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31화 (831/1,277)

##  831화

세연은 지난 몇 시간 동안 자신이 완성시킨 것들을 타티아나에게 보여 주었다.

한 번만에 모든 것을 깨우치는 완벽한 천재성 같은 걸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단지 세연이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은 타티아나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과, 거기에 도달할 만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 정도뿐이었다.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긴 했지만 세연은 자신 있게 가진 바 최선의 실력을 다했다.

둘 사이에 어떠한 직접적인 내용의 약속 등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연은 타티아나의 의도를 짚어 내면서 그녀에게 숙제를 받아 하는 기분으로 해내곤 한다.

{대단하세요. 세연.}

타티아나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본 후 짧게 한마디 했다.

담백한 어조였지만 그녀가 정말 많은 것을 참고 있다는 걸 세연은 느낄 수 있었다.

잠깐 사이 크게 나아간 세연에게 당장 더 많은 칭찬을 퍼붓고 싶어 하는 표정이 언뜻 드러난다.

하지만 그녀는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금 무턱대고 기뻐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있었고, 그 전부터 타티아나는 세연에게 도움이 되어 주려 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으려 애쓰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 역시 그 선에 걸쳐 있는 것이리라.

세연은 섭섭하게 여기지 않고 쿨하게 생각했다.

적어도 그녀가 싫어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세연이 지난 몇 시간 동안 이룬 결과물을 확인한 타티아나는 곧 자신의 이야기 역시 세연에게 말해 주었다.

{오늘, 결정 짓고 왔어요.}

{그래? 무슨 결정?}

{연주회를 진행하는 것으로.}

{아, 그렇구나.}

어젯밤까지만 해도 타티아나는 깊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 마음속 결정을 짓고 아침에는 자기 컨디션을 확인하고 현실성을 따져본 뒤에, 오후에 바로 결정을 내려 버린 것이다.

그녀의 결정은 이제 말뿐만이 아니다.

분명 여러 곳에 다 전했을 것이고 이제 발을 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잘 되었다거나, 기쁘다는 등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세연은 그저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것들만 입에 담았다.

{잘 할 수 있을 거야. 에르네스트도 기뻐할 거라 생각해.}

{그럴까요.}

{응. 물론이지.}

“……□□□□ □□.”

타티아나는 조용히 러시아어로 무어라 읊조렸다.

무슨 뜻인진 알 수 없지만 에르네스트에 대한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복잡한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본래 그녀는 에르네스트를 병실에 두고 무대에 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차라리 그 옆에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세연은 몇 번이나 느꼈다.

에르네스트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훨씬 더 분명하게 타티아나의 심정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무대 위로 올려보내려 했다.

전부 타티아나를 위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론 병실을 지키고자 했던 타티아나를 밀쳐냈다는 사실이 남는 일이기도 했다.

‘왜 그랬는진 알겠지만, 참 힘들겠어.’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던 세연은 자신도 거기에 한몫했다는 기분이 들어서, 이제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단 책임감마저 느꼈다.

{아무튼, 나도 뭔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와줄게! 그…… 어, 예를 들면…… 글쎄…….}

무턱대고 말부터 꺼냈던 세연은 쉽게 그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찬조 연주자로 출연?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티켓을 팔지 않고 이벤트성으로 하는 무대라면 또 모를까,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열리는 정기 연주회에 아무 준비도 안 된 세연이 3일 내로 무언가 해서 오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연습을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연은 타티아나와의 실력 차이가 꽤 난다는 것을 인지하며, 인정하고 있었다.

20세 미만만 놓고 보면 아마 전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한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이지 않을까.

세연은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내년 국제 무대에서 제대로 한 번 맞붙는 게 목적인 것도 사실 실력 차를 좁혀 나가기 위함이었다.

실제로도 세연은 지금까지 늘 도움만 받아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거꾸로 되돌려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시간이 없는 타티아나에게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다.

‘할 게 없는데?’

하다못해 심부름이라도 해 주려고 생각해 봐도 피아니스트에겐 그런 것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식사 준비 등은 어차피 고용인 분들이 훨씬 더 잘 해 줄 일이다.

말이라도 안 꺼냈으면 모르겠는데, 도와주겠다고 해 놓고는 막상 뭘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세연은 결국 자포자기식으로 중얼거렸다.

