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30화 (830/1,277)

##  830화

타티아나는 전화를 받더니 나가 버렸다. 연습실 구석에 있던 커다란 개도 당연하다는 듯 그녀와 함께 나갔다.

연습실에 남겨진 세연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이 먼 땅에 와서 갑자기 피아노 연습실에 혼자 남겨질 줄은 몰랐다.

폰을 들고 지도앱을 켜 봐도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대충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당혹감도 잠시 뿐이었다.

모험심 강한 세연의 흥미는 곧 이 연습실 전체를 향해 뻗어나갔다. 그녀는 두서없이 두리번거렸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넓은 연습실. 수 천개도 넘어 보이는 악보와 음반들.

그중 하나를 꺼내서 재생시켜 보기도 했다. 세연은 그 순간 정말 콘서트홀 한가운데에 뚝 떨어진 줄 알았다.

살면서 이렇게 현장감 넘치는 음향 시스템은 처음이었다.

물론 너무 놀란 나머지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다가 이 시스템 전체가 아니라 스피커 한 짝이 자동차 한 대와 비슷한 가격이라는 걸 보고는 그 이상 건들지 않았다.

혹시나 잘못 만졌다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세연이 감당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동차보다 훨씬 더 비싸면서도 고장 낼 걱정 없이 자신 있게 만질 수 있는 물건도 있었다.

바로 커다란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였다.

때문에 세연은 다른 모든 걸 제쳐놓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타티아나도 허락했으니 괜찮으리라. 그리고 그녀가 냈었던 소리를 세연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

다른 바이올린 같은 악기들은 주인에게 허락을 받더라도 함부로 만지기가 꺼려지는 부분이 조금 있다.

하지만 피아노는 달랐다.

사람에게 종속되지 않고 그 자리와 공간에 묶여 일체를 이루는 이 악기에 있어서 연주자는 말 그대로 연주자일 뿐이다.

세연은 조심스레 건반을 한 번 눌러 보았다. 뭔가 건반이 손가락에 착 감기는 기분마저 든다.

지금까지 스타인웨이는 여러 번 만져 봤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느낌이 좋은 피아노는 처음인 것 같았다.

‘타티아나가 쓰던 거라서 그런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세연은 건반을 까딱여 보았다.

피아노는 연주자를 잘 가리지 않는 악기이지만 어쩐지 이 피아노가 타티아나에게 물들어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꽤 재미있는 느낌이어서 세연은 몇 번 건반을 터치하며 그 감각을 느껴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젠 타티아나의 방도 들어가 봤지만, 그곳보단 차라리 이곳이 생활감이 넘쳤다.

온통 주위엔 음악밖에 없고 그것이 곧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공간.

이렇게 직접 집에 와 본 것은 처음이라서, 세연은 그전까지만 해도 타티아나가 꽤 다채로운 삶을 살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연의 뇌리에 박혀 있는 재벌이라는 이미지는 보통 모든 걸 다 가지고 모든 걸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하지만 타티아나가 진짜로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건 여기 이 공간에 있는 것들 정도가 전부인 것 같았다.

심지어 이 방 밖으로 나갈 땐 그 무엇도 가지고 나갈 수 없다.

그저 열심히 모아서 만든 음악만 한 움큼 가지고 나갈 뿐이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드네.’

재벌가 영애에게 가진 게 음악뿐이라니. 웃기는 소리였다.

평소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니는 타티아나가 얼마나 중요 인물인지 세연은 이미 확인한 바 있었다.

지금도 아나스타샤를 잡으러 나간 그녀가 어떤 도움들을 받고 있을지 세연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나저나 잘 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세연은 중얼거리며 다리를 쭉 폈다.

에르네스트가 당한 사고를 두고 타티아나는 그것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자책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연관된 이유로 아나스타샤가 집에서 잠수하고 있었다면 지금 두 사람이 만나서 하고 있을 이야기는 굉장히 심각할 것이다.

세연은 아나스타샤를 떠올렸다.

