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24화 (824/1,277)

##  824화

세연은 베르체노프가에서 하룻밤 자게 되면서 이 저택의 규모 등엔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놀랄 일이 너무 많았다.

간신히 욕실을 찾아서 씻고는, 계속 돌아다니는 것도 민폐일 것 같아서 방 구경만 하고 있었다.

어젠 오자마자 자 버리고, 병문안을 갔다 와서도 그냥 자 버린 터라 정작 방 구경은 이제야 제대로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 이것저것 둘러보던 세연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해가 뜬 지 꽤 되었는데도 타티아나로부터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는 건 전날 저녁으로 괜찮다고 했으니 오늘은 편하게 두려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 그녀 성격상 깨우러 오거나 다른 사람을 보낼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 예상과 달리 그 누구도 세연을 찾지 않았다.

아무도 찾지 않는다면, 반대로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제가 이곳에 있다고 누가 말해 주었나요?}

{응? 응. 여쭈어봤어.}

그걸 여쭈어봤다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세연은 그냥 타티아나란 이름만 말했을 뿐이었으니까.

친절한 이름 모를 고용인은 세연을 창 쪽으로 데리고 가선 밖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용케 밖으로 나와선 돌아다니다가 피아노 소리를 따라왔을 뿐이었다.

타티아나는 세연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연은 개인 연습실을 가지고 있는 타티아나가 백 배는 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굉장하네…….’

연습실은 정말 세연이 꿈에서나 그리던 광경 그대로였다.

한쪽 벽에는 악보와 음반 등이 가득했고, 언제나 원할 때면 음반을 들어 볼 수 있도록 스피커와 기계들도 갖추어져 있었다.

편안한 의자와 테이블이 있어서 피곤할 때 저기에 앉으면 될 것 같았다.

창가 쪽엔 커다란 강아지. 저걸 강아지라고 해도 되나? 모르겠다.

형용모순이건 어쨌건 이곳에 어쩐지 정말 잘 어울리는 털뭉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습실 한편을 가장 크게 차지하고 있는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와 그 앞의 타티아나.

{이리 오세요.}

앉아 있던 타티아나가 말했다. 세연은 조금 쭈뼛거리며 한 걸음씩 안으로 들어섰다.

뭔가 안으로 들어갈수록 이곳의 공기에 젖어 들어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라도 음악으로 울릴 준비가 되어 있는 공기에 덩달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타티아나가 방금 전까지 하던 연습은 정말 대단했다.

단지 아주 기초적인 스케일과 아르페지오 연습일 뿐이었는데도 겨우 그것만으로도 이미 수준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난다는 걸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

원피스 차림의 타티아나는 머리도 한데 묶어서 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보기엔 작고 가늘게만 보이는 그녀가 이 피아노 앞에서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세연은 이미 잘 안다.

얼마 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들었던 음악이 다시 뇌리 속을 흐르기 시작했다.

그 어둠 속에서 타티아나는 정말로 피아노의 화신과도 다름없었다.

지금도 그 모습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을까.

그런 기대로 세연은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앉아 보시겠어요.]

{응?}

{여기.}

그런데 타티아나는 자신이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고 갑자기 일어나 버렸다.

눈높이는 가까워졌지만 이전까지 주변을 장악하던 분위기가 휙 사라져 버린다.

세연은 당혹스러워서 머뭇거렸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직접 팔을 잡아 이끌어 세연을 피아노 앞에 앉혔다.

생전 처음 와 본 곳에서 처음 본 피아노와 마주하는 기분은 상당히 생경하다.

늘 새로운 피아노를 만지는 데에 익숙해야 할 피아노 연주자라 할지라도, 이런 환경은 정말 특이한 경우였다.

건반을 건드릴 엄두는 전혀 못 내고 뻣뻣한 자세로 앉아 있자 타티아나가 슥 다가오더니 부드럽게 물었다.

