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34화 (834/1,277)

##  834화

알람 소리도 없이 눈을 뜬 나는 햇살 속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

연주회 당일의 아침이다.

지금까지 연주회를 몇 번이나 해 오면서 당연히 난 연주회 아침도 같은 횟수만큼 맞이했다.

그때마다 해 왔던 아침 루틴은 항상 비슷했다.

잠을 완전히 몰아낸 뒤 몸 상태를 확인하고 아침 연습을 하는 것까지, 모든 것들을 규칙적으로 해낸다.

그리고 이건 지난 3일간의 일과와도 비슷했다.

난 이 연주자로서의 감각을 놓지 않기 위해 계속 규칙적인 생활을 해 왔다.

요 며칠간은 연습 과정까지도 비슷하게 구성한 뒤 나 혼자서 계속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지금 실질적으로 난 최종 리허설을 홀로 20번 정도 반복한 상황이었다.

3일은 꽤 긴 시간인 것이다.

{타티아나, 연습 끝났어?}

짧은 아침 연습 후 손을 내리고 잠시 마지막 점검을 하는데, 세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처음엔 조금 우왕좌왕 했던 그녀도 이젠 많이 익숙해졌는지 한결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내가 연주회를 준비하는 세연은 계속 우리 집에 함께 있었다.

날 찾아온 손님이자 친구라 할 수 있는데도, 우리 관계는 평범한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다.

일어나서 제일 먼저 우리는 이곳 별관 연습실에서 서로 마주하고 아침 인사를 한다.

{좋은 아침이에요. 세연.}

그 후로도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실에서 보내지만 우린 함께 놀거나 연습하지 않았다.

내가 홀로 연습하는 동안 세연은 내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의 개인 연습은 식사 후 잠깐 쉬는 시간에 최소한으로 하는 것에 그쳤다. 세연은 그 이상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난 그녀가 연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날 방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약 그녀가 자기 연습을 한다면 난 분명 그녀에게 관심을 쏟게 될 테니까.

세연은 날 방해하지 않겠다고 한 만큼 그 약속을 분명하게 지켜 주었다.

때문에 우리 관계는 제3자가 보기에 조금 기묘하게 되어 있었지만, 사실 점점 강한 신뢰로 이어져 가고 있었다.

{밖에서 들었는데, 소리 괜찮던데?}

세연은 밝게 웃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내 음악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이 정도로 담백한 감상이 전부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없었다.

난 솔리스트로서 무대를 준비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연습하는 일이 자주 있었지만, 이번엔 오로지 혼자서 준비해 내고 싶었다.

세연은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이상 개입해 오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 세연이 챙기는 건 늘 내 컨디션에 관련한 부분이었다.

{몸은 어때?}

{좋아요.}

{기분은?}

{나쁘지 않네요.}

{아하하, 그렇구나.}

가볍게 웃던 세연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날 안고 말했다.

{타티아나, 난 네가 오늘까지 해 온 일들을 봐 왔어.}

오늘이 연주회 당일이라는 것에 대한 먹먹한 긴장감이 그녀에게서도 느껴진다.

하지만 세연은 그 긴장의 일부를 기대와 희열로 치환하며 날 북돋아 주려 노력했다.

내가 고개를 들자 세연이 웃으며 말을 맺었다.

{정말 멋지고 자랑스럽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들도 분명 알아줄 거야.}

조심스럽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무대를 앞둔 내게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응원이었다.

물끄러미 세연을 바라보았다.

난 그녀가 내 곁에서 불안과 강박을 공유하며 겪지 않아도 될 감정들을 일부 겪었음을 안다. 정말 미안한 일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밝은 모습으로 내 옆에 있어 주었다. 난 거기에서 정말 큰 힘을 얻었다.

사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내게 있어선 큰 의미가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순 없었다.

단지 언젠가 제대로 감사를 전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짧은 감사뿐이었다.

{고마워요.}

세연은 그 정도로 충분하다는 듯 웃으며 날 놓아주었다. 난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식사하러 갈까요?}

{응, 그러자. 사실 아까 드미트리 씨가 널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했었거든.}

{아, 그런가요?}

{응. 연주회 아침은 가볍게 먹는 편이라며?}

앞서 걷는 세연의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난 그 뒤를 따랐다.

***

모스크바 국제 음악의 전당. 돔 무지키dom muzyki.

강이 보이는 곳에 위치한 이 거대한 콘서트홀은 이제 익숙하게 느껴진다.

난 주변을 둘러보다가 연주회를 알리는 포스터들을 발견했다. 거기엔 문화부 주최의 가을 연주회 포스터 또한 있었다.

정규 연주회이기 때문에 디자인 자체는 심플했다. 다만 그 연주자 목록에 한 사람이 비어 있다.

“…….”

난 이 콘서트홀의 무대에 두 번 선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자선 연주회로 챔버홀에, 그리고 또 한 번은 송년 제야 음악회로 스베틀라노프스키홀에.

두 번 모두 성공적으로 잘 해낼 수 있었고, 두 번 모두 내 옆엔 에르네스트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없다.

그럼에도 난 무대에 서야만 했다. 설 수 있었다.

난 조용히 그 포스터를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이쪽으로.”

후문 쪽에 서 있던 한 사람이 날 불렀다. 홀의 직원처럼 보이는데 연주회 관계자가 오면 안내하는 일을 맡은 것 같았다.

