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3화
코너를 막 돌아 나오자마자 아나스타샤, 다리아를 시작으로 우르르 사람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우뚝 멈춰 서니 질문 세례가 마구 이어졌다.
“방금 그 이야기 뭐야? 타티아나? 원래 그렇게 하려고 했었던 거야?”
“연주회를 또 한다고?”
“사용 후 티켓을 그렇게 쓴다는 건 처음 들어 보는데.”
아무래도 내가 마이크를 잡고 했던 말이 조금 충격적이긴 했나 보다. 하지만 이렇게 물어보면 답해 줄 수가 없는데.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옆에서 알렉산드라가 중재해 주었다.
“진정들 좀 하세요. 다들.”
“아…… 미안합니다.”
그제야 게오르기가 뒷목을 긁적이며 물러났고 다른 사람들도 조금 조용해졌다.
난 천천히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두들 이렇게 당황해하는 이유가 나에게 향하는 걱정에 있음을 깨달았다.
미처 연주회 일을 끝내기도 전에 내가 또다시 무언가 일부러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난 여기서 연주회를 마친 것으로 에르네스트에 대한 예우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미처 그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티켓을 든 1700명의 증인들을 증표로써 엮고 속박했다.
그 사람들은 아마 꽤 오랜 시간 동안 내 약속을 기억해 주리라.
기념으로 간직하며 티켓을 볼 때마다 떠올리겠지.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돌아오길 기도할 테고.
계산적으로 한 건 아니고 즉흥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나 난 내가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확인한 기분이 들었다.
음악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구세프 선생님이 지금 내 모습을 보신다면 거의 기절하시겠지.
약간 죄송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난 이런 사람인 것이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내 본마음을 밝히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대충 둘러대듯 이야기했다.
“원래 생각했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요.”
“갑자기? 그렇게 큰일을?”
“안 되나요?”
“네가 하겠다면 안 될 건 없겠지만…….”
지나간 연주회의 티켓을 가지고 오기만 하면 다음 연주회도 볼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조건은 정말 전무후무한 파격적인 일이었다.
티켓값은 하나도 받지 못하고 대관료만 어마어마하게 지불해야 한다.
내 독단으로 시행한 이런 연주회 방식엔 스폰서도 붙지 않겠지.
다른 사람들은 내가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할 거라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난 전부 자비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거기까지가 최소한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1700명이 다 돌아오겠지?”
도중에 솔렌이 현실적인 숫자를 꺼내기도 했다. 나 역시 현실적인 사안들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할 필요성을 느꼈다.
우선 사용 후 티켓을 내 멋대로 증표로 삼은 것에 대해서다.
난 어차피 기념품으로 가져가는 티켓을 그렇게 쓰는 것에 대해 별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다.
난 알렉산드라를 돌아보았다.
“아, 티켓을 그렇게 사용해도 되는지에 대해선 미리 문의를 했어야 했네요. 죄송해요. 알렉산드라.”
“아뇨, 음…… 저도 그런 건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가능할 거라 생각해요.”
음악계에 긴 시간 동안 몸을 담고 있던 그녀로서도 이런 상황은 당혹스러운 모양이다.
하지만 딱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물론 내가 계속해서 관성을 놓지 않으려는 것에 대해 걱정스러워하는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결국은 내 의지를 높게 생각해 주는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며 알렉산드라가 이어 말했다.
“자세한 건 제가 다시 물어보고 이야기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상세한 기획은 아직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이 정도로 지금은 충분했다.
게오르기는 날 보며 허탈한 듯 웃으며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진짜 상상도 못 했어. 그런 걸 생각할 줄은.”
“그러게 말야.”
“대관은 똑같이 여기 돔 무지키로 빌려야 하나? 인원이 인원이니만큼.”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 중엔 당연히 그 연주회의 구성원들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 그 연주회는 언젠가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가 하게 되는 건가요?”
“그렇겠네. 우린 1부에서 이미 보여 줄 수 있는 건 다 보여 주었으니까.”
콰르텟 멤버들의 생각은 모두 동일한 것 같았다.