처음 본 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였다. 그땐 타티아나의 언니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곧 오해였음을 알았고, 미국에서 봤을 땐 그녀 또한 엄청난 피아니스트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다시 모스크바에서 보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아나스타샤와도 세연은 인연이 꽤 있는 편이었다. 세연은 그녀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때문에 아나스타샤도 타티아나도 잘 지냈으면 좋겠다. 그저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 뿐이었다.

「……에이.」

혼자서 생각하던 세연은 문득 이러고 있어 봐야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에르네스트의 쾌유를 기도하는 것, 그리고 타티아나가 가끔 숙제처럼 던져 주는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내는 것 정도.

그중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진 명백했다. 바로 눈앞에 피아노가 있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

허락을 받고도 타티아나의 개인 피아노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던 세연은 조금 더 과감하게 제대로 된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들었던 타티아나의 연습이 떠올랐다.

바흐부터 하농까지, 정말 고지식하면서도 성실한 방식이었다.

그 정도 되는 연주자가 그렇게 연습을 시작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세연은 귀가 밝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그 연습 과정을 따라 하는 것처럼, 세연은 바흐의 평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연습 레퍼토리에 넣고 자주 연습하는 편은 아니라 타티아나처럼 전부 외우고 있진 못했다.

그래서 결국 중간에 악보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래도 예전에 연습했던 감각이 남아 있어서 그럭저럭 잘 칠 수 있었다.

테크닉과 리듬뿐만이 아니라 음색까지. 세연은 그 모든 것들을 떠올리며 레퍼런스로 삼고 천천히 자신의 그림을 맞춰 갔다.

희한할 정도로 그 과정은 매끄럽게 이어졌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느꼈던 기분이다.

다른 연주자들의 레퍼런스를 듣고 그것을 기준으로 따라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주 미세한 특징이나 해석의 차이가 연주 전체의 느낌을 바꿔 놓는 까닭이다.

때문에 오랜 연구와 연습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세연은 타티아나의 연주를 듣고 나면 너무나 쉽게 그 곡에서 좋은 점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

손끝에 달라붙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여 준다.

이상할 정도로 편안한 연습 속에서 세연은 빠르게 숙달되어 갔다.

이곳에서 세연이 얻은 건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실컷 연습하다가 중간에 다시 악보를 보며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연습실 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들어왔다.

그녀는 세연을 보고 잠깐 고민하더니 간략한 러시아어로 물었다.

“배고프다?”

그 정도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던 세연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세연의 앞에 빵과 소세지 등 아침식사로 충분한 테이블이 차려졌다.

전화를 받자마자 나가는 타티아나에게 밥은 어떻게 하냐고 물어볼 수는 없어서 그냥 얌전히 굶으면서 기다릴 셈이었는데, 식당으로 부르는 것도 아니고 직접 상을 차려 주는 이 친절에 세연은 감동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 □□□ □□□.”

말은 하나도 통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식사를 가져다준 사람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세연은 연습실에서 진짜 식사를 해도 되는지 어색할 지경이었다.

세상 그 어떤 최고급 호텔에서도 이런 대우를 받긴 어렵겠지.

평소 버릇대로 일단 사진부터 찍어 남긴 후 세연은 빵을 집어 들었다.

조금 찢어 입에 넣으니까 빵이 스르륵 사라진다. 씹을 것도 별로 없이 마치 마법처럼 맛만 입안에 남았다.

「여기가 천국인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세연은 찻잔을 들었다.

보기만 해도 호화로운 연습실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경험은 세연의 기분을 매우 좋게 만들어 주었다.

때문에 평소보다 시간을 들여서 느긋하게 그녀는 식사를 즐겼다.

그러나 그 기분도 쭉 계속 가진 않는다.

함께 이야기하며 다른 사람과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세연은 혼자서 밥 먹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곳이라면 조금 다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새삼 느꼈다.

자신의 일관성에 감탄하며 그녀는 혼자 킥킥거리면서 다시 빵을 찢었다.

「…….」

식사를 마친 뒤 세연은 테이블 위를 보다가 슬슬 정리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옆에 있는 쟁반 위에 접시와 찻잔들을 올려 모으고, 연습실 문을 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돌아다니다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가르쳐 주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연이 연습실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건 사람이 아니라 커다란 털뭉치였다.

“왕.”

「까, 깜짝이야…….」

이름이 뭐였지. 벨카라 했던가.

