리고 난 곧바로 모차르트 소나타의 연습으로 들어가려 했다.
“……?”
그때 문밖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제즈다는 아니다. 예고르도 아닌 것 같고. 이 묘하게 난처해하면서도 들뜬 소리를 낼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들어오세요.}
피아노를 멈추고 영어로 이야기하자 잠시 후 연습실 문이 열렸다.
세연은 당혹스럽단 눈으로 날 보더니 물어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연습 마칠 때까지 기다리려 했는데.}
{소리가 들렸어요.}
{……꼼짝도 안 했는데.}
연습을 방해했다고 생각하는지 세연은 미안해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하품하고 있는 벨카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