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1화
브누아 랑베르는 낭트에서의 휴가를 왔지만 정작 느긋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모스크바에서의 소식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예전에 알게 된 기획자, 알렉산드라의 부탁으로 젊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의 곡을 평했을 때부터였다.
신선한 흥미를 느낀 브누아는 그냥 짧게 평가해 준 것뿐만이 아니라 적절한 조언을 건네주기도 했고, 음악적 교류를 나누며 점점 더 큰 관심을 느꼈다.
비록 언어의 장벽이 있어 에르네스트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지만, 세계인이 공유하는 음악의 언어로 오선지 위에 쓴 필담은 브누아에게 굉장한 즐거움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열릴 연주회와 초연될 곡은 어느새 그에게도 중요한 일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뜻밖의 사고로 인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지금껏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사고로 떠나갔음을 봐 왔지만 그렇다고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최근 신경 써서 봐 준 것이 많아서 그런지 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작곡가로서 도움을 주겠다고 나설 수도 없었다.
그는 에르네스트가 기존에 피아니스트로서 얼마나 대단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잃은 상실감은 연륜 있는 선배 음악가가 말 몇 마디 해 준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뉴스들만 지켜봐도 긍정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전부 한 음악가의 불행을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을 뿐이었다.
씁쓸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와중, 유일하게 긍정적인 소식 하나가 전해져 왔다.
연주회를 기존 계획 그대로 진행한다는 공식 발표였다.
『교수님 보러 낭트에 놀러 오길 잘했군요. 이런 것도 알려 드릴 수 있고.』
『그러게 말일세.』
때마침 브누아를 찾아온 옛 제자 피에르는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이 연주회를 멀리 떨어진 프랑스에서도 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능숙하게 거실에 노트북과 스피커 등을 연결해 주었다.
문화부 주최 가을 연주회의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영상을 틀자 콘서트홀을 비추는 화면이 보였다.
시청자는 수만 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 연주회가 주목받는 이유는 정말 다양했다. 그저 기대뿐만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두 음악가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살짝 떨어져 앉았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일들을 봐 온 그들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조용히 지켜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오늘의 연주회 역시 시대 속에 묻혀 갈 한 사건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브누아는 찻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1부가 끝나고 2부에 접어들었을 때.
의자에 허리를 눕힌 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던 두 음악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체를 들고 집중하고 있었다.
브누아의 뇌리에 제일 먼저 든 개인적인 감상은 바로 후회였다.
‘모스크바에 갔어야 했어.’
평소 전세계의 음악가들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주 도움을 주었던 브누아는 이번에도 곡을 조금 봐 주었다고 해서 꼭 초연 자리에 초대받으리란 법은 없다고 생각하며 낭트에 있기로 했다.
알렉산드라는 늦게라도 그를 초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비자 발급에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이미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사고가 난 이후엔 더더욱 모스크바에 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때문에 달리 바라는 것 없이 모스크바에서 전해져 오는 소식만을 듣고 있었는데, 억지를 써서라도 갔었다면 지금 스피커로 들리는 이 음악을 홀에서 들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아쉬움이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열여섯 살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
타티아나의 연주는 아주 정교하고 효과적이었다.
한 손을 늘어뜨린 채 연주하는 왼손 연주는 청중들의 모든 집중과 관심을 한데 끌어모았다.
연주회 자체가 아니라 에르네스트의 사고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피아니스트의 한계를 예단했던 사람들 모두, 타티아나가 보여 주는 수준 높은 연주에 빨려 들어갔다.
브누아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노련한 실력이었다.
게다가 타티아나는 그저 한 손 피아니스트의 가능성만을 보여 준 것이 아니었다.
만약 한 손으로만 연주를 끝까지 마쳤다면 청중들은 에르네스트가 한 손으로 무대에 돌아오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건 정말 큰 오해가 될 여지가 많다.
때문에 타티아나는 오해의 여지를 완전히 끊어냈다.
‘누가 가르쳐 준 걸까.’
브누아는 만약 자신이 저 상황이었다면, 혹은 코칭해 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떤 곡을 떠올렸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어떤 곡을 떠올리더라도 이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보단 못할 것 같았다.
심지어 선곡만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수년 전부터 이 곡을 연구해 온 사람처럼 깊이 있는 연주를 분명하게 해 보였다.
손가락만 맞게 움직이며 테크닉에 치중한 수준의 연주였다면 이 연주 후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을 것이다.
프란츠 리스트의 곡들은 종종 이기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연주의 표본으로 여겨지곤 한다.
기교적 난이도가 높은 터라 그 속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의 연주는 그 누가 듣더라도 빠져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호소력 있고 섬세했다.