난 이미 돔 무지키의 스베틀라노프스키홀 연주자 대기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만, 조용히 그의 안내에 따랐다.

사람이 없는 복도들을 구불구불 지나서 연주자 대기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미 한창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연주자들뿐만이 아니라 의상이나 메이크업, 촬영과 연주회 진행 등으로 바쁜 관계자들이었다.

“…….”

그 모두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멈칫하고 멈추어 섰다.

수십 쌍의 눈이 내 쪽으로 향하니까 약간 부담스럽다.

하지만 이제 백 배도 넘는 시선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벼운 미소와 함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모두들 잘 부탁드려요.”

“어, 어서 와요.”

“잘 부탁합니다.”

“잘해 봅시다! 타티아나!”

웅성거리는 인사말들 사이에서 크게 소리친 건 게오르기였다. 참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다.

그쪽을 바라보자 그가 눈을 찡긋했다. 난 웃으며 비어 있는 내 자리를 찾아 짐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자연스레 내 시선은 대기실을 쭉 둘러보며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건 알렉산드라도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저기, 다리아. 아나스타샤는?”

옆자리의 다리아에게 살짝 물어보자 그녀도 이제야 알았다는 듯 주위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어…… 글쎄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잠깐 어디 나갔나 봐요.”

아나스타샤는 콰르텟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 왔다.

그러니 딱히 내가 챙기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겠지만…… 난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래야만 비로소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기 전에 전화라도 할 걸 그랬다.

괜히 콰르텟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방해하기 싫어서 하지 않았던 게 이제 와서 후회될 줄은 몰랐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해 볼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청바지에 블라우스 차림의 아나스타샤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날 바로 찾아내었다.

“혹시 올 때 되지 않았나 해서 주차장에 가 봤었는데, 이미 와 있었구나.”

“아나스타샤.”

며칠 만에 보는 것이라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러나 찾아다녔다는 말과는 다르게 아나스타샤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이전과 달리 그녀는 약간 거리를 두는 것 같을 때가 많았다.

왜 그러는진 알겠다. 아직 우리 사이엔 하던 이야기들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러나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맺든 그녀는 나와 친구로 있고 싶다고 말했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괜찮겠지. 난 한 걸음 나아가 그녀와 포옹했다.

응원과 격려의 의미가 담긴 포옹이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서로를 응원하지 않으면 누굴 응원한단 말이야?

무대를 앞둔 연주자로서 아나스타샤도 내 의도를 모르지 않는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날 안아 주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어때?”

“예?”

“오늘은 내 얼굴 좀 괜찮니?”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보이며 농담조로 이야기했다.

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리곤 똑같이 웃으며 받았다.

“예뻐요.”

“다행이네. 저번에 너한테 납치당했을 때, 얼굴이 왜 이 모양이냔 소리 듣고 내가 진짜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알아?”

“아하하하.”

그렇게 심하게 이야기했던가? 사실 다짜고짜 병원 앞에서 차에 태웠을 때부터 심하긴 했지.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아나스타샤는 고맙다고 했었고, 결국 우린 이렇게 서기로 했었던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만약 그녀가 이겨내지 못했다면 이 자리엔 나와 콰르텟 사람들만이 침울한 분위기로 남아 있었겠지.

지금 어떻게든 해내 보려는 이 분위기는 아나스타샤 덕분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렇게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고마워요.”

“……응.”

아나스타샤는 작게 대답하더니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우리는 서로 대화를 주고받을 일도 별로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퀸텟 연습으로, 난 독주곡 연습에 집중했던 것이다.

서로 겹치는 것이 없으니 음악적인 이야기를 할 것도 없었고 음악회에 대한 의견을 내거나 할 상황도 아니었으니 그대로 각자 일에 몰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에 아나스타샤는 혼자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타티아나, 네가 무대에 서기로 했다고 말했던 그날 있잖아.”

천천히 이야기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이 말을 꺼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듯 주저했다.

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들어줄 수 있었다.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곧 천천히 이어 말했다.

“나도 여러모로 많이 생각해 봤어. 그런데 난 너처럼 심원한 이유를 동기로 삼기가 쉽지 않더라고.”

“그, 그렇게 어려운 동기는 아닌데요.”

“내가 듣기엔 그랬어.”

아나스타샤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당연히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이해했겠지.

내가 왜 2부 전체를 혼자 서겠다고 했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을 터다.

그리고 1부에서 퀸텟으로 서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그래서…… 난 나름대로의 이유로 여기 서기로 한 거야.”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고 내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지만, 어째서인지 난 그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날 똑바로 바라보면서,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조금이라도 에르네스트의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네가 혼자 모든 걸 짊어지지 않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그냥 그게 전부야. 그보다 큰 건 잘 모르겠어.”

그렇게 결론을 내린 후, 아나스타샤는 마지막으로 내게 물어보았다.

“그래도 괜찮겠니?”

무대에 서는 동기가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책임과 도움. 그 이면에선 죄책감이 엿보이지만, 적어도 아나스타샤는 지금 죄책감에 떠밀리듯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바를 다 하려 하고 있었다.

자기 증명을 이유로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아나스타샤.”

그제야 분명한 확신을 얻은 듯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우리가 느끼는 마음은 지금 다르지 않다. 난 그 사실을 느끼고는 안도감을 느꼈다.

“준비하러 갈까?”

“예, 그래요.”

연주회까지 2시간. 우린 본격적으로 무대 연주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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