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4화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먼저 가겠다고 전했다.
모두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고 다음에 또 보자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나스타샤에게도 함께 가자고 이야기하려 했지만, 그녀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답했다.
“먼저 갈래? 나 오늘은 엄마랑 같이 갈게.”
“아…… 어머니께서 오셨었나요?”
“응. 내가 티켓을 드렸거든.”
“저, 그러면 인사를…….”
“다음에 해. 다음에. 괜찮으니까. 넌? 타티아나. 유리 아저씨는 못 오신 것 같던데.”
“아버지와 오빠는 북해로 출장을 가셔서요.”
“그렇구나.”
워낙에 바쁘신 분들이라 이런 일이 많다는 걸 아나스타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잠시 고민하는 듯 고개를 주억이더니 배시시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이미 따져볼 것 없이 모두 결정을 내린 얼굴이었다.
“오늘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고 하고 싶은데, 그것도 다음에 하자. 그래도 되지?”
“아…… 그래요.”
“응…… 잘 가. 타티아나.”
병원에 같이 가자고 해야 하는데, 잠시 주저하는 사이 아나스타샤가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녀는 내가 말 할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아놓았다.
그녀는 이미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다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 세 명이 함께 모여 있는 것보단 따로 있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그래도 이렇게 아나스타샤의 말대로 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억지로라도 다시 한번 물어볼까 생각하며 입을 떼려는 찰나, 아나스타샤가 다시 날 가로막듯 간결하게 말했다.
“학교에서 봐.”
저번에 병원 앞에선 다짜고짜 태워 가기도 했었지만, 지금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완전히 편해지진 못했지만, 그래도 연주자로서 무대에 서서 여러 가지를 다잡은 듯 보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난 잠시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다가, 그녀를 존중해 주기로 결정했다.
“예, 학교에서 봐요.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는 고맙다는 듯 싱긋 웃어 주었다.
그렇게 연주회 관계자들 모두와 빠르게 인사를 나누고 홀 밖으로 나왔다.
만나서 인사를 해야 할 사람들이 또 있나 잠시 생각해 보다가, 일단 전화로 빅토르를 불렀다.
그는 정말 30초 만에 내 앞에 도착했다.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병원으로…… 가요.”
“알겠습니다.”
드레스를 입은 채로 차에 올라타느라 조금 불편했다.
그 불편함을 느끼고 나서야 난 아직도 드레스 차림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다시 내려서 의상실로 가야 하나? 하지만 단순히 휙 갈아입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럼 또 시간이 한참이나 걸릴 터였다.
난 조금도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병원에 가는 것도 굉장히 주목을 끌 만한 일이다.
어떻게 하지?
전혀 모르겠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다.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아가씨.”
뒷좌석에서 내가 고뇌에 빠져 있는 걸 봤는지 빅토르가 확인하듯 물었다. 난 나도 모르게 그에게 물었다.
“저 지금…… 괜찮나요?”
빅토르는 무슨 이상한 질문을 다 듣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1700명 앞에 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와서 뭘 물으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게 아니라…… 병원에 가면 이상해 보일까 싶어서…….”
“딱히 그럴 것 같진 않습니다.”
그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혹시 내가 왜 고민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가만히 바라보니, 그는 피식 웃으며 핸들을 툭툭 쳤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들어가시는 건 지하 주차장에서 VIP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면 되니까, 염려하지 마시죠.”
내가 지금 만나고 싶은 사람은 다른 누가 아니라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그를 만나는 건 차라리 연주자의 모습인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빅토르가 말한 대로 다른 사람과 마주할 일이 없다면 문제될 건 없었다.
이윽고 난 결정을 내렸고, 고개를 끄덕였다.
“…….”
강을 따라 함께 가는 도로를 달리며 난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조금씩 초조해져 간다.
에르네스트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연주회 시작 전부터 했었던 생각이었다.
그래서 가는 건 좋은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진 전혀 생각해 둔 것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앞에서 망설임이란 전혀 없었는데, 지금은 단 한 마디도 똑바로 못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괜히 안절부절못하며 난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렸다. 긴 소매가 유난히 더 거슬린다.
