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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826화 (826/1,277)

##  826화

다짜고짜 아나스타샤를 길거리에서 잡아 태우자마자 빅토르가 차를 출발시켰다.

행선지가 어디인지 알리지도 않고 검은 선글라스는 오늘따라 더더욱 검게만 보인다.

차 안에선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이윽고 불안한 목소리로 아나스타샤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잠시만요.”

난 그녀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었다.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하죠.”

“…….”

지금은 솔직히 급하게 나오느라 생각의 정리가 덜 된 상태였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를 직접 보고 나니 떠오르는 생각들도 많았고.

지금 내겐 그녀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지 혼자서 차분하게 정돈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침묵하는 날 보며 아나스타샤 역시 조용히 뒤로 기대었다.

내가 그런 것처럼 그녀 역시 생각이 많아 보인다.

30분 정도 시내를 빠져나와 우리가 다다른 곳은 조금 한적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의 한 카페였다.

내가 딱히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빅토르는 이곳에 우릴 데려다주었다.

나 역시 그에게 무언가 묻지 않고 그가 데려다준 곳으로 들어섰다.

처음 와 보는 카페인데도 상당히 좋은 곳이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2층까지 모든 건물이 카페로 쓰이고 있었다.

오전 시간이라 사람도 꽤 많아서 그나마 조용한 곳이 어디 있을지 둘러보는데, 빅토르가 조용히 다가와서 이야기했다.

“2층의 프라이빗룸으로 가시면 됩니다. 따라오시죠.”

예약 등이 분명 필요할 것 같은데, 이미 다 끝마쳤는지 빅토르는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를 찾아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로 한 층을 올라가는 건 순식간이다.

문이 열리고 걸음을 내딛자마자 빅토르는 빠르게 작은 방을 찾아내어 문을 열어 주었다.

“이곳에서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필요하시다면 주문도 지금 해 주시죠.”

“적당히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사전에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다 준비한 건지 모르겠다.

운전을 하면서 무언가 하는 것 같진 않았는데. 유능한 그가 미리 이렇게 척척 자리를 만들어 주자 따로 신경 쓸 일이 없을 정도였다.

덕분에 내 신경은 온전히 앞에 있는 아나스타샤에게 향할 수 있었다.

“…….”

테이블을 하나 두고 마주 보고 앉은 우리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학교를 마치고 놀러 온 것이라면 기쁘게 웃으면서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럴 상황도 기분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용히 서로를 살피는 건 이 정도면 충분했다.

겨우 며칠 사이에 수척해진 아나스타샤를 보며 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심정이었다.

“얼굴이 왜 이래요. 아나스타샤.”

“…….”

아나스타샤는 다짜고짜 데리고 와선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너야말로.”

“전 괜찮은걸요?”

“……괜찮기는.”

중얼거리며 그녀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행동 하나하나에 죄의식이 가득 묻어나서 보기에 괴롭다.

한참 주저하던 그녀는 변명하듯 한 손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동안 연락 못 해서 미안해. 폰이 고장이 나서.”

“그런가요?”

“응. 수리 맡겨 놨어.”

정말로 고장이 난 건지 아닌지 알 순 없지만, 지금 그런 걸 굳이 확실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진짜로 연락하길 원했더라면 스마트폰의 고장 여부 같은 건 아무 상관 없었을 테니까.

난 우선 가볍게 그녀의 이야기를 받아 주었다.

“저도 고장 나긴 했는데, 그냥 쓰고 있어요.”

“너도?”

“예, 보세요. 깨졌어요.”

내 스마트폰을 들어 보여 주었더니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굳었다.

언제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이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역력하다. 그녀의 불안감은 여기까지 전해져 왔다.

하지만 난 지금 긴장감을 만들려고 이야기를 받아 준 것이 아니라, 그저 대화를 조금씩 하고 싶을 뿐이었다.

“옛날엔 사람들이 서로 쉽게 연락하지 못하고 어떻게 살았을지 궁금하지 않나요?”

“옛날에?”

“오래전엔 그랬겠죠. 친구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도 편지를 보내서 한참은 기다려야 했을 테고…… 그동안은 그저 기다려야만 했던 시절.”

