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37화 (837/1,277)

##  837화

퀸텟 연주자들은 환호와 함께 대기실로 돌아왔다.

“멋졌어, 다들.”

“우아…… 지친다 지쳐.”

“잘만 하던 걸, 뭘.”

연주를 마친 게오르기는 무척이나 뿌듯해 보였다.

다른 연주자들, 다리아와 카일, 솔렌도 피곤해 보이긴 하지만 모두 자신들의 연주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의 악기를 들고 대기실로 들어오는 연주자들 가운데엔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걸어 들어오는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빈손으로 무대에 올랐다가 빈손으로 내려오는 연주자.

연주 자체도 양손에 무언가 잡는 것이 아니라 터치하는 것이 전부인 피아노 연주자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무대에 놓고 나와야만 했다.

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나스타샤의 얼굴에만 집중했다.

그녀 역시 한참 동안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노곤해진 것 같았지만, 미련이 남은 것 같진 않았다.

그녀 곁에 있던 다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아나스타샤를 챙겨 주었다.

“하나도 안 떨고 잘 해냈네. 아나스타샤. 진짜 너무 잘했어.”

“아하하, 그냥 따라갔을 뿐인데…….”

아나스타샤가 가볍게 웃으며 받아 주었고, 곧이어 다른 네 명도 아나스타샤를 둘러싸고 칭찬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현악기들이 하나로 규합되는 것에 비해 피아노는 혼자서 동등한 무게를 내어야만 한다.

모두들 아나스타샤가 자신의 역할을 맡아서 얼마나 잘 해냈는지 알고 있었다.

수많은 칭찬들에 대답하여 아나스타샤 역시 다른 연주자들에게 감탄과 감사를 보냈다.

난 다섯 명이 왁자지껄하게 그들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1부에서 잘 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모두들 그 기대대로 해 주었다.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었다.

난 잠시 그쪽을 지켜보다가 살짝 박수를 치며 이야기했다.

“여러분 정말 훌륭했어요.”

“고마워! 타티아나.”

이렇게 퀸텟의 차례는 모두 끝났다.

책임감을 내려놓아도 된다는 분위기가 만연해지자 모두들 연주에 대한 집중과 흥분이 풀어진 상태로 각자 축 늘어진 상태가 되었다.

아나스타샤는 허리를 숙인 채 의자에 앉아 있다.

난 근처에 있는 물병을 하나 집어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여기, 물 드세요.”

“아, 응.”

물병을 딴 그녀는 한 모금 정도 홀짝이고는 다시 물병을 내려놓았다.

사실 별생각이 없는데 내가 제안하니 마시는 것 같다.

연주가 끝나고도 그녀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생각보다 어렵더라. 이런 기분으로 무대에 선다는 건.”

무대에 오르면서 연주를 마치고 내려오기까지 그 모든 과정에서 아나스타샤는 그저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그만큼 자신의 태도에 신경을 쓴 덕분이었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또 지켜보고 있었다.

이 연주회에 어떤 의미가 있고 지금 저기에 있는 청중들이 어떤 기분으로 와 있는 건지.

“사람들의 평가라는 게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줄은 몰랐어. 처음이야.”

평소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인 그녀가 이런 말을 한다는 건 그만큼 정말로 부담감이 강했다는 뜻이었다.

1700명의 사람이 보내는 압력은 그것이 그저 기대와 응원뿐이라 하더라도 무겁다.

그런데 의심이나 다른 감정들이 섞여들기까지 했을 테니, 얼마나 버거웠을지 알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제일 어려운 건 첫 시작을 끊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아나스타샤는 콰르텟 사람들과 함께 제일 중요하고 어려운 일을 해 주었다.

“그래도 잘 해내셨잖아요?”

“난 그래도 곁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마치 혼자였다면 못 했을 거라는 듯 아나스타샤가 작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말끝을 살짝 흐리더니, 돌연 날 바라보았다.

“넌 어떡해?”

“저요?”

“15분 후에 혼자서…… 널 저기에 올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

“아니지, 아니야.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타티아나.”

이미 며칠 전에 결정난 일을 가지고 이제 와서 이러는 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자각시키는 듯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모두들 그랬다.

내가 단독 무대로 2부를 마무리 짓겠다는 데엔 이견이 딱히 없었지만, 그게 최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두들 미안해하거나 걱정이 많았다.