연주복이니까 그냥 입고 가기로 정했지만, 에르네스트가 소매로 한 손을 가리고 연주했던 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면 어쩌지? 만약 오해해서 기분이라도 상했다면?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생각들이 스멀거리며 올라온다.
그냥 이대로 차를 돌려 집으로 향하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
하지만 무대에서도 도망치지 않았던 내가 정작 그 마무리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도망칠 순 없었다.
할 말이 없더라도 그와 마주하면 생각나겠지. 지금까지도 항상 그래 왔으니까.
난 그렇게 막연히 생각하며 병원에 다다를 때까지 멍하니 앉아서 머릿속을 정리해 나갔다.
“도착했습니다.”
미리 말했던 것처럼 빅토르는 병원의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날 안내했다.
그는 이미 이곳을 완전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헤매지도 않고 한 번 만에 그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날 데려다주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에 돌아보자, 빅토르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내가 고뇌하고 어려워할 때 성심껏 도움을 주었지만, 그것이 필요한 것이라 생각할 때면 으레 겪어야 하는 일인 양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어떤 기분으로 날 보고 있는진 알겠지만…… 그래도 너무 애 취급은 안 해 줬으면 좋겠는데.
“…….”
“다녀오시죠.”
하지만 내가 가만히 흘겨봐도 빅토르는 웃기만 했다.
내가 어떻게 한들 그를 이겨먹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었다. 난 고개를 흔들며 위층으로 향하는 하나뿐인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솟구쳐서 날 최상층으로 데려다주었다.
복도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본래 오가는 사람들을 확인해야 할 검색대는 텅텅 비어 있었다.
아마 빅토르가 무언가 조치를 한 것 같았다.
“…….”
천천히 빈 복도를 걸었다. 구두 소리와 내 심장 소리만이 이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걷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드레스를 입은 채로 이런 곳을 걷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난 다른 건 전혀 생각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첫 인사말이라도 제대로 하기로 마음먹으며 생각했다.
안녕하세요는 조금 바보 같다.
잘 계시나요는 많이 바보 같고.
짧은 인사에서 안부를 묻고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까지 온갖 생각을 하던 난 결국 텅텅 빈 머리로 병실 앞에 섰다.
멍하니 손을 들어 올리고 나서도 난 문을 노크하지 못했다.
빨리 뭐라도 생각해 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들어오지그래?”
“!”
난 화들짝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바닥을 차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그제야 난 시간을 벌 방법이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
천천히 문을 밀고 들어갔다.
병실의 인테리어는 저번과 바뀐 것이 없었다.
벽 쪽에 붙어 텔레비전과 의료 장비로 보이는 몇몇 기계들. 구석에 있는 선반엔 이코나와 꽃들, 그리고 노란 부적들이 골고루 놓여 있었다.
그리고 침대엔 이미 에르네스트가 앉아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역시 깜짝 놀란 모습이다.
“그거…… 오늘 무대에서 입고 있었던 드레스네.”
특이하게 볼지도 모른다 생각은 했지만 이런 반응과 마주하자 절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난 황급히 말했다.
“그, 미안해요. 지금이라도 바로 갈아입고 올…….”
“아니, 아냐. 왜? 난 방금 전까지 텔레비전에 있었던 연주자가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아서 좋은데.”
“…….”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난 움찔하며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좋다는 말은 좋다. 그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게 무의미해지지 않고 비로소 형체를 갖추게 된다.
날 무대에 올려보내기로 한 건 에르네스트의 생각이기도 했으니까, 지금 기뻐하는 건 그의 진심이리라.
하지만 내가 무대에 서서 연주를 하는 동안 에르네스트는 이곳에서 누워 저기 있는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가 그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여전히 난 무엇을 하더라도 그를 완전히 위로할 수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조용히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이렇게 된 김에 하고자 했던 평은 다 해야겠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부 다 봤어. 그 소매로 손을 감추었던 고도프스키의 엘레지도 좋았고…… 다음 리스트 곡도.”
곡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이야기하려던 것 같던 그는 갑자기 든 의문이 있는지 고개를 기울이며 내게 물었다.
“왜 리스트였어?”
“……왜냐뇨?”
“이유가 있을 것 아냐. 그냥 2부의 프로그램 구성에 필요해서 넣었던 거야?”
왜냐고 묻는다 한들 돌려줄 말이 마땅찮았다.