그 말대로 1부는 이전의 기획과 달라진 것 없이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빠진 부분이 없으니 더할 부분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본래 듀엣으로 구성되었던 2부만 따로 빼서 연주회로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내 생각 역시 거기까진 같았다. 다만, 그 연주회 앞에 붙어있어야 할 서곡엔 한 사람이 더 필요하다.
“아뇨. 아나스타샤도 같이예요.”
자꾸 그녀에겐 미리 이야기를 전하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말밖에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건 너무 미안하다. 하지만 타이밍을 놓쳤다고 해서 그녀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나스타샤.”
“……어?”
“이 연주회에 함께 해 준 것도 고마워요. 하지만 나중에…… 끝까지 해 보지 않으실래요.”
아나스타샤는 적지 않게 당황한 것 같았다.
우리 중앙음악학교 피아노학과의 세 명이 함께 다녔던 건 사실이지만, 사실 구성만을 놓고 보면 아나스타샤는 뚝 떨어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 상태로 자신의 역할만은 완벽하게 해낸 그녀로선 아직 남은 역할이 더 남아 있다는 것이 상상이 안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저하며 내 이야기를 받아 주지 않았다.
“내가…… 나설 자리는 없을 거야 타티아나. 그러니까 빼도 괜찮아.”
“안 돼요.”
“왜?”
“제가 오늘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그 곡은 본래 세 명이서 연주하게 되어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준비했었던 첫 곡은 세 사람의 협주곡이었다.
에르네스트의 편곡은 완벽해서 나 홀로도 연주가 가능하게 해 주었지만, 난 실제 무대에 올라 연주를 하면서 깊게 실감했다.
그리고 바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세 사람이 무대에 올라 연주하는 것을.
진심 어린 내 말에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랬었지.”
“부탁할게요. 아나스타샤.”
쉽게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곡이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조용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에르네스트가 다 낫기 전까지…… 난 기다리고 있을게.”
무엇을 기다리겠단 것인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바는 많았다.
그녀는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내게 진심을 고백하고, 에르네스트에게 사고가 생겼던 그날 하루의 일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후회하고 자책하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우리 사이의 일들 중 그 무엇도 매듭지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정리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우린 가까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가까스로.
“갑시다, 다들. 피곤할 텐데.”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정리된 분위기가 되자 게오르기가 앞장섰고 우리는 다시 대기실 쪽으로 향했다.
***
그 뒤로 정말 모든 일정이 끝났나 싶었지만 마지막 일정으로 인터뷰가 남아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연주자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인터뷰엔 가급적 참가해 달라고 부탁했고, 난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 인터뷰는 사전에 질문지가 주어졌고 10분 정도 걸려 가볍게 끝났다.
우리 인터뷰를 맡은 기자는 딱히 자극적이거나 예민한 질문을 하려고 하진 않았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변경이 있고 그 전에도 소란이 많았으니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레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부분에 대답할 수 있는 건 대부분 나였다.
왜냐하면 2부에서 작정하고 왼손 연주로 막을 연 것 또한 나이기 때문이었다.
내 대답은 심플했다.
에르네스트가 겪은 불행에 집중하지 말고 그의 완전한 회복과 무대에 오를 날을 기대해 달란 것이었다.
“대답 좋았어요. 타티아나.”
“대본 써 온 것 아닙니까?”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알렉산드라와 게오르기가 날 칭찬했다.
사실 적정선을 지키며 대답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난 그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이제 의상을 벗고 쉴 때가 되어도 난 잠시 더 시간을 써야만 했다.
내게만 인터뷰 요청이 따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냥 거절하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연주회 직전에 봤던 이즈베스티야의 기자라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인터뷰는 연주회 후에 정식 요청하라고 말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말해 놓고 이제 와서 요청은 요청이고 수락은 내 마음이라며 가지고 놀듯 이야기했다간 무슨 원한을 살지 모른다.
원한을 사는 게 그리 무섭진 않았지만, 그래도 연주자로서 지켜야 할 신의라는 것이 있는 난 그 요청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테이블을 가운데에 놓고 나와 마주한 이즈베스티야의 기자, 라시드는 날 바라보더니 웃었다.
“인터뷰 요청을 하긴 했지만, 그냥 이야기나 할까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기자시잖아요?”
“기자와도 이야기하신다면서요?”
재밌는 사람이네.
난 웃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라시드 역시 미소를 짓더니 정말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건반 느낌은 어땠습니까?”