아까 연습실에서 어슬렁거릴 때도 굉장히 커 보였는데, 지금 문 앞을 가로막은 벨카는 정말 벽이나 다름없었다.

몸으로 비집고 나가면 어떻게 나가지긴 하겠지만, 어쩐지 벨카가 가만 보고 있지 않을 것 같단 느낌이 확 들었다.

세연은 일단 말로 해 보기로 했다.

「비켜 줄래?」

하지만 벨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세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달려들거나 할 것 같진 않았지만, 어쩐지 얌전히 안으로 들어가 있으라는 무언의 압력이 느껴져서 세연은 결국 조용히 다시 연습실 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 나니 뭔가 억울했다.

「왜 그러는건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문 앞에서 기다리던 세연은 20초 정도 마음속으로 센 후에 이쯤 하면 갔나 싶어 다시 살며시 문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시퍼렇게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벨카와 마주하고는 도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문으로 나가는 건 망한 것 같다.

아니면 창문을 넘는 수 밖에 없었는데, 세연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연습실을 빙글빙글 돌면서 저 개가 도대체 왜 저럴까 고민하던 세연은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렇게 시간낭비할 것이 아니라 밥 먹었으면 다시 연습을 해야 할 때였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세연은 계속 연습실에 있었다.

연습하고 연구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평소 하던 것과 별로 다를 건 없었지만 단지 장소가 바뀐 것만으로도 세연은 평소보다 연습 능률이 열 배는 더 높아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당연히 딴청을 피울 생각도 들지 않았다.

더더욱 집중력을 쏟아부으며 피아노에 몰두할 뿐이었다.

아침에 타티아나가 했었던 기초 연습들의 순서와 방식을 돌이켜보며 어떤 식으로 훈련이 되는지 연구해 보기도 하고, 그녀가 컨디션을 되돌리는 재활이라면서 했었던 연습의 구조를 따라 해 보기도 했다.

처음 보는 곡을 초견으로 빠르게 읽는 것과 반사적으로 손가락이 튀어 나가도록 하는 연습.

모두 처음엔 잘 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아는 세연에게 의심이란 없었다.

3시간쯤 지났을 때, 세연은 어렴풋이 타티아나가 해냈던 것들의 윤곽을 잡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온전히 세연의 것이었다.

「…….」

처음 타티아나가 보여 주었던 레퍼런스들은 이제 흐릿해져 있었다.

세연이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덧씌우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맹목적인 복사본이 아닌 음악. 이것이야말로 타티아나가 원하는 것이었다고 세연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돌아온다면 기뻐하겠지, 다시 타티아나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세연은 다시 건반을 터치했다.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벨카가 짖는 소리도 들린다.

세연은 기쁜 마음으로 벌떡 일어나선 연습실 문을 열고 타티아나를 맞이했다.

{갔다 왔어? 타티아나.}

{늦었죠. 미안해요.}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오는 타티아나는 곁을 빙글빙글 도는 벨카와 장난을 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나쁜 일이 있을 것 같진 않다는 기분이 든다. 세연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니야, 괜찮아. 이야기는 잘 되었어?}

{예. 세연은?}

{나?}

{연습실에서 나가지 못하고 계속 연습하고 계셨던 것 아닌가요?}

물론 계속 연습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얻어낸 것도 많으니 잘된 거긴 한데…… 지금 타티아나의 질문은 조금 이상했다.

세연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벨카가 문 앞을 지키고 있었으니까요.}

{아, 그래. 맞아. 그 애 왜 그러는거야? 내가 아예 못 나가게 하던데?}

{제가 감시해 달라고 부탁했었거든요.}

{어?}

내가 제대로 연습할 수 있도록 벨카를 시켜서 감시했다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세연은 멍하니 타티아나와 벨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장난이라는 듯 낮게 웃더니 걸친 카디건을 벗으며 말했다.

{후후, 그럼 잠깐 볼까요. 저도 보여 주고 싶은 게 많거든요.}

그 말을 들으며, 세연은 만약 지난 몇 시간 동안 연습을 하지 않고 폰이나 가지고 놀고 있었다간 정말 크게 혼났을 것이란 걸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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