그때마다 난 모두에게 똑같이 대답했다.

“걱정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거기에 보답해 드릴게요.”

응원과 기대는 물론이고 걱정 또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그 걱정의 불식이라면, 난 그 모든 것에 보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넌……. 혼자서 다 해내려고 하고.”

“제가 어째서 혼자인가요?”

아나스타샤는 네 명과 함께 하면서도 자신이 겪은 느낌을 떠올리기에 자꾸 내가 혼자라는 것에 신경을 쓰는 것 같다.

하지만 난 혼자 서는 것이 아니다.

여기 오기까지 세연의 많은 도움이 있었고, 또 송출되고 있는 방송은 에르네스트가 보고 있다.

그리고 가족들과 다른 친구들. 그 모두가 나와 함께다.

바로 내 앞에 있는 아나스타샤 역시.

“…….”

장소에 국한하여 함께함을 규정한다면 난 혼자인 것이겠지.

넓은 무대 위의 한 사람이란 너무나 작아서 외롭고 우울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수백 년 전부터의 전승을 다루는 우리에게 유대와 함께함이란 그보다 넓은 개념으로 다가오며, 우리를 결코 혼자 두지 않는다.

난 솔리스트로서 무대에 설 때도 그것이 변함없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던 아나스타샤가 문득 물어온다.

“내가 네 도움이 조금은 되었니?”

“물론이죠.”

아나스타샤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했던 말을 난 기억한다.

그녀는 나와 에르네스트 단 두 사람을 위해 무대에 오르겠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유로 그녀가 이끌어낸 연주는 너무나 큰 의미가 있다.

내가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비로소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무대에 서길 잘했네.”

그렇게 우린 연주자로서 서로를 인지하고 다시 한번 믿음을 공유했다.

“잠시 이야기 좀, 아나스타샤.”

“예.”

알렉산드라가 그녀를 불렀다.

다른 콰르텟 사람들도 함께인 걸 보니 아마 콘서트 디렉터로서 무언가 전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을 잠시 보다가, 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아직 연주회는 끝나지 않았다.

잠시 후면 인터미션이 끝나고 다시 1시간 동안의 무대가 시작된다.

난 그 무대가 일종의 시험이나 평가장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음악을 감상하며 위로를 얻어 갈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란다. 그것은 세상 음악가들의 염원이기도 하다.

그 결과를 얻기 위해 내가 무대에 올라 해야 할 일들은 자명하다.

“…….”

천천히 난 신경을 끌어모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 그간 익힌 것들, 내 몸이 구사해 낼 수 있는 정도.

손가락을 살짝 까딱이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것들을 다시 확인하고 되새긴다.

두 번 까딱이고, 세 번 까딱이면 조금씩 더 분명해진다.

인터미션 동안 난 수없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수없이.

“준비하십시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곧 2부가 시작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대기실의 직원이 날 불렀다. 자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어있었다.

“갈게요.”

짧게 대답한 후 난 의자에서 일어났다.

대기실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의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난 내 주변 가까이의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드레스 자락이 흔들리는 것까지도.

잠시 후, 무대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난 조용히 발을 디뎠다.

그 앞엔 검은 피아노 한 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아리엘은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의 열정적인 팬이었다.

어려서 그가 데뷔하자마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었고, 피아니스트로서 성공가도를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뿌듯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적어도 모스크바 근처에서 열린 콘서트 중에 그가 출연하는 콘서트라면 안 가 본 것이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번 가을 연주회 역시 그녀에게 있어선 당연히 관람해야 하는 연주회였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기 전까진.

‘신께서도 무심하시지.’

본래 무신론자이긴 하지만 아리엘은 믿지도 않는 신을 원망하게 되었다.

아직 열여섯 살밖에 안 되었는데, 앞길이 얼마나 창창한데 이런 일이 있어도 되는 걸까.

그냥 세상 모든 것에 궁극적인 회의감이 들 정도로 아리엘은 실망하고 우울해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미 예약한 티켓도 그녀에겐 골치였다.

에르네스트가 없는 연주회이니 이미 별 의미도 없고,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해 보니 어차피 취소될 것 같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자연스레 취소 환불이 되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연주회의 남은 연주자들은 그냥 이대로 진행을 추진하고 있었다.

아리엘은 그냥 티켓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해 버리려고 하다가, 혹시나 싶어서 가 보기로 했다.