누구와 하더라도 쉽게 주고받을 수 있는 내용들이 이어졌다.
피아노의 조율 상태에 대해 느낀 감상이나 혼자 무대에서 느낀 기분 등. 있는 그대로 난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인터뷰인지 사담인지 분간이 잘 안 가는 대화가 오가고, 그는 모두가 궁금해할 만한 것도 내게 물어보았다.
“마지막 곡은 제목이 어떻게 됩니까?”
딱히 숨기고자 하는 건 아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작곡가는 아마……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맞겠죠?”
“예.”
“본 프로그램이었던 서곡의 편곡입니까?”
“맞아요.”
“역시 그렇군요…….”
라시드는 허허 웃더니 테이블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정말 인상적인 무대였습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제가 느낀 감상으론 세 곡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듯했는데…… 옳게 들은 것이라면 정말 대단한 프로그램이라 극찬을 드리고 싶습니다.”
“잘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음 연주회를 미리 예고하기까지. 그 전부가 하나의 기획이었군요.”
약간 흥분한 듯 말이 빨라진다. 라시드는 자신이 이해한 것들이 옳았음을 확인하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그는 신문사의 기자로서가 아니라 정말 한 명의 청중으로서 감상을 전해 왔다.
“정말 마법사가 이끄는 것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귀중한 순간을 선사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난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불안 등을 알려 왔던 그가 이렇게 말해 주니 나 역시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라시드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래 시간을 뺏어 죄송합니다. 이만하도록 하죠.”
“이걸로 괜찮나요?”
“예, 연주회 내용이 워낙 좋아서. 하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기사가 어떻게 나갈진 모르겠지만 걱정이 되진 않았다.
그를 따라 일어서자 라시드는 가방에 수첩 등을 챙겨 넣다가 말고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일전에 걱정하셨던 부분에 대해서도, 제가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내가 걱정했던 부분이라면 이즈베스티야에 추측성 기사들이 실리는 것들이었다.
라시드가 어떻게 해 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난 그의 약속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시드가 떠나고, 나도 슬슬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타티아나.}
{아.}
다른 청중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뒤에도 기다리고 있었는지 세연이 저편에 서 있다가 날 불렀다.
난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너무너무너무 완벽했어. 진짜로.}
세연은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하며 날 와락 끌어안았다. 난 그녀가 일부러 이런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간 함께 하면서 그녀는 내가 무엇을 준비해 왔는지 안다.
무대에 남겨진 내가 에르네스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심했다는 것도 알고.
때문에 그 결과가 결코 나쁘진 않을 것이란 확신을 얻은 지금, 굉장히 기분 좋아 하는 것 같았다.
난 순수하게 기뻐하는 세연에게 웃어 주었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몸짓으로 티켓을 꺼내더니 흔들며 말했다.
{이거 잘 간직하고 있어야겠네?}
그것이 단순히 언젠가 있을 연주회의 공짜 티켓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도 잘 안다.
마치 에르네스트에게 전해 주었던 부적처럼, 소중하게 간직해 줄 것이란 기분이 전해져 왔다.
그 후에도 세연은 계속 신이 난 것처럼 재잘거렸다.
내가 적어도 오늘만큼은 연주자로서 무대에 선 것을 기뻐하길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창 이야기하던 그녀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이어 물었다.
{다음 활동은 어떻게 할 거야? 계속 하는 거지?}
다음 일정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하지만 가야 할 곳은 있었다.
난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에르네스트를 만나러 가야죠.}
{응?}
{잠깐…… 오늘 일정을 묻는 게 아니었나요?}
{응?}
그제야 난 세연이 물었던 것이 앞으로 연주자로서의 활동임을 깨달았다.
내년의 콩쿠르 등에 제대로 참가하는 것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완전히 잘못 짚고 대답했다.
갑자기 당한 기분이 들어서 얼른 자리를 뜨려다가, 멀거니 서 있는 세연이 마음에 걸려서 다시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녀는 나지막이 웃더니 손을 내저었다.
{빨리 가 봐. 타티아나.}
{…….}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세연은 같이 가자고 하지도 않았다.
난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세연의 귀국일이 내일이라는 걸 떠올리곤 간신히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