일반적인 해석인 단테의 여정이 아닌 안내자인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의 입장에서 그려 내는 지옥과 천국의 이미지는 독특하면서도 다수의 사람들을 음악의 흐름으로 끌어오는 데에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때문에 연주가 끝난 후 홀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감각적이고 영리하지만 한 게 아니라…… 사려 깊기까지.’
단 두 곡에서 느낀 수많은 의미들을 되새겨 보면서 브누아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는 피아니스트가 지닌 능력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제 그녀는 단지 떠오르는 신예로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 언급되는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
전 세계가 주목할 만한 피아니스트로 바로 지금 도약했다고, 브누아는 분명하게 확신했다.
옆에서 함께 연주회를 감상한 피에르는 탄성이 담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단테 소나타를 치는 학생은 여럿 보았지만…… 저 정도 퍼포먼스는 정말 드문데, 대단하네요.』
지금 음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그는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열여섯 살 피아니스트라면 수도 없이 만나 봤을 그의 평은 정말 극찬에 가까웠다.
하지만 브누아는 그 정도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허허, 학생? 난 프로들 중에서도 드물 것 같은데.』
순간 피에르의 눈빛이 살짝 삐딱하게 변했다.
그는 프랑스의 클래식 음악계에 자부심이 굉장히 큰 사람이었다.
러시아의 음악가들이 정말 수준 높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어린 피아니스트의 연주에 감동하여 정도를 지나칠 마음은 없는 듯 보였다.
그는 객관적이고 완고한 교수의 태도로 딱딱하게 타티아나의 연주를 평가했다.
『마지막이 조금 약하지 않았습니까?』
『그런가? 힘이 빠진 것 같진 않아 보였는데.』
『힘 자체는 충분히 남아 있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서 속도가 느려지고 온전히 무게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시점에서 조금 부족함이 들리더군요.』
『존재감이라…….』
『신을 영접하는 데도 완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었죠. 안내자를 앞세운 해석의 한계입니다.』
스피커를 통해 들어도 교수의 귀는 정확했다.
피에르의 말대로 타티아나의 마무리엔 무게감이 부족했다.
종교적 위세를 웅장하게 표현하며 단테의 깨달음을 이끌어내야 할 부분에서, 애매하게 잦아드는 방식으로 마무리를 처리했다.
단테 소나타의 레퍼런스라 할 만한 해석들을 깊게 연구한 피에르로선 이러한 마무리에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그 점은 브누아도 이해했다.
『그래서 끝마무리가 아쉬웠다고 하는 건가?』
『충분히 잘했지만 굳이 짚자면?』
『그럼 다음도 잘 보게나.』
『예?』
브누아는 타티아나쯤 되는 역량을 지닌 피아니스트가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해석을 이렇게 마무리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맺음이 정확하지 않고 늘어지는 여운이 있다면, 그건 분명 필요가 있기에 만들어진 여운이다.
브누아가 이야기해도 피에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지금 타티아나가 어디까지 내다보고 준비한 뒤 저 무대에 올랐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브누아는 여전히 부산한 화면을 바라보며 웃었다.
『내 생각에 저 아이는 자네의 그 아쉬움마저 모두 계산해서 그렇게 연주한 것 같네만.』
여전히 피에르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쉬움을 일부러 일으킨다는 게 그의 입장에선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의미가 있지. 지금부터.』
그리고 브누아가 노트북 화면을 가리키자, 피아니스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티아나는 피아노 앞에 천천히 가라앉듯 자리한다.
그녀의 손이 들어 올려지자 세상이 고장난 것처럼 고요함에 덮어씌워졌다.
그 속에서 모든 소리를 지배하는 손이 건반을 짚자 피아노가 음악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곡…….』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로 피에르가 중얼거렸다.
그가 들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곡의 초연이었기 때문이다.
『…….』
처음 들어 보는 건 브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이 곡을 알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작곡했었던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바로 그 곡의 솔로 버전이었다.
'정말 완벽하게 마무리를 짓는군.'
이전 두 곡으로 타티아나가 보여 주었던 연주는 모두 청중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안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 느꼈던 불안함 등은 타티아나의 안내 아래에서 사그라들었다.
타티아나도 에르네스트도 어떤 불행을 겪더라도 결코 멈춰 서거나 꺾이지 않는다.
지옥과 천국을 거치더라도 그 여정은 온전할 것이다. 그러한 믿음 등은 분명 강하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믿음이란 여전히 막연하다. 이전보단 긍정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겠지만 현실적으로 지금까지 보인 것은 타티아나 개인의 솔리스트적 역량뿐이었다.
때문에 타티아나는 또다시 증명해 냈다.
