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25화 (825/1,277)

##  825화

택시에서 내린 아나스타샤는 거대한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쨍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시다. 그녀는 눈 위에 손날을 세웠다.

며칠 만에 보는 태양이라 그런지 적응이 잘 안 되는 기분마저 든다.

잠깐 서 있는데도 약간 어지럼증이 느껴져서, 아나스타샤는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

발을 앞으로 디딜 때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갖 단어와 문장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지난 며칠 동안 몇 번이나 맴돌았었던 생각들의 반복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나스타샤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꼼짝도 하지 않고 이틀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야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어떠한 준비나 판단을 미리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나스타샤가 정리하거나 제안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일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그녀에게 가능한 일은 그저 늦기 전에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에게 찾아가는 일이었다.

그녀를 걱정한 부모님과 일리야가 혹시 필요하다면 같이 가 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모두 거절하고 혼자서 병원으로 찾아왔다.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모르지만, 혼자서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카운터에서 에르네스트의 이름을 대고 병문안을 왔다고 전했다.

잠시 어떠한 확인 과정이 지난 뒤에 아나스타샤는 엘리베이터로 안내받았다.

최상층으로 향하는 특별한 엘리베이터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끝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리자 검문소 같은 것이 눈에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최고 수준의 VIP 대우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검은 복장을 한 남자가 다가와서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의 병문안이에요.”

“성함이?”

“아나스타샤라고 해요.”

“풀네임을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앞서 확인했음에도 다시 철저하게 체크하는 과정이 있었다.

묻는 대로 대답하고 심지어 학생증까지 꺼내 보여 주면서 아나스타샤는 이 모든 것들을 에르네스트가 준비하진 않았을 것이란 확신을 가졌다.

아마 다른 누군가의 조력이겠지. 문화부? 정부?

아니면 타티아나와 베르체노프 가문일지도.

“…….”

신분을 모두 밝히고 통과한 아나스타샤는 병실이 가까워질수록 자신도 모르게 발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주해야 한다.

하지만 무서웠다.

며칠간 간신히 잠들 때마다 아나스타샤는 꿈에서 누군가 비아냥거리며 원망의 말을 쏟아내는 것을 들으며 괴로워했다.

그렇게 멀쩡하게 생채기 하나 난 곳 없으면서 뭐 하고 있어? 가서 피아노 연습이나 하지?

이럴수록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아, 충격이 커서 트라우마라도 생기셨나?

그 악몽 속 목소리는 아나스타샤가 스스로 느끼는 무의식의 죄책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현실에선 에르네스트가 그런 말들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아나스타샤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니지, 아니야…….’

그간 봐 왔던, 그녀가 아는 에르네스트가 그런 저주와 폭언을 쏟아 낼 사람이 아닐 거란 믿음은 공고했다.

하지만 이런 가혹한 상황은 지금껏 처음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정말 무엇을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느려지던 그녀의 발걸음은 병실 근처에서 우뚝 멈추었다.

이대로 돌아갈까.

끔찍한 우울함과 두려움이 그녀를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가 왔다는 소식은 에르네스트에게 전부 전해졌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돌아간다는 건 그를 우롱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아나스타샤가 이를 악물고 다시 한 걸음 앞으로 향할 때였다.

“!”

“오.”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병실 문을 열고 나오다가 아나스타샤와 마주쳤다.

깜짝 놀란 아나스타샤가 다시 멈추어 섰다.

의사는 그녀를 보자마자 신원과 용무 모두를 알아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친구분 면회 오셨군요.”

“아…… 예.”

더듬거리며 대답해도 그냥 잠깐 놀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는지 의사는 차트를 넘겨 확인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음…… 사실 곧 검사가 있을 예정이라서 면회는 삼가 주었으면 하지만, 그래도 친구분께서 찾아온 것이니 5분 내로 짧게 끝내 주셨으면 합니다.”

시간 제한이 걸린 것이 차라리 다행인 걸까. 아나스타샤는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미웠다.

