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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829화 (829/1,277)

##  829화

세연은 전승이 있기에 우리가 존재하며 안심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고, 난 거기에서 내가 무대에 서야 할 이유를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을 신념처럼 무겁게 짊어질 필요는 없다.

내가 정말 앞으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확인이 곧 자연스럽게 전승자로서의 증명이 될 테니까.

그 증명은 에르네스트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지금 이 상황에 불안해하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증명이자 안심이 된다.

난 내가 잘 해내기만 한다면 긍정적인 기도를 모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알렉산드라는 내 말을 듣고도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래도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지금 번지점프와 비슷한 기분으로 무대에 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중이었다.

그냥 어떻게든 서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선다면 반드시 끔찍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녀도 비슷한 걱정으로 내게 질문을 하려다가 못했던 것이 기억났다.

난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어쩐지 알렉산드라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서서히 날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도 없이 무턱대고 나서는 일이 결코 없다는 걸 아나스타샤는 잘 안다. 그녀는 중얼거리며 말했다.

“네가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걸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나도 오늘 아침에야 피아노 앞에 앉아서 확인했다.

내가 과연 지금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주자로서 올바르게 움직일 수 있는지.

병실에 있는 에르네스트를 떠올리면서도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인지.

수많은 사람들의 불신과 낙담을 음악으로 꿰뚫고 휘감아 당길 수 있는 사람인지.

난 생각보다 꽤 냉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진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

그 어떤 장대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더라도, 내가 이 손의 경련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마음을 다잡지 못하여 무너져내렸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집중력을 끌어 올리며 음악에 집중하는 것으로 컨디션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고, 아침에 잠깐 연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신했다.

난 할 수 있는 연주자였다.

“일단…… 다른 분들도 부르도록 하죠. 타티아나는 결정을 내리신 것 같고. 아나스타샤는 어떻죠?”

“전…….”

아나스타샤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지 주저했다.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으로 봐야 한다.

만약 그녀도 지난 며칠간 피아노를 만지지 않았다면, 앞으로 3일 동안 그 컨디션을 회복시키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불투명하다.

하물며 무대에 오르는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더라도 시간적으로 불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나도 알렉산드라도 그녀에게 급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잠시 차를 마시는 사이 알렉산드라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스푸마토 콰르텟 멤버들을 부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부르는 것이니 시간이 꽤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사이 연습실을 잠깐 빌리는 게 어떨까 싶다.

그런데 전화를 끊은 알렉산드라는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근처에 있으니 5분 안에 오겠다고 하는군요.”

“……그렇게 급하게 오실 건 없는데.”

“그만큼 급한 일로 여긴다는 거겠죠?”

5분도 소중한 시간이긴 하지만 연습을 하기엔 너무 짧다. 때문에 난 적당히 조금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침부터 연습하다가 아나스타샤와 만나고 이어서 알렉산드라와도 이야기하려니 생각보다 많이 피곤했다.

알렉산드라가 찻잔을 다시 채워 주었고, 다시 그 찻잔을 반쯤 비웠을 때였다.

정말로 5분도 안 되어서 네 명의 남녀가 뛰쳐 올라왔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게오르기와 다리아, 카일, 솔렌은 우릴 발견하고는 일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가 곧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침통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5분 만에 달려온 만큼, 이 사람들은 그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옆으로 다가온 다리아는 갑자기 아나스타샤를 껴안았다.

“유감이에요. 정말로, 정말로.”

“…….”

포옹을 받아들이는 아나스타샤의 태도엔 여전히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다리아의 솔직한 목소리는 그런 모든 복잡한 이유 등을 모조리 포함하여 위로하고 있었다.

게오르기도 내 대각선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난 그가 내 상태를 확인하는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다들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건 똑같은 것 같다.

난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데 게오르기는 되레 더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포기하려는 눈빛이 전혀 아닌데.”

“포기하지 않으려고 여기에 왔어요.”

“……그렇습니까?”

중얼거리던 게오르기는 이어서 알렉산드라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알렉산드라가 강요한 것 같지도 않고.”

“……게오르기. 전 말렸어요.”

“그랬을 것 같네요. 사실 저도 말리고 싶으니까.”

날카로운 시선을 하고 있던 게오르기는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야기했다.

“이미 감당하기에 너무 어려운 무대가 되어 버렸죠.”

다들 생각은 비슷한 것 같다.

시간은 너무 촉박하고 청중들의 웅성거림과 의심은 평소보다 몇 배는 클 것이 분명하다.

너무나 힘든 상황이었다.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을 거란 판단이 합리적일 정도로.

하지만 분명한 이유를 쥐고 무대에 오르려 하는 연주자에겐 그런 계산이 필요하지 않다.