분명 연주회엔 그녀와 같이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테고, 그 사실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남은 연주자들이 신경 써 줄지도 모르니까.

특히 아리엘은 타티아나가 무어라 할지 궁금했다.

아직 제대로 된 정보는 아니지만, 항간에 조심스레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에르네스트가 타티아나를 감싸다가 부상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배경이 워낙에 무시무시하기에 그 소문은 알 만한 사람들끼리만 소곤거리고 있을 뿐이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아리엘은 타티아나가 지금 연주회를 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

아리엘은 딱히 그녀에게 악감정이 있진 않았다. 저번 겨울에 봤을 때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리기도 했고.

때문에 아예 연주회를 취소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만 맡기고 타티아나는 빠져서 청중들과 함께 슬퍼해 준다면 그건 불쌍하게 여길 만했다.

설마하니 일부러 그랬을 리도 없고, 사고인데 그녀를 탓할 정도로 아리엘은 모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무대에 오르려 하는 건 삐딱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타티아나는 최소한의 존중을 갖추어야만 했다.

그것이 어떤 형태여야 하는진 아리엘도 잘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

그렇게 막연한 기대와 평가 기준 등을 가지고 콘서트홀에 온 아리엘은 1부를 지켜보고는 팔짱을 꼈다.

에르네스트에 대해선 일언반구 없이 연주만 한 것에 대해선 꽤나 불만이 있었지만, 아직 1부니까 지켜볼 수 있었다.

일단 음악적으로는 흠잡을 곳이 없이 만족할 수 있기도 했고.

하지만 당연히 아리엘의 심기는 점점 더 삐딱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다음에 올라오는 건 본래 에르네스트와 듀엣을 하기로 했던 타티아나였다.

듀엣 파트너 없이 혼자가 된 그녀가 무슨 곡을 연주할지에 대해선 아직도 아무것도 공개된 것이 없었다.

프로그램을 알려 주지 않는 연주회가 어디 있냐고 문의했더니, 짧은 준비기간 내에 연주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기 때문에 아직 파악이 안 된다는 웃긴 답변이 돌아왔다.

모든 것들이 아리엘을 점점 화나게 하고 있었다.

혼자 멀쩡하게 올라가서 자기 곡만 맘대로 준비한걸 휘리릭 치고 내려가려고?

‘마음대로 해 봐 어디.’

속으로 중얼거리며 아리엘은 무대를 노려보았다.

인터미션 후 2부의 막이 올랐다.

홀 안이 캄캄해지고, 무대 위를 비추는 조명만이 빛난다.

숨 막힐 정도의 적막 속에서 무대 바닥을 딛는 구두 소리가 들려온다.

“…….”

치렁치렁한 검보랏빛 드레스를 입은 피아니스트였다.

곡선을 그려 내면서도 나풀거리는 자락들이 조명을 받아 마치 생명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 위로 드러난 얼굴은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우아한 모습으로 피아니스트는 차분히 발걸음을 옮겼다.

“…….”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매력적인 그 자태에 한순간 아리엘은 정신을 빼앗겼으나 곧 다시 똑바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일반적으로 연주자들은 저런 드레스를 잘 입지 않는다.

보기엔 예쁘지만 몸을 쓰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티아나의 드레스는 소매가 길어서 손을 다 가릴 정도였다.

아리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저런 옷을 입고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비평을 하고 있는 사이, 타티아나는 무대 중앙에 섰다.

“…….”

타티아나가 혹시 무언가 말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 없이 그녀는 그저 작게 묵례하며 인사를 할 뿐이었다.

청중들 사이에선 박수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 박수에 약간의 의문이 담겨 있는 건 아리엘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이걸로 다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2부도 그대로 진행하는 거야?

그러나 타티아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휙 돌아서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아리엘은 점점 더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잠시 후, 타티아나가 손을 들어 올렸을 때 그녀는 이전까지 하던 모든 생각을 잊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왼손…….’

타티아나는 왼손 하나만을 들어 올렸다. 소매가 스르륵 내려가며 하얀 손이 드러났다.

다른 손은 짙은 색의 드레스에 감추어져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허벅지 부근 어딘가에 있으리란 건 알겠지만, 멀리서 봐선 그냥 검보랏빛의 형체만 느껴질 뿐이다.

하얀 목과 손만 드러난다. 그중에서 손 쪽을, 타티아나는 건반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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