에르네스트가 그 이상 시간을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솔직히 이젠 뭐가 어찌 되든 아나스타샤에겐 판단할 힘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그리고 환자에겐 안정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 기억해 주시고.”

“……예.”

하지만 어지러운 와중에도 의사의 마지막 한마디만큼은 분명하게 들려왔다.

적어도 안정을 해하는 일은 없어야겠지. 그것만큼은 지켜 줘야지.

의사는 바로 들어가라는 듯 열린 병실 문 안쪽으로 팔을 내밀었다.

아나스타샤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병실. 그리고 먼 벽의 침대에 에르네스트가 있었다.

“아나스타샤.”

오른손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 하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발견하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아나스타샤는 정말 환자로 앉아 있는 에르네스트를 보고는 꼼짝도 못하고 멈추어 섰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대로 동상이 되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멍하니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멀리서 이야기할 건 아니지?”

그 말은 어떠한 주문처럼 아나스타샤를 움직일 수 있게 해 주었다.

가까스로 발을 움직여 아나스타샤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에르네스트의 얼굴은 밝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절망과 분노 등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균형을 이루며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아나스타샤는 말문을 열었다.

“일찍 못 와서 미안해.”

“아냐, 괜찮아. 정식 면회로 온 내 친구는 네가 처음이니까.”

처음? 그럼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는 계속 연락을 모두 끊어 놓아서 타티아나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물론 그사이 걱정이 올라온 적도 몇 번이나 있어서 전화라도 해 볼까 싶었지만, 사실 지금 에르네스트 다음으로 충격이 클 타티아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언젠가 만나야겠지. 그리고 원망이라도 듣는다면…….

“그런데 말야.”

어둡게 가라앉는 아나스타샤의 의식을 에르네스트의 목소리가 끌어 올렸다.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학교엔 내가 기절해 있다고 소문나 있는 거야?”

“……응?”

“그런 거면 정정 좀 해 줘. 나 멀쩡하다고.”

지금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않는 것이 그는 꽤나 신경 쓰이는 듯했다.

사실 친한 친구라 해도 발렌티나나 리처드, 한승우 정도겠지만…… 그 애들도 지금 충격이 커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겠지.

어쨌든, 아나스타샤로선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에르네스트의 태도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럴 입장이 아니라는 걸 알고, 또 안정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아나스타샤는 어쩔 수 없이 한 소리 하고 말았다.

“멀쩡하긴 뭐가 멀쩡해. 바보야. 그리고 학교가 어떤진 나도 몰라.”

“왜?”

“학교 안 갔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고 나서야 실수임을 깨달았다.

에르네스트는 창밖을 보더니 한낮인 게 어색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네. 이 시간에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건데.”

두 사람 다 수업을 듣고 피아노 앞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아나스타샤는 가슴이 아파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녀가 물어봐야 할 질문이었다.

“팔은…… 어떠니?”

“멀쩡한 건 아니지.”

방금 전 멀쩡하다고 했던 건 정말 지독한 농담이나 다름없었다.

에르네스트는 객관적인 태도로 스스로의 상태를 설명했다.

“전치 12주에 재활도 1년은 걸린대. 내년까진 다 날아갔지.”

“……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일이 아니잖니.”

“태연하다니? 내일 수술 들어간다고 해서 안 그래도 떨려 지금.”

“…….”

농담조로 이야기하기까지 한다. 상황이 너무 심각한 나머지 현실감을 잃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주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이성을 놓지 않은 건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괜찮다고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안하다. 전치 12주라는 진단은 정말 치명적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어떠한 희망과 동기가 그 안에서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에르네스트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그 빛이 사그라든다면 에르네스트는 곧바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지금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 낼 수 있는 건 절대로 아닐 텐데, 아나스타샤는 그 담담한 어조에 감탄이나 기쁨보단 경외를 먼저 느꼈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지 난 모르겠어. 내가…… 난…….”

