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33화 (833/1,277)

##  833화

알렉산드라는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프로그램은…… 지금 2부 연주자인 타티아나에게 맡겨 놓았습니다. 예, 아, 압니다. 당연히. 하지만 저희도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연주회에 대한 회의를 마치고 그에 대한 결정 사항 등을 알렸더니 사방팔방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취소를 예상하고 있다가 당황해서 문의해 오는 전화들은 차라리 괜찮았다.

하지만 문화부에서 이 연주회의 관련자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기관총처럼 쏘아붙였다.

음악예술국의 부국장보는 그녀를 거의 잡아먹을 기세였다.

에르네스트 없이 어떻게 연주회를 진행할 것이며, 그대로 진행했을 경우 생길 여파나 수습 방법 등 고려한 사항 들을 빠짐없이 정리해서 서면으로 제출하라는 식으로, 그렇지 않아도 바쁜 알렉산드라를 거의 미치게 몰아세웠다.

왜 그 전까진 협조적으로 밀어주던 사람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는지에 대해선 안 봐도 뻔했다.

자신들이 나서서 취소시키게 되면 귀찮아지는 일이 많아질 테니 알렉산드라 선에서 책임지고 취소하란 뜻이었다.

‘도움을 주진 못할망정…….’

이 연주회의 성패를 따져보았을 때 성공이 거의 확실시 되는 상황에선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빠지고 연주자들이 잠적하는 등 불안정성이 커지자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모아진 듯하다.

에르네스트는 국가적 재산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피아니스트이지만, 타티아나 역시 베르체노프 콘체른이라는 엄청난 배경을 지니고 있는 중요 인물이었다.

만약 문화부 주최의 연주회에 올랐다가 타티아나가 큰 타격이라도 받는다면 꽤 곤란해지는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는 아니다.

알렉산드라도 비슷한 이유로 사고 직후엔 취소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타티아나가 어떤 마음으로 무대에 오르려고 하는지, 그것에 대해서 듣고 이해해 주려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엔 화가 났다.

이 불안한 세계에서 모두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타티아나는 그런 말을 했다.

그건 심지어 지금 압력을 넣고 있는 문화부 작자들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전부 생각해서 말했던 거였나…….’

타티아나가 얼마나 깊은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아직도 알렉산드라는 전부 가늠할 수 없었다.

단지 그녀는 직접 알렉산드라를 찾아와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불안해하고 있던 그녀를 안심시키며 설득했고, 그다음으론 이 연주회의 실패를 예상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에르네스트를 잃은 것이라 생각하는 여러 사람들을 안심시키고자 한다.

물론 타티아나가 나서서 기자회견 같은 걸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건 아무 효과도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안다.

때문에 그녀에게 주어진 무대 위에서의 시간을 사용하려는 것뿐이다.

지극히 피아니스트적인 마인드였다. 알렉산드라는 그런 그녀가 이겨내리라 믿고 있었다.

“저희 연주자들은 모두 의욕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믿고 기다려 주시죠. 예, 감사합니다.”

알렉산드라는 상대가 뭐라고 하는지 듣지도 않고 마구 이야기하고는 급한 것처럼 전화를 끊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갑자기 방해꾼들이 많이 생겨 버린 이 상황에서 최대한 방패막이 되어 주는 것이다.

어차피 해서 안 될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연주회는 목전에 다가와 있으니 지금 취소시키라고 압력을 넣는 사람들도 결국 알렉산드라가 버텨 버린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놔둘 수밖에 없었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전부 알렉산드라와 연주자들이 짊어질 책임이 될 뿐이다.

아마 알렉산드라는 영영 일자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어린 연주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하려고 하는데, 알렉산드라는 모른 척할 생각이 없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끝까지 책임지고 가야만 했다. 그것이 콘서트 디렉터이자 어른인 그녀의 도리였다.

“후…….”

숨 돌릴 틈도 별로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전화들을 해결하고, 또 수많은 서면과 메일을 처리하며 알렉산드라는 묵묵히 연주회를 정상적으로 진행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물론 그중엔 반가운 소식들도 있었다.

- 아나스타샤와 함께 리허설 마쳤습니다. 퀸텟은 문제없이 1부를 맡을 예정입니다.

“아…… 다행이네요.”

게오르기로부터 온 전화였다.