그런 시절에 살아 본 적은 없지만, 얼마나 불편했을지.

그리고 또 얼마나 그리워했을지 그 마음이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

난 희미하게 웃으며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지금 이렇게 며칠만 못 봐도 불안하게 되는데, 참. 그렇지 않나요.”

불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연락하지 못하고 그 때문에 더더욱 불안해진다.

서로 자유롭게 연락할 수 있는 기계가 있는 지금도 자유롭지 못하고 악순환을 반복하는 일이 생긴다.

우리는 간신히 그것을 끊어내고 이렇게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이건 내가 주도한 일이 아니다. 집 밖으로 나와 병문안을 간 건 아나스타샤가 먼저였으니까.

그녀는 잠시 내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며 조용히 있다가 천천히 과거를 회상하듯 이야기했다.

“그렇게 옛날로 갈 것도 없이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이런 거 없었지 않았니?”

“……그렇긴 하죠.”

“그땐 직접 가서 놀자고 부르거나…… 했던 것 같네.”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던 아나스타샤의 초점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프라이빗룸은 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우리가 있는 이 공간을 다시 한번 확인한 그녀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직접 온 거니? 병문안을 온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방법이 있지요.”

“궁금한데.”

“안 말해 줄래요.”

내가 빌려 쓸 수 있는 정보력을 따져본다면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걸 친구에게 설명하고픈 마음이 들진 않았다.

아나스타샤도 거기에 크게 신경 쓰진 않는다는 듯 훌쩍 건너뛰어선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무슨 말을 해 줄 거야?”

“무슨 말?”

“할 말이 없는데 날 여기 데리고 오진 않았겠지. 솔직히 뭘 듣고 싶은 건지 예상이 가긴 해.”

“제가 뭘 듣고 싶어 하는데요?”

곧장 아나스타샤가 꺼내든 이야기는 바로 그녀가 하고픈 본론이나 다름없었다.

“에르네스트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듣고 싶은 것 아니니?”

난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그녀가 병원에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곧장 그 뒤를 쫓아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 사이의 진지한 대화를 캐묻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 목적은 다른 곳에 있다.

하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당연히 알고 싶다. 걱정되니까.

가만히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는 순간적으로 고민하는 듯 보였지만, 곧 작은 목소리로 고백하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갈 때까지만 해도 정말 생각이 많았어.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 그냥 딱 한 가지만 분명해지더라고.”

사고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컸고, 고맙다고도 미안하다고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그저 숨이 조여드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던 건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 내릴 수 있었던 최소한의 결론도 비슷했다.

아나스타샤는 이를 악물며 이어 말했다.

“교묘하게 나도 힘든 것처럼 보이게 해서 그 애를 곤란하게 만들고, 용서 비슷한 걸 구해서 편해지진 말자고. 다른 건 몰라도 절대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지.”

“……아나스타샤.”

“그런데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아니?”

내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불러도 무시하면서 아나스타샤는 신랄하게 스스로를 비난하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결국 울면서 사과했어. 명백하게 그 애를 난처하게 만들었지. 네 탓이 아니란 말을 유도한 거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너랑 있었던 일도 모두 다 이야기했어. 그 애가 뭐라고 했는지 아니? 나더러 용감하다고 그랬어.”

그녀는 그것이 교묘한 짓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을 테고, 그 직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한 것도 그 일환이었을 테다.

에르네스트는 그 이야기들을 받아 준 것 같다. 그리고 그 역시 그의 진심이겠지.

서로 진심으로 대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모든 것을 의심 중이었다.

이래선 안 된다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습이다.

목적성 없는 실망과 분노 등이 얽혀서 그녀의 목소리에 스며든다.

아나스타샤는 한층 더 예리하게 스스로를 베었다.

“용감한 건 그 애와 너 두 사람이지. 내가? 내가 왜? 내가 뭘? 난 도저히 그게…….”

“아나스타샤.”

그 모습을 그냥 두고 보고 있기가 너무 힘들어서, 난 일어서서 테이블 건너편의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그녀가 섬뜩하게 이야기했다.

“하지 마, 타티아나.”

“…….”

