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0화
본래 지옥에서 3일, 연옥에서 3일을 머물러야 하는 여정이지만 리스트는 그 과정을 빠르게 보냈다.
그리고 천국에서의 하루를 그보다 훨씬 더 길게 보여 준다.
난 신중하게 건반을 컨트롤하여 표현을 달리했다.
같은 피아노로, 같은 연주자가, 한 악장으로 된 곡으로 지옥과 천국을 붙여 표현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난 이 곡을 멀리서 관조할 수 없었다.
실제로 저승세계를 관통하는 길을 안내하는 사람의 역할에 충실하여 한가운데에 서야만 했다.
베르길리우스이자 베아트리체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연기자이기도 한 피아니스트의 소양을 평소 중요하게 여겼던 내가 잘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사뿐하게 움직이는 베아트리체의 발걸음을 묘사하며 천국으로 향하는 길을 그린다.
아다지오로 연주되는 연속된 아르페지오는, 하나의 프레이지를 길게 이루면서도 각 음들을 뭉쳐 놓지 않고 간결하게 표현해야 했다.
신성한 구름과 광채의 세상.
그런 곳을 본 적은 없지만 난 우리가 지금부터 향해야 할 곳이 그곳이란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거리낌 없이 안내할 수 있었다.
“…….”
청중들을 이끌어 계단을 오른다. 알레그로 모데라토의 속도는 천국에 닿기에 느리다.
조금 더 빠르게 박자를 나누어 오른손을 움직인다.
지하의 세계는 점점 멀어져 가고, 이윽고 나는 리스트가 그리는 천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던 천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축복의 꽃잎을 뿌린다.
그 꽃잎은 미처 몸에 닿기 전에 사르르 녹아 사라지며 향기만을 남겼다.
몸은 더더욱 가벼워졌다. 이곳에 다다른 자들은 천사와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된다. 신성한 노래가 주변을 뒤덮는다.
천국을 가로지르는 길은 눈앞으로 길게 뻗어 있다. 앞서 안내하는 베아트리체로서 난 걸어 나갔다.
“…….”
10개의 계층으로 나누어져 있는 천국엔 수많은 인물들이 있다.
야망 있는 자, 사랑하는 자, 지혜로운 자, 용감한 자, 정의로운 자, 사색하는 자. 그 모두가 천국을 가로지르는 음악을 바라본다.
하루 만에 끝나는 일정이지만 리스트는 그 하루를 세밀하게 표현했다.
강렬한 이미지 하나로 드러낸 지옥과는 조금 다르다.
난 어째서 리스트가 이런 방식을 택했는지에 대해 꽤 오랜 시간 연구해 왔고, 최근 3일에 걸쳐서 이 해석을 찾아낼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해답은 아니다. 다만 음악은 언제나 대답일 뿐이다.
‘아늑함을 원한다는 건…….’
아름다운 천국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이곳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고통도 고뇌도 없는 만족만으로 존재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사람은 없다.
어느 시대의 누구나 똑같이 느낄 인간의 바람이 우리를 끌어당긴다.
‘지옥도 지나가고 천국도 지나가고.’
하지만 우린 멈춰 설 수 없다.
그 유혹에 사로잡혀 걸음을 멈추는 순간, 인간은 저 밑으로 다시 떨어지게 된다.
우리는 지금 단지 산 너머로 가기 위해 이 저승을 가로지르는 길을 걷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에 든다고 해서 어딘가에 머물 순 없었다.
그건 안내자인 나는 물론이고 청중들 역시 마찬가지다.
음악은 계속되고 여정 역시 계속된다. 언젠가 자격을 얻을 때까지, 인간의 여로는 끝나지 않는다.
“…….”
단테와 리스트, 그리고 내 해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수백 년씩 떨어진 간극도 이 한 작품을 통하면 모두 이어질 수 있다.
달과 해. 별들을 지나치며 천국을 가로지르다 보면 주변이 점점 어두워진다.
눈부신 빛 대신 신성한 어둠이 아득하게 펼쳐졌다.