물론 깊게 고민하긴 했지만, 3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빠르게 프로그램부터 정해야 했던지라 직감에 많이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그 직감은 불현듯 오래전부터 내 뇌리에 남아 있던 리스트의 곡을 불러냈다.
“혹시 작년 초를 기억하시나요?”
“작년?”
에르네스트가 되물었다. 작년 초라 해도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조금 더 기억의 영역을 좁혔다.
“그때 전화로 에르네스트는 세 곡을 연주하면서 말씀하셨죠. 그게 에르네스트의 리스트 스페셜이라고.”
“그, 그래…… 지금 들으니까 진짜 센스 없이 들리네…….”
그간 작곡가로서도 공부를 열심히 한 에르네스트는 이전의 네이밍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난 딱히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연주회용 연습곡 3번 탄식과 위안 3번, 그리고 사랑의 꿈 3번은 지금도 에르네스트가 준 음반으로 종종 듣곤 했다.
정말 특별하다고 칭해도 모자람 없는 음악들이었다.
그 보답이라고 하기엔 이상하지만, 난 그에게 들려줄 수 있는 특별한 음악으로서 이번엔 이 소나타를 꼽고 싶었다.
“오늘 연주했던 단테 소나타는 제 리스트 스페셜이었어요.”
“…….”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에르네스트는 날 물끄러미 바라본다.
작년부터 있었던 우리들의 음악적 교류, 그리고 내가 연주했던 소나타를 다시 돌이켜보며 회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그는 잘했다거나 못 했다가 아닌 다른 대답을 내어 주었다.
“고마워.”
그 말은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내 연주가 그저 허공을 맴돌다 사라지는 허무한 울림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 에르네스트가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억누르고 있던 내 감정을 잔뜩 흔들어 놓았다.
사실 그건 내가 제일 바랐던 말이었다.
“너를, 아니…… 네가 연주해 준 곡들, 정말 좋았어.”
에르네스트도 갑자기 찾아온 내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못했던 건 마찬가지였는지 조금 머뭇거리면서 이야기했다.
난 당장 목이 멜 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참으면서 웃어 보였다.
“다행이에요.”
에르네스트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난 알아차렸다. 그 역시 내가 무대에서 어떤 연주를 할지에 대해 굉장히 염려하고 있었다는 것을.
날 설득해서 무대에 올리기까진 성공했지만, 막상 내가 그곳에서 잘못하거나 그에게 너무 속박되어 버린다면 정말 안 하느니만 못하는 일이 되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선을 깨뜨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바를 잘 해냈고, 에르네스트도 그 부분에 대해선 충분히 인지하고 안심하는 것 같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는 갑자기 날 불렀다.
“타티아나.”
“예?”
“갑자기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말인데…… 악수해도 될까.”
조금 의아한 말이었으나 내가 지금 연주자로서 이곳에 있다는 것을 그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긴 소매를 걷고 왼손을 내밀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누가 악수를 왼손으로 해?”
“…….”
하지만 그의 오른손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굳이 시선을 그쪽에 두지 않으려 하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
심각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하…… 아니야, 솔직히 말할게.”
그리고 그는 고정된 오른손을 힘겹게 이쪽으로 내밀었다.
“손 잡아 줄래.”
연주자들은 손을 통해 여러 가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
그건 때로 응원과 격려이기도 하고 에너지 그 자체이기도 했다.
방금 무대에서 내려온 나는 그에게 많은 걸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가능하다면 모든 걸, 전해 주고 싶었다.
난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오른손을 잡았다.
만에 하나라도 팔을 흔들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하여 섬세하게 움직였다. 소매가 흘러내리며 그와 나의 손을 덮었다.
“…….”
그렇게 느껴지는 손아귀에서 난 상상 이상으로 강한 힘을 느꼈다.
나약함 따윈 전혀 없었다. 팔꿈치의 부상이 있긴 하지만 그의 손엔 아직 연주자의 의지가 남겨져 있었다.
그 에너지는 상상 이상으로 너무나 또렷해서 날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니 에르네스트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는 내게 전해 받고 싶은 것이 있는 만큼, 내게 알려 주고 싶은 것들도 많은 듯했다.
난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소리를 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