“지금도 난…… 그냥…… 그냥 말을 하지 않는 게 맞았어. 난 너희에게 도움이 안 돼. 다치게 하거나…….”

그녀에게서 난 얼마 전 내 모습을 발견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스스로가 제일 밉고 싫어져서 도피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내면의 깊은 곳에선 그런 기분들이 여전히 남아서 꿈틀거리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이 모든 일들을 씻어 내진 못하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지금 일어서서 아나스타샤를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의 괴로움마저 진심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난 그녀 옆에 선 채로 내려다보며 이야기했다.

“저나 에르네스트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단지 곤란하다는 이유로 할 것 같은 사람처럼 보이시나요?”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고 멀거니 바라본다.

혼자서 생각하고 결론을 내릴 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 바로 진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는 부분이 그녀의 생각 사이로 날카롭게 비집고 들어간다.

한동안 말이 없던 아나스타샤가 툭 내뱉었다.

“궁금한 게 있어.”

“……말씀하세요.”

“그때, 왜 그렇게 움직인 거니?”

멍하니 올려다보던 그녀는 순간 손을 내 쪽으로 뻗어 내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무게가 아주 약간 이쪽으로 향했을 뿐인데도 난 휘청거렸다.

아나스타샤가 손아귀에 힘을 주며 물었다.

“평소에 이렇게 힘도 없는 애가, 어떻게 날 잡아올릴 수 있었던 거야?”

“…….”

“내가 직전에 좋아한다고 했었으니까?”

아나스타샤는 아직도 내가 어떠한 맹목에 따라 움직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이건 그만큼 내가 평소에 보통 사람처럼 굴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말없이 바라보자 아나스타샤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런 거니? 내가 그 말을 안 했다면 네가 무리하게 내게 손을 뻗지 않지 않았을까?”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차라리 이 모든 시작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계속해서 그런 생각들을 해 온 것 같았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다면 어떻게든 에르네스트가 아니라 내가 대신 다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몇 번이고 온갖 방법들을 떠올리며 상상해 봤다.

하지만 그 어떤 상상에서도 아나스타샤를 포기했던 적은 없었다.

“아뇨.”

의심과 후회로 가득한 눈으로 날 보는 아나스타샤를 똑바로 바라보며 난 팔을 쥔 그녀의 손을 천천히 풀어냈다.

“아나스타샤가 절 증오한다고 말했더라도, 전 똑같이 행동했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니.”

“이런 말이죠.”

그리고 난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서 아나스타샤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내게 세연이 해 주었던 것처럼.

죄책감에 시달리는 내게 에르네스트가 했던 말들이 이해가 간다.

그는 어째서 상관없는 일이니 탓하지 말라 했던 걸까.

그 말 자체가 야속하다고 느끼기까지 했지만, 지금 난 아나스타샤가 스스로의 탓을 하며 혼자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 역시 혼자가 되길 바랄 때 내 옆엔 세연이 있었다.

지금 아나스타샤 옆엔 내가 있어 주어야 할 때였다.

바짝 굳어 있는 아나스타샤가 가느다랗게 숨만 쉬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난 조용히 다독이듯 이야기했다.

“모든 것이 자기 탓 같죠. 저도 그래요.”

“네가 왜…….”

“그 순간이 잊히질 않아요. 저도.”

끔찍한 무기력함과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난 집중을 잃으면 금방 공포에 휩싸여 손을 떨게 된다.

때문에 집중한다.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잃으면 안 되는지. 어떻게 쓰러지지 않고 균형을 잡으며 고개를 들 수 있을지.

“그러니 잊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죠. 저희에게도.”

아나스타샤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살짝 놓아주고 물러서서 바라보니 그녀는 내게 위로를 받는 것 자체가 굉장히 괴로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이성을 되찾은 건, 이것이 비단 무조건적인 위로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덕분이었다.

“……타티아나. 너 왜 날 찾으러 온 거야?”

총명한 그녀는 순식간에 내 의도를 짚어낸다.

난 에두를 것 없이 그대로 오늘 그녀에게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연주회를 진행하려고 해요.”

“…….”

아나스타샤의 눈빛에 다시 의심이 들어찼다. 저 의심이 내 정신건강에 대한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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