{요즘은 어떤 곡을 주로 연습하시나요?}

{어……?}

뭔가 연주를 해 보라는 뜻으로 앉게 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이렇게 관심을 보이니 세연은 머리가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말해도 돼?}

자기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나왔다. 막상 말해 놓고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다.

타티아나는 물끄러미 세연을 내려다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괜찮아요.}

{거의 쇼팽이야.}

{듣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어색함을 느끼던 세연의 두서없는 몸짓이 뚝 멎었다.

어떻게 하면 여기에서 일어날 수 있을지, 아침밥은 무엇일지 등등 온갖 잡생각이 돌아다니던 머리는 오직 지금 타티아나가 원하는 음악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세연은 그녀에게 들려줄 음악을 이미 쥐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세연은 그것을 그녀가 내어 준 숙제라 생각하며 준비해 왔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지라 연주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붙잡지 않는 건 피아니스트로서 실격이다.

세연은 스스로 피아니스트라 생각했다. 그래서 피아노로 손을 뻗었다.

{…….}

쇼팽의 녹턴 op.9의 1번.

타티아나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주했었던 그 곡이었다.

내림나단조를 딛고 화성이 길게 나누어진다. 느릿한 템포로 가느다랗게 피아노가 노래하기 시작한다.

비가 내리는 밤의 선율.

타티아나는 이 곡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여실하게 세연에게 보여 주었었다.

창가에 앉아서 빗소리에 묻힐 만한 노래를 부르는 모습.

그 이미지가 얼마나 강렬하게 뇌리에 박혔는지, 비가 내리는 날이면 세연은 항상 무의식적으로 이 곡을 떠올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연주는 타티아나의 것이다.

세연은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분석해서 밤하늘의 달빛을 찾아 가져오고, 빗방울을 하나씩 골라 삼켰다.

그렇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 음악을 차분히 펼쳤다.

{…….}

환경이 어두운 무대이거나,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세연은 거기에 개의치 않았다.

맑은 햇살이 들어오는 연습실이라면 거기에 맞춰서도 얼마든지 연주할 수 있었다.

세연은 자신이 어떤 장면을 드러내며 연기해야 하는지 무의식적으로 완벽하게 깨달으며 표현해 내고 있었다.

부슬비가 내리는 들판.

집 안에서 창밖으로 바라보지 않고 세연은 그곳으로 직접 발걸음을 향했다.

세연이 앞으로 걸을 때마다 치맛자락이 젖어들어가고 발목엔 풀잎이 스친다.

타티아나의 것과는 사뭇 다른 해석이다.

그러나 바로 이 음악이야말로 세연이 타티아나의 음악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던 것들을 다시 연구하고 엮어서 이루어 낼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직접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을 다시 손으로 전달하면서 세연은 연주에 점점 더 심취했다.

감정에 너무 매몰되면 현실의 손이 따라가지 못한다.

그 절묘한 균형을 지키면서 세연은 피아니스트로서 행동했다.

교수에게 여러 번 배우면서 많이 익히게 된 부분과 종혁에게 배운 노하우들.

그리고 현실적인 피아니스트의 완성체라 할 수 있는 타티아나의 모습에서 깨닫게 된 여러 가지가 세연으로 하여금 자신 있게 손을 뻗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나 지금 최고로 잘하지 않았나?’

그동안 여러 번 이 곡을 연습하면서 세연은 이쯤 하면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가장 최근에도 이 정도면 타티아나에게 들려주어도 창피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고.

하지만 그 모든 연주를 통틀어도 오늘이 제일 잘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5분가량의 연주를 마치고 세연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간 집중하느라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던 타티아나의 시선과 숨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린다.

{…….}

숙제 검사를 기다리는 심정이다.

심지어 세연은 같은 곡을 연주했음에도 그녀만의 해석을 보였다.

이건 음악가로선 바른 일이었지만, 숙제를 내 준 타티아나의 입장에선 황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A를 내주었는데 B가 나온 격이니까.