본래 듀엣을 기획했던 두 음악가가 지금 당장 해낼 수 있는 일에 대해, 가능성뿐만이 아닌 현실에서 무엇을 보여 줄 수 있는지.
그 증명은 아주 명료하고 압도적이었다.
『…….』
단테 소나타에 흠이 있다고 지적했던 피에르는 조용히 음악에 집중했다.
신에게 다다른 단테가 거기에서 귀의하여 여정을 끝마치지 않고 다시 천국의 계단을 내려온 것은, 본래 목적했던 산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그 산은 분명 천국보다 훨씬 거칠고 어둡다. 숨이 차고 힘이 든다.
그러나 살아 기식하는 삶들이 가득한 이 생명력은 지상에서밖에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에르네스트가 그 위에 두 발로 서 있음을 타티아나는 분명히 보여 주었다.
모든 것은 하나로 이어진다. 피에르는 비로소 지금에서야 타티아나가 기획한 프로그램의 진의를 깨달은 것 같았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피에르는 연주에 집중했다.
‘그래도 이렇게 정확하게…….’
어느 정도 이 프로그램을 예상하고 있었던 브누아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이 곡은 다른 작곡가의 곡을 염두에 두고 작곡된 것이 아니다.
에르네스트가 두 친구에게 헌정하기 위해 만든 곡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 곡을 평가하기까지 했었던 브누아는 그 점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단테 소나타에 이어 지옥과 천국을 지나 온 음악가 에르네스트의 건재함을 증명하고 완전한 부활을 암시하는 곡이 되어 있었다.
‘전부 있군, 전부.’
타티아나가 재빠르게 건반들을 끌어모은다.
본래 세 갈래였던 선율이 하나로 얽힌다. 색은 섞이면 탁해진다.
잘 조화되지 못한 음악 역시 같다. 모두 섞이면 결국 검은 색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며칠 안 되는 사이 에르네스트는 이 곡의 조화를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물감과 달리 빛은 섞일수록 밝아진다.
타티아나는 그 음악적 해석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 곡을 환한 빛처럼 연주해 냈다.
『…….』
브누아는 두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이 정도로 도전적인 구성은 그로서도 부담된다고 느껴질 정도로 쉽지 않았다.
어설프게 했다간 고도프스키와 리스트라는 어마어마한 대작곡가들의 뒤에 비교되며 이 연주회 전체를 구렁텅이에 빠뜨렸을 만한 조합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천재적인 기획 능력과 연주 역량, 그리고 에르네스트의 작곡 실력이 합쳐진 결과물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프로그램을 겨우 며칠 만에 훌륭한 그림으로 완성해 냈다.
누군가 코칭해 주거나 둘 중 한 사람이 우수하다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두 음악가의 재능과 믿음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마치 인간이 이루어 내는 기적을 목도하는 기분을 느끼며 브누아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이름 모를 이 곡의 여러 주제는 타티아나 한 명의 손에 의해 선형적으로 연주되면서도 하나하나의 특색을 빠뜨리지 않고 입체적으로 살아났다.
이 곡을 여러 명이 연주하면 어떻게 될지 기대가 절로 생기게 하는 연주였다.
타티아나는 솔리스트로서 연주하면서도 결코 혼자 있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에게 안도뿐만이 아니라 기대까지 안겨 주는 훌륭한 연주는, 이전까지 보여 주지 않았던 화려한 하이라이트로 마무리되었다.
브누아와 피에르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박수를 보냈다.
『브라바.』
『정말 좋은 걸 들었습니다.』
피에르는 그 이상 무어라 평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이 박수만으로 충분하다 느끼는 얼굴이었다.
여기 있는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음악가들이 이 광경을 보고 있다.
그리고 똑같이 기적을 본 기분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 기적이 에르네스트에게도 향하리라 기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날 아무렇지도 않게 타티아나와 함께 무대 위로 돌아오리라. 브누아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박수를 치며 피에르가 말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앞으로 많이 바빠지겠군요.』
『그렇지.』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는…… 치료에 전념해야겠지만 만약 활동을 원한다면 그 역시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자네도 같은 생각 하고 있었나?』
세상 수많은 음악가들이 기적을 보았다.
어떻게 하면 저 두 사람이 많이 활동하게 할 수 있을까.
지금 멀리 프랑스에 있는 브누아도 두 사람을 위한 여러 가지를 떠올릴 정도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중에 생각하지, 그런 건.』
하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는 것보다, 브누아는 당장 지금 어려운 무대를 훌륭하게 끝마치고 서 있는 타티아나, 그리고 에르네스트에게 찬사를 보내는 일에 열중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