정신적 충격이 컸던 아나스타샤가 과연 무대에 설 수 있을까, 그리고 서고 싶긴 한 걸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회의를 마치자마자 아나스타샤는 스푸마토 콰르텟의 인원들과 함께 리허설을 하러 갔다.

만약 도저히 퀸텟을 이루기 힘들 정도로 아나스타샤에게 문제가 심각하다면, 결국 1부의 프로그램도 모두 바꾸어서 콰르텟 연주로 진행해야만 했다.

당연히 그동안 연습했던 퀸텟을 할 수 없으니 큰 문제가 된다.

하지만 다행히 아나스타샤도 이겨 낸 모양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게오르기께서 잘 케어해 주신 덕분이에요.”

- 저희가 뭘요? 하하. 아나스타샤가 대단한 피아니스트라 가능한 일이죠.

게오르기는 그냥 인사치레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녀의 말을 받았다.

묘하게 말이 빠른 것이 굉장히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알렉산드라도 연주자들의 상황이라면 되도록 많이 듣고 싶었기에 그에게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 이 연습실에 처음 오자마자 피아노에 앉았을 땐 영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건반을 전혀 만지지 않아서 손가락을 저는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심각했죠.

듣기만 해도 아찔해지는 상태였다.

연주자들이 며칠 쉬면 기량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가락을 전다고 말할 정도로 크게 문제가 생기진 않는다.

아나스타샤의 문제는 정신적인 부분에 가까웠다.

타티아나가 데리고 왔을 때도 아나스타샤는 꽤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인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이 말 이전에 게오르기가 이미 리허설을 끝내고 아나스타샤에게 아무 문제가 없음을 인정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조금 더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 하지만 겨우 15분 정도 시간을 들여 연습을 하고는 저희와 바로 합을 맞춰 보자 하더군요.

“바로요? 그리고요?”

- 그 연습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나스타샤는 다시 자기 감각을 되찾았습니다.

게오르기가 이렇게 말한다는 건 기존 기량을 거의 다 회복했다는 뜻에 가까웠다.

알렉산드라는 퀸텟 리허설 상황을 상상해 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스스로 제대로 연주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자각한 연주자가 합주에 참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견고한 음악 체계는 아주 냉정해서 실수한 사람의 소리를 툭 불거지게 내놓는다.

그건 다른 이들이 눈감아 준다 하더라도 그 누구보다 실수한 본인에게 크게 돌아온다.

그런 것이 몇 번 반복되고 나면 자신감을 잃고 고립되기 마련이다.

합주도 되도록 실력이 맞는 연주자들과 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어떻게든 이겨 낸 모양이다.

“합주에서 도움을 얻은 것이겠죠?”

- 그보단…… 저희를 이용한 느낌이었습니다.

“……예?”

생각도 못한 이야기에 알렉산드라가 되묻자 이번엔 게오르기가 웃었다.

다시 생각해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는 투였다.

- 최대한 빠르게 감각을 찾기 위해선 음악 속에서 찾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겠죠. 때문에 합주 속으로 뛰어든 겁니다. 아주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확실했고.

자기 악기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상태에서 똑같이 다른 누군가와 합주를 하더라도, 자신 없이 옆 사람들의 지지에 기대어서 조금씩 일어서는 것과 확신을 가지고 음악부터 이끌어내어 용감하게 낚아채려 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아나스타샤는 분명 후자 쪽이었고, 떄문에 게오르기는 그녀를 굉장히 고평가하고 있었다.

그저 피아노만 잘 치는 어린 연주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라는 간략하게 만들어 놓은 연주회 전 체크리스트를 찾아내어 퀸텟과 아나스타샤에 대한 항목들을 모두 체크했다. 해결되었다는 의미였다.

다시 체크리스트들을 들여다보며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가 되었네요. 이렇게 빠르게 아나스타샤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 타티아나에게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더군요.

펜을 쥐고 있던 알렉산드라의 손이 멈칫했다.

피아노 연주자들은 독립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지만,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서로 교류하는 면들이 많았다.

그것은 좋은 영향일 수도 있지만, 때때론 속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지금 빠르게 연주자로서 복귀하고 결정을 내린 것은 영향과 속박 그 사이 즈음의 무언가란 느낌이 들었다.