{난 그냥 식객인가……?}

{그런 말씀 마세요. 와 주신 것만으로도 전 기쁘니.}

{솔직히 말해 볼래? 내가 온다고 했을 때 너 당황했었잖아.}

{그땐 그랬죠.}

타티아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가볍게 이야기했다.

겨우 하루 정도이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두 사람은 지금 서로를 조금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세연이 바라보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감사할 따름이에요.}

{……뭘 그렇게까지 그래?}

괜히 창피해진 세연은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조금 풀어진 미소를 짓고 있던 타티아나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어깨를 바로 했다.

두 사람이 긴장을 풀며 이야기하는 것도 여기까지였다.

평소처럼 조심스레 양해를 구하는 어투가 아닌, 확고하게 딱 떨어지는 목소리로 타티아나가 말했다.

{여기 이렇게 계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하단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죄송해요. 세연에게 많은 시간을 내주긴 어렵겠어요. 지금부턴 조금 바쁠 예정이라서.}

{응? 아, 그래. 당연하지!}

아마 타티아나는 손님을 꽤 극진하게 대우하는 사람이겠지. 하지만 지금 그녀에겐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세연은 그 부분에 대해선 전혀 불만이 없었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해해 주어서 고맙다는 듯 웃으면서도 타티아나는 석연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심심하실 거예요. 제 방에 가 계신다 해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혹시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따로…….}

{그런 건 괜찮아! 그냥 옆에서 보고 있을게. 절대 방해 안 하고. 그러면 안 될까? 아침에 했던 것처럼.}

{…….}

세연은 놀거리라면 무엇이든 사양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타티아나의 연습을 지켜보는 것 이상으로 흥미 가는 일이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그 무엇을 가져다 놓더라도 세연은 신경 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진심으로 지금 다른 건 전혀 필요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이윽고 타티아나가 말했다.

{뜻대로 하세요.}

{응. 너도 내 신경 쓰지 말고 연습하면 돼.}

{……미안하네요.}

타티아나는 중얼거리긴 했지만, 앞으로 3일을 전부 연습에 쓸 예정이라면 정말로 세연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마음을 정한 타티아나가 다시 세연을 바라보았을 때, 그 눈빛은 아주 냉정하고 견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시작해야겠어요.}

말을 마친 타티아나는 옆으로 휙 돌았다.

세연은 그녀가 곧장 피아노 앞으로 가서 연습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었다.

“선생님. □□ □□□ □□□.”

“…….”

“□□□ □□□ □□.”

정신적으로 몰리고 시간도 촉박한 이 상황에서, 피아니스트로서 활동하기로 결정한 타티아나는 굉장히 이성적이고 철두철미했다.

무턱대고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두드리는 것보다 먼저 학교 측에 연락을 취하는 걸 우선순위로 잡은 것이다.

조금도 움츠리지 않고 허리를 쭉 펴고 서선 담담한 목소리로 전화를 마친 타티아나는 손을 내리더니 세연을 보고 말했다.

{며칠간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어요.}

{아…… 그래. 시간이 없으니까.}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세연이 바라보자 타티아나는 폰을 내려놓고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야말로 피아노 앞에 앉으려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그녀는 노트와 펜을 가지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무언가 빠르게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건가 궁금해서 옆에서 본 세연은 그것이 3일짜리 시간 계획표라는 것을 깨달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그녀가 리허설 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개인 연습을 하는 건 못 봤었는데, 그때도 이렇게 했던 걸까?

‘타티아나가 아니라 다른 애가 이렇게 하고 있었으면 장난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학교에서도 꼭 이런 아이들이 있었다. 예쁜 다이어리를 가져와선 하루하루 계획을 짜는 스타일.

하지만 세연은 그런 애들이 공부를 잘 하거나 특출한 무언가를 보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타티아나가 이렇게 계획표부터 짜는 걸 보며 조금 당황스러웠다.

“…….”

하지만 타티아나가 만드는 계획표는 일반적인 학생들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타티아나는 오로지 검은 만년필만 사용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원이나 네모가 아닌 긴 라인으로 24시간을 그었다.

수면 시간으로는 정확하게 6시간을 책정해서 몰아넣고, 남은 18시간을 나누기 시작한다.