우리가 걷는 길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단지 발을 내디딜 때 지지함으로써 비로소 거기에 있음을 증명할 뿐이다.
난 앞으로 향하면서도 지금 내가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이유가 오롯이 나 스스로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렸다.
에르네스트가 내 속박을 끊어내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난 그것을 야속하다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여로의, 무대의 한가운데에서 느끼는 감정은 감사와 고양감이었다.
난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옥을 발밑에 두고도 주저앉아 버리지도 않았고, 천국을 오르면서 허공을 부유하며 떠다니지도 않았다.
힘겹게나마 내 발로 움직여 안내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청중들 사이에 퍼져 있던 불신의 분위기도 이젠 모두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가 멈추지 않을 것이란 걸 깨달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낮은 흥분이 객석을 넘어 이곳까지 전해져 온다.
난 그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계속 음악으로 증명해 보인다.
에르네스트가 바랐던 내 모습이 바로 이러한 모습이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뒤에 있길 바랄게요.’
멈춰 서지 않고, 따라와 주기만 한다면.
난 이 세상에서 언제까지고 움직이며 무엇이든 할 수 있을 테다.
***
현을 일으켜 나무를 울리자 마른 나무에 생명이 불어넣어져 새하얀 꽃이 피어난다.
방금 전까지 지옥의 불길에 타오르던 피아노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타티아나의 신묘할 정도의 표현력은 리스트의 음악성을 장대하게 펼쳐 냈다.
그리고 그 수준 높은 음악으로 보내오는 수많은 메시지들은 섬세하게 에르네스트에게 와닿았다.
타티아나의 바람. 그녀의 목소리, 흔들리는 긴 소매까지 에르네스트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기억에 새겼다.
“…….”
비스듬히 서서 텔레비전을 보던 의사는 어느새 침대 옆 의자를 끌어와 앉아선 마치 빠져들 것처럼 집중하는 중이다.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눈빛이었다.
이미 그 역시 단테가 되어 타티아나의 안내를 따라 천국을 오르는 중일 테지.
그건 상관없는데, 베아트리체의 역을 맡은 타티아나가 모두의 연인이 되어 버리진 않을까 싶다.
모두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음악가로서 감사한 일이고,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정말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피아니스트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마냥 흡족한 기분만 들진 않았다.
다시 한번 스스로를 돌이켜보며 에르네스트는 상념에 잠겼다.
그사이 시선을 눈치챘는지 의사가 그를 바라보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연주에 너무 집중하고 있었던 것에 놀란 표정이었다.
“어…….”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지금 이 음악에 사람의 목소리를 섞어 넣는다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깨달았는지 의사는 황급히 다시 입을 다물었다.
평소 냉철하던 모습이 마치 거짓말 같다.
에르네스트도 어차피 지금 음악에 완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괜찮다는 뜻으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봐요.”
잠깐 흐트러졌던 집중력을 다시 가다듬는다.
타티아나는 이미 몇 개나 되는 천국의 계층을 통과하여 그 너머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곳엔 그간의 상식과 법칙이 통용되지 않고 모두 신에게 종속되는 마지막 천국이 있다.
다시 반복되는 옥타브의 연타는 지옥의 이미지와는 달리 환한 광채로 눈부시게 느껴진다.
에르네스트는 이 클라이맥스를 타티아나가 어떻게 표현하는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일반적인 마무리라면 원작과 비슷하게 흘러간다.
단테는 이곳에서 성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천국의 사람들이 하얀 장미처럼 행렬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베아트리체는 그 행렬로 향하고 단테는 빛에 휩싸인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그 끝에서 하얀 장미의 잎사귀로 남지 않았다.
그녀는 인간의 여정이 비록 지상의 하찮은 산봉우리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끝나야 함을 분명히 했다.
곡을 비틀진 않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차이점을 분명하게 알아차렸다.
장엄하게 들려오는 마지막 격렬한 찬가가 끝나고 마치 서서히 산 너머로 광채가 사라지듯 음악이 잦아들었다.