“그럼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건데? 너한테 화라도 낼까?”

에르네스트에게도 그간 생각이 정말 많았던 것임이 분명했다.

긴 시간의 고뇌를 거친 그의 결론은 명료했다.

“의사건 선생님이건 친구건 눈앞에 있는 아무나에게 화를 내는 건 쉽지. 하지만 그만큼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겠어? 모두 날 도우려는 사람들인데.”

그 이성적이고 분별 있는 결론은 훌륭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그녀에겐 통용되지 않는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난 경우가 다르잖아.”

“응?”

“다르다고. 내가 원인이니까.”

그녀의 말에 에르네스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쓸데없는 소리는 단호하게 끊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담긴 눈빛이다. 그의 목소리 또한 엄격했다.

“사고에 원인이 어디 있어. 그런 건 없어.”

“내가 발을 헛디디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그런 건 후회해도 의미가 없잖아. 그럼 내가 조금 더 잘 굴렀으면 괜찮았을 수도 있었는데?”

“……그게 아니야.”

아나스타샤는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이제 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생각은 하나도 정리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아직도 그날 있었던 일이 어떻게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

딱 하나만 바꿔서 그 사고를 없던 일로 할 수 있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나스타샤는 알고 있었다.

“그때, 난 들떠 있었어.”

“뭐?”

“아침에 모두 말했어. 타티아나에게. 너보다 먼저 나랑 사귀어 보는 건 어떻겠냐고까지.”

경어를 내려놓은 타티아나의 추궁에 아나스타샤는 결국 약간의 충동의 힘을 빌려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 모든 상황이 아나스타샤에게 있어선 현실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의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들떠 있었던 거야. 널 만나고 나니까 더더욱,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었으니까.”

그 후 두 사람이 계단 중앙에서 에르네스트와 만났을 때, 아나스타샤는 바로 있었던 일을 말할까 말까 수십 번도 더 고민했다.

가만히 듣던 에르네스트 역시 그때를 떠올리는지 말했다.

“네가 뭐라 했었는지 기억이 나네…… 의견을 확인했다고 했었던가?”

“……그랬었지.”

결론은 안 났지만 의견 확인은 했다.

그 이야기를 에르네스트는 음악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런 이유만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모르는 무언가를 앞질러 진행했다는 것에 대한 흥분과 고양감.

두려움을 이겨낸 뒤의 자신감, 연적과 정말로 동격으로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는 호승심.

평생 느껴 보지 못했던 감각들이 아나스타샤의 심장을 거세게 뛰게 만들었다.

머리에 몰린 피는 주변을 잘 보지 못하게 만들고 행동을 과장되게 했으나, 그녀는 그런 것들을 자각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움직이려 했다.

“계단의 깊이가 어떤지도 잘 보이지 않았어. 그럼 움직이지 않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발만 뻗을 수 있다면 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었지.”

중얼거리며 이야기할수록 점점 더 후회와 죄책감이 아나스타샤의 가슴을 짓눌러 왔다.

더 이상 말하기 정말 힘들었지만 아나스타샤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경솔하게 하지 않고 신중했더라면, 충동적으로 타티아나에게 이야기했던 것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차분했겠지. 들뜨지 않았을 테고 너와 그 자리에서 더 이야기하려 했었을 거야.”

에르네스트는 그녀에 대한 충분한 존중을 항상 보여 주는 친구였으니 아마 대화도 잘 통했을 것이다.

그게 제일 좋았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그저 혼자 들떠 있었을 뿐이었다.

“발을 헛디딜 일도 없었겠지. 그러니까 모두 내 잘못인 거야. 내가 받았어야 할 벌이고.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

아니, 사실은 알아.

네가 하자는 대로 했으면 모든 게 괜찮았을 텐데. 내가 모든 걸 망쳤어.

“미안해, 바로 포기하지 못해서. 정말로 난…….”

사과로 시작된 아나스타샤의 말은 결국 흐느낌으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전까지 해 왔던 모든 일들이 전부 잘못된 것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틀렸다.

