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2화
아나스타샤는 2부의 프로그램을 지켜보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인터미션 때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가 겪은 불행에 대한 무게를 타티아나가 혼자 짊어지지 않길 원했다.
타티아나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며 충분히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아나스타샤는 정말로 그렇다면 자신이 저 무대에 적어도 듀엣으로 함께 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지금 곁에 누구도 두고 싶지 않아 했다.
그건 아나스타샤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어떤 곡들을 가지고 오를지 물어보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솔리스트로서 2부를 전부 맡게 된 타티아나는 다른 연주자들과 합동 리허설을 할 필요도 없었다.
때문에 최종적으로 어떤 곡들을 준비했는지 아나스타샤는 묻지도 못했다.
단지 시간이 촉박해서 각자의 음악에 집중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아나스타샤는 이제 와서야 자신이 느꼈던 머뭇거림이 바로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마저도 위로하듯 음악들을 조성했다.
타티아나가 행하는 음악들을 지켜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괴로운 심정으로, 그리고 기적을 바라는 기도와도 같이 이 무대에 섰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마지막 곡에 이르러선 그 마음이 보다 더 강해졌다.
솔로로 편곡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의 소리가 일부 담겨 있었다.
타티아나는 이미 음색을 모사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두 사람의 음악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것에 대해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는 아나스타샤에게 게오르기와 다리아의 걱정 어린 시선이 몇 번 닿곤 했지만, 그 사람들도 말을 걸어오거나 하진 못했다.
이윽고, 타티아나의 연주도 모두 끝났다.
귓가를 울리는 박수 소리와 함께 타티아나가 대기실로 들어왔다가, 모두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웃었다.
그리곤 다시 계속되는 박수에 화답하여 무대로 나갔다.
딱 한 차례의 커튼콜에 응하고 대기실로 돌아온 타티아나는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회자에게 자신의 역할은 모두 끝났음을 알렸다.
교대하듯 무대로 나간 사회자는 마이크로 마지막 인사 멘트를 시작했다.
- 이것으로 가을 연주회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청중 여러분 모두 귀한 시간 내어 자리에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후…….
무대에서 들려오는 인사와 박수, 그리고 청중들이 홀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내는 발소리를 들으며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
낮게 숨을 내쉬는 타티아나는 물끄러미 고개만 들어 그녀를 마주했다.
평소와 달리 손을 거의 다 덮을 정도로 소매가 긴 드레스와 땀이 맺힌 이마. 한눈에 봐도 피아니스트의 모습이라기엔 너무나 버거워 보인다.
그녀가 짊어지고 있던 무게가 그대로 눈에 보이는 듯하다.
타티아나는 이 연주회에 정말 많은 것을 걸고 있었다.
연주자로서의 커리어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평소 느끼는 운명에 대한 결론 또한 일부 이곳에 있음을, 아나스타샤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낸 지금, 타티아나에게 문제를 제기하거나 의심할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터였다.
타티아나 스스로도 지금 무언가 확신을 얻어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타티아나.”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조용히 바라보던 아나스타샤는 결국 앞으로 다가가 타티아나와 포옹했다.
간헐적으로 내뱉는 숨소리가 이 아이도 사람임을 간신히 증명하고 있었다.
살짝 포옹을 풀고 바라보자 타티아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바람이 잘 전해졌을까요?”
아나스타샤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하지.”
“다행이에요.”
비로소 연주자로서의 태도가 스르륵 무너져 내린다.
혹시 그녀가 쓰러지진 않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타티아나는 어깨를 살짝 늘어뜨렸을 뿐이었다.
잠시 후 대기실로 들어온 알렉산드라는 입구 근처에 우뚝 멈춰 서선 연주자들을 돌아보았다.
커리어 전부가 걸려 있다고 해도 무방했을 중요한 연주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것에 대한 안도, 약간의 부채감 등이 그녀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게오르기, 다리아, 카일, 솔렌, 아나스타샤. 그리고 타티아나.”