17분가량의 한 악장으로 이루어진 소나타가 마침표를 찍었고, 곧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와우, 브라바. 브라바.”
의사 역시 감탄하며 박수를 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심취한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려는 듯한 행동이었는데 좀처럼 쉬워 보이진 않는다.
텔레비전에서 박수가 계속 이어지고, 타티아나가 의자에서 일어나 청중석을 향해 작게 허리를 숙여 보이기까지, 의사는 안경을 벗어 닦기도 하고 한참이나 허둥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저번에도 봤을 땐 손을 떨 정도로 충격이 커 보였는데…… 대단하군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에르네스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녀가 손을 떤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얼마 전에 봤을 때만 해도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는데, 의사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아마 상태가 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았다면 무대에 올려보내려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더더욱 강하게 무대에서 비로소 연주자로 돌아오길 바랐을까.
에르네스트는 조용히 생각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그녀가 다른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무대를 성공시켰다는 점이었다.
고도프스키의 엘레지로 사람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로 그 응축되어있던 불안과 의심을 일거에 해소했다.
겨우 며칠 사이에 준비하여 실제로 실현해 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실력과 완성도였다.
그 결과는 당연히 지금 이 홀의 분위기가 증명하고 있었다.
지금 카메라 너머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청중들의 분위기는 열광적이었다.
음악이 아닌 설득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했을 결과였다.
‘너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에르네스트는 미소를 지으며 조금 더 편안하게 침대에 몸을 뉘었다.
박수 소리가 조금 잦아들고 모두 진정했을 때였다.
옆에 앉아 있던 의사가 조용히 물어보았다.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예.”
“당신도 분명 저런 연주를 할 수 있었겠죠?”
에르네스트가 적어도 러시아에서 어느 정도 대우를 받고 있는지 의사는 잘 알고 있다.
실력 역시 거기에 걸맞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못 하니 분하지 않냐고 묻는 투는 아니었다.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다.
굉장히 진지한 어조로, 굳이 대답을 바라지 않는 질문이었다.
에르네스트가 가만히 쳐다보자 의사는 다시 한번 강하게 약속하듯 그에게 말했다.
“제가 반드시 저 무대 위로 돌려보내 드리죠.”
“…….”
연주를 보지 않았더라도 그는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에르네스트를 치료해 주었겠지만, 지금 타티아나가 연주한 단 한 곡이 가져온 여파는 그에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타티아나의 음악이 가진 영향력은 지대했다.
에르네스트는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타티아나가 무대에 올라 그를 위로하며 돌아봐 준 것도, 또 지옥과 천국을 가로질러 안내해 주면서도 놓지 않은 것도. 그리고 그녀의 안내를 받은 수만 명의 사람들 또한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를 믿어 줄 것이란 것도.
모두 그를 고양시키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하나 더 남아 있기까지 했다. 에르네스트는 분명 그렇게 확신하며 킥킥 웃었다.
“지금도 반쯤은 복귀한 것 같습니다. 이미.”
“예?”
“계속 보시죠. 앞으로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
시간도 얼마 없었고, 마음대로 하라고 전권을 맡겨 놓았기 때문에 타티아나에게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에겐 충분한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테 소나타의 마지막에서 여운을 남기며 다음 곡을 암시했고, 거기에서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했을지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다시 이번엔 지상의 음악이 펼쳐질 것이란 걸 예감할 수 있었다.
“…….”
잠시 기다리자 홀 안이 조용해졌다. 타티아나가 사용한 시간은 20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보통 한 연주자가 무대에 올라 사용하는 시간은 유연하지만 20분은 너무 짧다.
아직 한 곡 정도는 마지막으로 연주하리라 기대하는 분위기가 홀 안에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 타티아나는 다시 피아노 앞에서 조용히 허리를 펴고 손을 들어 올렸다.
긴 소매가 흘러내리며 다시 손이 드러난다.
곧 피아노 소리가 무대를 때렸다.
에르네스트도 들어 본 적 없는, 세상에 처음 나오는 음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