주변에 피해만 끼친 무가치한 무언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아나스타샤는 울먹였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에르네스트는 울고 있는 아나스타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에 대한 여러 감정들이 복잡하게 그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이렇게 우는 것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아나스타샤가 거칠게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용감하네. 아나스타샤.”

“……?”

상상도 못한 이야기였다. 아나스타샤가 멍하니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정말 깜짝 놀랐다는 듯 말했다.

“아마 괜찮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네가 정말 실천에 옮겼을 줄은 몰랐어.”

“난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닌…….”

“그리고 지금 내게 전부 말해 준 것도 전부. 대단하네.”

믿기 어려웠다. 아나스타샤는 사람의 의중을 꿰뚫어보는 감이 좋다.

그래서 에르네스트가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알아보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어떻게 보더라도 그는 정말로 감탄을 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지금 이런 연기를 할 이유는 없었다.

할 말을 잃은 아나스타샤가 입을 벌리자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진 알겠어. 상황이 참 공교롭긴 하네. 하지만 난 완전히 별개의 일이라 생각해.”

“……아니야, 에르네스트.”

“맞아. 달라.”

“아니라고…….”

이런 식으로 이해받거나 용서받고 싶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어떻게든 그의 논리와 인정을 부정하고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미리 알아본 에르네스트가 이어 말했다.

“여기서 싸워 봐야 소용없겠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건 안 돼. 그렇게 알아 둬.”

“……도망?”

“도망치려고 하고 있잖아.”

에르네스트가 희미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를 가리켰다.

“그러면 네가 냈던 용기가 아깝잖아?”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일로 결론을 맺는 것을 에르네스트는 좋아하지 않았다.

스스로 나아갈 길은 반드시 스스로 찾고 책임져야 하는 구도자로서 그는 늘 똑같은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단지 지금은 그때 있었던 일을 조금 더 알게 된 것에 만족한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침대에 편안하게 누우며 말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더 이야기하자. 조금 더 좋은 곳에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

“그땐 나도 이런 건 풀고 있을 테니까.”

그러면서 그는 왼팔에 감긴 반깁스를 가리켰다.

아나스타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심정으로 이곳에 와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사과까지 할 순 있었는데, 지금은 정말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멍하니 앉아 있자 잠시 후 의사가 병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면회 시간이 더 필요합니까?”

“방금 끝났어요.”

에르네스트가 대답하며 아나스타샤에게 손짓했다. 이만 나가 봐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 손에 이끌리듯 일어선 아나스타샤는 몇 걸음 걸어 나가다가 문득 뒤돌아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그건 그녀에게 잘 가라는 인사이면서, 다음에도 반드시 또 오라는 뜻이기도 했다.

“…….”

아나스타샤는 대답하지 못하고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병실을 막 빠져나온 뒤엔 정말로 정신없이 무언가에게서 도망치듯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밑으로 내려왔다.

안도를 느끼는 스스로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마치 바닷물을 한 컵 들이켠 기분으로 병원 밖으로 빠져나온 아나스타샤는 바로 햇살 때문에 휘청거리며 눈을 가렸다.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방에 틀어박힐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택시, 택시를 잡아야지.’

중얼거리며 도로가로 나온 아나스타샤는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앞에 서 있던 한 검은색 차량이 이쪽으로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저 택시를 잡을 생각뿐이었던 아나스타샤는 그 차량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도로만 보고 있다가, 커다란 검은 벤츠가 바로 앞에 멈춰 서고 나서야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그녀 앞에서 뒷좌석 창문이 열렸다.

“아나스타샤.”

차 안의 타티아나는 어두운 그림자에 뒤덮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나스타샤가 숨도 못 쉬고 경직되어 있는 사이,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타세요.”

그 말은 거의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거부하지 못하고 뒷좌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잠시 후 검은 차량은 출발해서 도로를 달리는 수많은 차량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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