이쪽으로 향하는 진지한 목소리에 대해 먼저 답한 것은 타티아나였다.
“알렉산드라 덕분이에요.”
“저? 저는…….”
“만약 알렉산드라가 저희를 믿어 주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겠죠. 전 알고 있어요. 알렉산드라가 무엇을 막아 주고 있었는지.”
“…….”
외부에서 들어오는 압력과 부담이 얼마나 거셌는지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온갖 언론과 대중들의 관심은 물론이고, 문제 생길 상황 자체를 피하고 싶어 하는 문화부의 압박 또한 있었다.
게다가 알렉산드라는 본래 이 연주회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쉽지 않은 상황에서 책임지고 그만두려는 것 또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타티아나의 의지는 알렉산드라의 입장을 바꾸어 놓았고, 그녀는 충실하게 콘서트 디렉터로서 함께해 주었다.
그건 타티아나가 잘 설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녀가 책임감 있는 음악가로서 활동하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타티아나는 똑바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고마워요. 믿어 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 되었으면 하네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타티아나는 자신의 의지를 돕는 사람에게 미안하다 말할 수 없었다.
단지 마땅한 결과를 가지고 온 뒤에 비로소 감사를 전할 뿐이다.
알렉산드라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고 마는 타티아나를 바라보다가 마치 아이처럼 웃고 말았다.
“……충분해요. 타티아나.”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갑자기 물병 두 개가 끼어들었다.
놀란 알렉산드라와 타티아나가 물러서자 게오르기가 물병을 내밀었다. 지금 이대로 넘어갈 수 없다는 투였다.
“우리가 오늘 파티를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 대기실에서 마지막으로 자축 정도는 할까요.”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겐 당장 그럴 만한 자격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싶어 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게오르기가 필두로 손에 든 음료수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여러분 모두 고생 많았고, 훌륭했습니다. 내 생애 만난 최고의 음악가들이야.”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살짝 손목을 치켜들며 답했다.
“게오르기도요.”
“잘 해냈어요.”
근사한 파티장도 아니고 샴페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서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축하와 격려 그리고 감사가 오간다.
아나스타샤 역시 지금은 함께 했던 콰르텟 멤버들에게 충실하게 대했다.
간신히 그녀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잠시 음악가들 사이 축하를 나누는 사이, 대기실 문이 열리며 홀 직원이 들어와 알렉산드라와 이후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인회 등의 행사는 일절 없을 예정이었지만, 마지막으로 연주자들이 로비로 나가 인사하는 시간 정도는 가져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도 거기에 대해선 이견이 없었다.
이야기를 정리한 뒤, 알렉산드라는 다시 연주자들을 돌아보며 마지막으로 요청했다.
“그럼, 인사하러 갈까요.”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대기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 사이에도 이미 수많은 인파가 기다리고 있다는 게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이런 기묘한 분위기를 겪는 건 처음이었다.
조용한 요란함. 그녀가 느낀 느낌은 그러했다.
연주회의 반응이 이럴 수는 없었다.
내용이 좋았다면 열광적이었어야 했고 엉망진창이었다면 항의의 목소리로 가득하거나, 아니면 실망한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서 텅텅 비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엔 사람들이 가득 몰려서 눈에 보일 듯한 열기가 어른거리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소란스럽지 않았다.
암묵적인 질서가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타티아나의 이야기가 모두에게 들렸구나.’
이 연주회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열린 것인지 이해한 청중들은 모두 지나치게 열광하는 것에 대해 자중하고 있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기엔 연주회의 내용이 너무 좋았던 모양이다.
모두 자신이 느낀 바를 조금이라도 더 확실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열기에 취해 있는 것이 보였다.
이미 곳곳에서 술렁거림이 일어나고 있었고, 카메라 렌즈가 수백 개는 이쪽을 향했다.
플래시가 마구 터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잠시 후,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음악가들이 준비된 세트 위에 올랐다.
제일 먼저 대표로 마이크를 잡은 건 알렉산드라였다.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녀의 인사말은 그리 특별할 것 없었다.