어째서 이런 해석이 나왔느냐고 혹시 물어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세연은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브라바.}

{……!}

짧은 찬사만이 세연에게로 향했다.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자 타티아나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연은 그제야 이 음악이 타티아나 역시 바라 못지않던 결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타티아나는 세연이 자신의 음악을 그대로 따라오길 원하지 않았다.

두 사람에겐 상당 부분 닮은 음악성이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곧 반드시 동화되어야 함을 뜻하진 않는다.

타티아나는 자신의 영향력이 세연이 자유로운 표현력을 드러낼 수 있는 데에만 국한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뛰어넘기를 원한다.

물론, 아직 타티아나를 뛰어넘었단 생각이 들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발치에 깔려 있거나 멀리 뒤떨어져 있는 건 아니었다.

이젠 적어도 그녀의 옆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는 곳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타티아나가 정말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에, 세연 역시 기뻤다.

{괜찮았어?}

{물론이죠.}

그 이상 이야기하는 것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타티아나는 웃기만 했다.

조금 더 많이 칭찬해 줬으면 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긴 하지만, 지금 그녀가 충분히 세연을 인정해 주고 있기 때문에 삼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건, 그럼 다음 숙제도 내 주었으면 좋겠다.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는 몇 번을 봐도 이해가 잘 안 가고 따라 하기 어려운 경우가 정말 많았는데, 타티아나의 음악은 마치 세연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너무나 받아들이기 쉬웠다.

세연은 타티아나가 보이는 다양한 음악들의 스펙트럼을 될 수 있는 한 배워 두고 싶었다.

{있잖아…… 혹시 다른 곡도 원하는 것 있어?}

{다른 곡이요?}

{응. 네가 연주해 주면 다음에 만날 때까지 연습해 둘게.}

오늘처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이야기하자 타티아나는 물끄러미 세연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세연은 순수한 마음으로 많이 배우고 싶다는 표현을 하고 있지만, 사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지금 그녀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심지어 같은 나이인 친구에게.

뒤늦게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세연은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을 본 타티아나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후후,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미 세연에겐 레슨을 해 주실 분들이 많잖아요?}

{아, 응…… 그렇지만…… 그래도…….}

{그리고 지금은 제가 컨디션이 완벽하지 않아서요.}

{아.}

세연은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지난 며칠간 심하게 마음고생을 한 타티아나는 피아노 역시 놓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간신히 다시 연습 중인 것이었다. 그런데 세연은 그런 건 생각도 않고 자기 이득만 보자고 보채고 있었다.

너무 부끄러워진 그녀는 사과부터 해야 하나 고민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항상 있었다.

{그러니 컨디션을 어떻게 바로잡는지 봐 주시겠어요?}

{……응?}

{아마 흥미로울 거라 생각해요. 제가 할 수 있다면 세연 역시 할 수 있을 테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세연은 멍하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은 타티아나는 옆에 있던 스마트폰과 태블릿 컴퓨터를 집어 들곤 무언가 조작하기 시작했다.

화면을 봐도 온통 러시아어라서 잘 모르겠지만, 어제 에르네스트가 보내 준 곡을 옮기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타티아나가 태블릿 컴퓨터의 화면에 악보를 띄웠다.

그리곤 첫 페이지를 잠시 바라보더니 곧바로 건반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게 말이 돼……?’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음악은 시작부터 과격했다.

느릿하게 곡을 파악하며 분위기를 잡는 것도 없이 그대로 재빠르게 달려 나간다.

그 모든 음을 타티아나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짚어냈다.

초견이 탁월한 음악가들은 복잡하고 템포가 빠른 곡들도 한 번에 연주하곤 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하지만 직접 눈앞에서 보니 정말 이게 현실인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인적인 능력에 가까워 보였다.

“…….”

세연에겐 보면대 위의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타티아나가 방금 미스 하나 없이 완벽하게 연주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완벽한 화음과 템포. 완성된 음악성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보를 받지 못한 청자도 아무런 문제 없이 음악에 감동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어서 타티아나는 바로 두 번째 페이지를 연주하려고 들어갔다가 멈칫했다.