게오르기는 다시 날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할 거죠? 타티아나.”

난 곧장 대답했다.

“예.”

“그럼 해 봅시다.”

그 역시 이미 생각은 끝마쳤다는 듯 말했다.

커다란 배의 조타가 서서히 움직인다.

연주회를 진행하는 방향으로 의지를 모았으니, 이제 정말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할 때였다.

과연 이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까. 만약 실패한다면 여기에 있는 모두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건 어쩌면 회생불가에 가까울 정도로 위험한 것일 수도 있었다.

때문에 보다 신중하게 우리는 회의에 들어갔다.

“급하게 사람을 섭외하는 건 불가능하겠죠. 이런 정규 연주회에 메인도 아닌데 3일 내로 준비해서 참가하려는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겁니다. 그렇죠? 알렉산드라.”

“며칠 전부터 혹시나 싶은 분들께 물어봐도 모두 난색을 표하시더군요.”

“1부는 저희가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완성시킨다고 해도, 2부는 아마 타티아나 혼자서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연주회에 생긴 트러블은 단순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벌써 전 세계에 뉴스로 퍼져나간 에르네스트의 사고에 대한 일이다.

그의 대신으로 새로운 연주자를 끌어들이려 하더라도 이 상황에 덥석 도움을 주려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시간이라도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이제 겨우 3일밖에 안 남았으니 더더욱.

결국 남아 있는 연주자들이 알아서 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아직 결정을 안 내렸으므로, 지금 이대로라면 나 혼자.

어느 정도 생각했던 부분이라서 난 가만히 있는데 되레 콰르텟 멤버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혼자서 전부……? 리사이틀입니까 무슨?”

“타티아나에게 너무 버거운데요.”

“……타티아나, 그러면 저랑 바이올린 소나타라도 하면 어떨까요? 아마 타티아나의 실력이라면 반주는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다리아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녀의 말대로 내 독주곡만으로 2부를 채우지 않고 합주를 하나 끼워 넣는다면 조금은 편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지금 합주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다리아가 아니라 다른 그 누구와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저 혼자 해 볼게요.”

“……그래요.”

다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해 주는 것 같았다.

그 후로도 우리는 회의를 이어 나갔다.

피아노 연주자 한 명이 빠진 것이지만 모든 것이 어렵게 되었기에 하나부터 끝까지 다 확실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연주자로서 무대를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

20분 정도 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알렉산드라는 다시 한번 회의 내용들을 꼼꼼하게 검토하고는 이야기했다.

“그럼 이렇게…… 이대로 하는 것으로 일단 보고 올리겠습니다. 이후 연주회에 대한 안내도 똑같은 방식으로.”

이젠 취소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 진행하겠다고 알렉산드라가 공표해 버린다면 그다음은 하는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정해진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몇 시간이 남은 거지?

시간적 압박이 보다 현실적으로 확 다가온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도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난 이보다 더 빠르게 내가 이 자리에 나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사과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죄송해요 여러분. 제가 조금 더 일찍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무슨 소리입니까? 타티아나. 이렇게 찾아 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게오르기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전 타티아나가 하겠다고 해 줘서 무척 고맙군요.”

“…….”

“많은 고민을 하고 있겠지만…… 전 당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연주회에 대한 내용만이 아니다. 그도 차라리 취소하길 바라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내가 의지를 잃지 않고 나서서 비로소 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앞에 놓인 찻잔을 한 번에 들이켠 게오르기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났다.

“그럼…… 이렇게 모여서 시간을 쓰는 것도 아깝군요. 이쯤 하죠. 아나스타샤는 저희랑 같이?”

“……예, 그럴게요. 저도 확인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아나스타샤는 아직 피아노 앞으로 복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아마 지금 바로 콰르텟 사람들과 함께 연습실로 갈 생각인 것 같았다.

사실, 컨디션을 확인하고 연습해 보는 건 혼자서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옆의 사람들이 주는 압박감은 생각 이상으로 강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런 압박을 빌려서라도 어떻게든 다시 피아노에 앉으려는 것 같았다.

“…….”

난 약간 걱정이 들었다.

판단은 그녀에게 맡기겠다고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상황은 그녀가 무대에 오르도록 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강압을 느끼면서 아나스타샤가 무대에 오르는 건 반대하고 싶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막 게오르기를 따라나서려다 말고 돌아서더니 날 불렀다.

“타티아나.”

내가 바라보니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오늘 날 찾으러 와 줘서 고마워.”

그녀가 집 밖으로 나와 에르네스트를 찾아갔다는 정보를 듣자마자 난 곧바로 그녀를 찾아갔다.

당연히 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그 과정 등에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하지 않았다면, 난 아마 평생토록 후회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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