청중으로 와 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사인회 등의 행사가 없는 것에 대한 사과 정도였다.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구태여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다음으로 마이크를 받은 건 연주자들 중 가장 연장자인 게오르기였다.
그 역시 특별한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준비 없이 즉석에서 마이크를 잡고 천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연주자들이 으레 하는 인사말과 감사 인사가 이어졌다.
두 사람은 여기에서 더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이 되레 연주회의 본질을 흐리게 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듯 보였다.
아나스타샤 역시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슬슬 연주회의 마지막 인사도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 있는 사람?”
게오르기가 마이크를 내리며 다른 연주자들에게 물었다.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질문이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면 이쯤에서 인사를 마치고 공식적으로 마무리를 하면 된다.
하지만 게오르기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있었다. 타티아나였다.
“……달라고?”
“예.”
모두 당황스러워했다.
이미 타티아나는 자신의 역할을 확실하게 해냈다. 여기서 더 무리하여 무언가 할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는 부담스러운 일은 알렉산드라나 게오르기가 대표로 맡아서 한 것으로 충분했다.
그래도 타티아나는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게오르기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미 사람들의 관심이 타티아나에게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곤 결국 그녀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었다.
‘타티아나…….’
아나스타샤는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이 애는 왜 이렇게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걸까.
그렇게나 음악적으로 최선을 다해 설득했으면서 아직도 해야 할 의무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는 타티아나를 정말 좋아하고 최선을 다해 지지해 주고 싶지만, 가끔 이럴 때면 아직도 전혀 모르겠단 생각이 들곤 했다.
천천히 마이크를 쥔 타티아나가 입을 열었다.
“우선…….”
온 청중들의 시선과 귀가 집중된다. 그 모두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타티아나가 말했다.
“갑작스러운 프로그램 변경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이미 모두 알고 있었던 부분이기 때문에 알렉산드라도 하지 않았던 사과를, 타티아나는 어물쩍 넘어갈 수 없다는 투로 짚고 넘어갔다.
청중들 사이에서 되레 그런 걸로 사과할 필요 없다고 만류하는 기색이 퍼질 정도였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단순히 연주자로서의 고집으로 이 사과를 꺼내어 내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양해해 주신 여러분의 관대함에 힘입어 제가 무대에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약속 하나 드릴게요.”
약속?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맨 앞줄에 있는 한 사람의 손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티켓은 잊지 말고 보관해 주세요. 그러면 언젠가 그 티켓을 증표로 훗날 연주회에 초대하겠습니다.”
여전히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좌중에선 서서히 이해한 사람들의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 역시 타티아나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았다.
언젠가 타티아나는 다시 연주회를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있을 그 연주회의 티켓은 따로 구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했던 연주회의 사용 후 티켓을 그대로 가지고 오기만 하면 된다.
본래 연주회 티켓은 기념품으로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으니 그리 어려운 조건은 아니었다.
갑자기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흥분하기 시작한 사람들 앞에서 타티아나가 확고하게 약속했다.
“그 자리에선 오늘 들려 드리지 못했던 곡들을 선보일 생각이에요.”
가을 연주회는 끝났다.
타티아나는 음악으로 모두에게 안도와 희망을 전해 주었고 그 마법은 꽤 오래갈 터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해낸 타티아나는 운명론자이자 음악 교조주의자면서도 현실적인 부분을 간과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이 자리의 증인들에게 물증까지 건네주면서 보다 확실하게 에르네스트와 함께 돌아올 것을 약속한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타티아나의 발언에 일대 혼란이 빚어졌다.
그 사람들을 쭉 둘러보며 타티아나가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오늘 와 주셔서 감사했고, 모쪼록 조심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타티아나는 마이크를 직원에게 건네주었고 알렉산드라가 기다렸다는 듯 연주자들을 이끌고 뒤편으로 물러났다.
다시 복도를 걸어 퇴장하는 동안 내내, 뒤편에선 끝내 폭발해 버린 열광적인 환호가 그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