알렉산드라는 그 균형이 꽤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생각은 게오르기 역시 마찬가지로 하는 듯했다. 다만, 그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했다.

- 친구들에게 강하게 얽매이고 있는 것 같지만…… 이 연주회를 성공시키고, 앞으로 아나스타샤도 좋은 무대를 가지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피아니스트인지 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라는 음악계에서 잔뼈가 굵었기에 친분이 있는 음악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게오르기는 대놓고 잘 봐 달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자신의 콰르텟이 아니라 만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피아니스트를 위한 이야기라는 것이, 한편으론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분명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다시 한번 그의 부탁을 되새기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 세상엔 참 훌륭한 음악가들이 많아요. 하하하.

게오르기는 껄껄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그나마 좋은 이야기를 들어서 알렉산드라도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더 의욕적으로 서류들에 집중하려 할 때였다. 방금 내려놓았던 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타티아나였다. 벨이 미처 두 번을 채 울리기도 전에 알렉산드라는 번개처럼 전화를 받았다.

- 알렉산드라.

“예, 무슨 일이죠? 타티아나.”

다른 건 다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아무 차질 없이 연주회를 열고 홀 안에 청중들을 들여보내는 것, 그리고 무대 위에 연주자들이 오르는 것까지.

그다음은 연주자들의 일이다.

1부의 퀸텟은 별문제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게오르기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2부에 대해서는 그저 깜깜했다. 모든 것이 타티아나의 손에 달려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묻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같이 많았지만, 지금 제일 머리 아플 사람은 다름 아닌 타티아나일 것임이 분명했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참았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 메일을 보내 드렸어요.

“예?”

- 프로그램 의견서예요. 보시고 확인해 주셨으면 해요.

“벌써요?”

깜짝 놀란 알렉산드라가 되물었다.

회의를 마치고 각자 돌아간 지 이제 4시간 정도 흘렀다.

그런데 벌써 2부 프로그램을 혼자서 다 기획했다고?

당혹스러움을 느낀 알렉산드라는 한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다른 한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노트북으로 메일을 불러오는 사이 타티아나가 이야기했다.

- 직접 뵙고 논의를 해야 할 일이지만, 제 쪽에서 먼저 움직이는 편이 빠를 거라 생각했어요. 만약 허가해 주신다면 본격적으로 준비할 예정이에요.

“아…… 그, 잠시만요. 지금 확인할게요.”

빠르게 알렉산드라는 메일을 열었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단지 3개의 본 프로그램 곡과 1개의 앙코르 곡 이름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자마자 알렉산드라는 눈을 크게 뜨며 몇 번이고 확인했다.

믿기 어려운 프로그램이었다.

입을 벌린 채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던 알렉산드라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이…… 곡들을 전부?”

- 예, 전부.

“남은 기간 동안 준비하실 수 있다고요?”

당황해서 다시 확인하려는 알렉산드라에게 타티아나는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 할 수 있어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면, 분명 할 수 있다.

알렉산드라는 머리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타티아나의 실력은 익히 봐 왔다.

그녀가 솔리스트로서 강점이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른 복잡하게 얽힌 상황들은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콘서트 디렉터로서의 직감이 이 프로그램을 무대에 올리지 못하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라 외치고 있었다.

-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게 아니라…….”

알렉산드라는 중얼거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연주회 2부는 리사이틀에 가깝게 되었다.

그리고 타티아나가 무엇을 바라고 무대에 오르는지 알렉산드라는 이제 꽤 또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완벽한 때와 상황을 제공하는 일이다.

그 일환으로 알렉산드라가 제안했다.

“이 프로그램은 밝히지 않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전화 너머의 타티아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해되는 바가 있는지 수긍하는 목소리를 냈다.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 진행은 빨랐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전화를 끊은 후, 알렉산드라는 낮게 심호흡하며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위태로운 상황을 정리하고자 작성해 준 체크리스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알렉산드라는 그것을 다시 들여다보고는 그냥 전부 구겨서 옆에 던져 버렸다.

생각을 잘못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방해를 뚫고 연주회를 진행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진정 해야 할 일은 그게 아니라 최고의 연주회를 만드는 일이었다.

타티아나는 불과 몇 시간 만에 그 첫 단추를 꿰었다. 다음은 알렉산드라가 일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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