아무리 그녀라도 살짝 실수 정도는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다시 그녀는 악보를 읽기 시작했다. 그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불과 몇 초 정도.

순식간에 다시 건반이 연주된다.

“…….”

어제 에르네스트가 준 이 곡의 목적은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

본래 듀엣으로 무대에 오르기로 했었던 타티아나가 혼자가 되었으니 쓸 만한 곡을 하나 더 쥐여 주기로 한 것이다.

어떻게 보더라도 무대를 위한 곡이었다.

하지만 미처 물어보지 못했을 뿐이지, 세연은 이제 연주회까지 며칠도 남지 않았는데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단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었다.

곡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아무리 빠르게 곡을 익히더라도 사흘은 너무 짧은 시간이니까.

심지어 완주가 목표가 아니라 무대에 올리는 것이 목표라면 더더욱.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사이에 분명히 해낼 수 있는 곡을 내어 준 것이었다.

타티아나는 그 곡을 어떻게 처음부터 익혀나가는지에 대해 세연에게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반복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

두 번째 페이지에 있는 프레이즈를 타티아나는 몇 번 반복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반복은 똑같은 부분을 연주하는데도 매번 색다르게 들려왔다.

타티아나의 정밀한 건반 컨트롤은 그야말로 머리가 아득해질 것 같은 충격을 가져왔다.

동시에 이러한 충격들은 세연에게 있어서 굉장히 큰 새로움이었다.

인간에게 이런 것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세연의 저변은 넓어져 간다.

이전에 했던 독주회에서도 타티아나는 불 꺼진 무대에서 완벽하게 연주를 해냈다.

그것을 직접 보고 믿을 수밖에 없게 된 세연은 그 후에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자신의 실력이 조금 올라갔음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한계에 대한 기준이 위로 올라간 것이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티아나가 곡을 연습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연은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물론 직접 피아노 앞에 앉는다면 또 한계를 느끼고 화를 내면서 몇 번이고 될 때까지 연습해야 하겠지만,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것을 무작정 연습하는 것과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연습하는 건 분명 다른 이야기였다.

{…….}

타티아나의 새로운 연습은 1시간 정도 계속되었다.

그 1시간 사이 세연은 자신이 생각하던 상식들이 수백 개는 깨져나간 기분이었다.

에르네스트가 왜 그녀를 다시 피아노 앞으로 돌려보내려 했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약간은 허탈한 웃음이 나올 정도로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그와 똑같은 정도로 그녀는 강력한 동기와 의욕을 잔뜩 느꼈다.

{잠깐 쉴까요.}

세연의 표정을 올려다본 타티아나는 손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녀도 조금 무리한 것 같았다.

잠깐 쉬는 사이 세연은 타티아나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방금 봤었던 것들을 다시 되새기며 상념에 빠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타티아나도 딱히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지금 이 잠깐의 시간이 세연을 얼마나 크게 성장시킬지 믿고 있으니 방해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조용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이 연주자로서 각자의 역량을 고쳐 쓰고 있을 때였다.

{…….}

타티아나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피아노 소리가 아닌 진동은 침묵을 살짝 어지럽혔다.

빠르게 스마트폰을 집어 든 그녀는 화면을 확인했다.

전화가 아니라 메시지인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세연으로선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메시지를 읽자마자 타티아나가 몸을 일으켰다.

{잠시 외출할게요. 세연, 여기 계세요. 피아노를 쓰셔도 좋아요.}

{응?}

난데없이 남겨두고 나간다는 말에 세연은 당황했다.

세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타티아나는 미안하다는 듯 설명해 주었다.

{아나스타샤가 병문안을 갔다고 하네요.}

{……?}

누가 그런 걸 전달해 주는거야?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던 세연은 어제 봤었던 그 삼엄한 경비를 떠올리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에르네스트의 병실 앞을 지키고 있던 인원들은 타티아나와 연결되어 있어서 필요에 따라 보고하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상상도 못 할 체계에 세연이 놀라 바라보자 타티아나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녀가 조금 무서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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