세연이라면 그 18시간을 피아노 연습 4시간, 식사 1시간, 휴식 1시간. 이런 식으로 대충대충 나눴을 터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결코 대충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면서 노트의 빈공간에 무언가 숫자를 써 넣고 더하고 곱하면서 수식을 쓰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나온 시간은 분 단위로 정해졌다.

거기에 영어로 곡명을 써 넣고는 오차범위인 몇 분을 붙여 계획표에 써 넣는다.

「뭐야 이게……?」

계획표만 보고도 멍한 목소리가 나온다.

옆에서 들여다보던 세연이 중얼거리자 타티아나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보시나요? 그리 신기할 건 없는 것 같은데.}

{어…… 이게 계획표라는 건 알지. 그런데 난 살면서 이런 걸 지키는 사람이 본 적이 없어서.}

당황한 나머지 그런 말이 나오고 말았지만…… 어쨌든 사실이었다.

세연은 이런 게 실제로 제 기능을 하리라 믿기 어려웠다.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어 쓴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듣긴 했지만, 그건 약간 과장된 이야기라고 생각해 왔었다.

타티아나도 짧게 웃었다.

{저도 평소에 이런 걸 쓰진 않아요. 시계를 보지 않고 가용한 시간 전부를 피아노에 투자하는 타입이죠.}

{보통 그렇지?}

{하지만 지금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쓸 수 있는 시간이 70시간도 채 남지 않은 타티아나는 초조해하지도 않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떤 식으로 지켜나가는지 보여 드릴게요.}

그리고 세연은 정말로 처음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진짜 프로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무대에서만 프로처럼 잘 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을 할 때도 프로여야 한다는 것을.

「…….」

계획표를 다 짜고 난 타티아나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테크닉 연습부터 시작했다.

아침 연습으로 컨디션을 파악한 타티아나는 연습에 필요한 곡들이 각각 몇 분씩 필요로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농 연습곡 39번 스케일 연습은 각 조성마다 오르내리는 데에 5초. 24개를 통틀어 2분에 딱 떨어진다.

아르페지오 연습은 더 짧게 휘리릭 쳐내리니 24번의 연습이 딱 1분 안에 끝났다.

계획표에는 이러한 3분간의 연습이 2번 반복해서 6분이 걸린다고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다음으로 바로 이어진 것은 바흐의 평균율이었다.

평균율 1권의 10번 푸가 1분 30초, 14번 프렐류드 1분, 18번 푸가 2분 20초.

필요한 곡들만 추려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템포로 차분하게 연주하고는 쇼팽 에튀드로 넘어간다.

10-1를 2분. 10-2는 1분 10초. 25-6가 1분 50초에 완벽하게 연주되었다.

‘정확하게…….’

세연은 옆에서 지켜보면서 시간을 재는 건 뭔가 타티아나를 시험하는 것 같단 기분이 들어서 하지 않으려 했지만, 딱히 스톱워치를 들고 재 보지 않아도 지금 타티아나가 완벽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쇼팽 에튀드까지 연습을 마치고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었을 때, 세연은 지금 시간과 계획표에 적힌 시간을 비교했다.

5초도 차이가 안 날 정도로 정교하게 딱 맞아떨어졌다.

아침에 들었던 것과 같은 기초 연습일 뿐이다.

하지만 밖에서 들을 때도 어마어마했던 이 곡들의 완성도가 대체 얼마나 높은 건지, 세연은 눈앞에서 새삼 느끼고는 소름 끼치는 감각을 느꼈다.

‘정말 달라…….’

계획을 잘 지킨다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하진 않는다.

정해 놓은 시간 동안 집중하고 시간이 초과하면 끊는 식으로, 최소한의 집중된 결과물을 얻어내려 애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시간에 종속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철저하게 객관화된 자기 역량의 지표를 가지고는 시간을 컨트롤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시간에 쫓기면서도 시간에 지배당하진 않았다.

{1분 쉬고 본 연습 들어갈게요.}

{…….}

타티아나는 눈을 감고 허리를 숙였다.

멍하니 세연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애가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면 뭘 할 수 있었을까? 공부를 한다고 해도 엄청나게 잘했을 것 같다.

재벌이기도 하니까 정말 못 하는 게 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타티아나는 피아노를 택했고,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끌어내어 피아노에 집중시켰다.

그 결과로 태어난 피아노의 화신이 숨을 쉬고 있다.

타티아나가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다음 음악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세연은 전율을 이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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