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45화 (845/1,277)

##  845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흘리던 타티아나는 손을 놓고 나서야 갑자기 부끄러워졌는지 근처 의자에 비스듬하게 앉았다.

요 며칠간은 계속 어두운 감정만을 보여서 걱정되었는데, 무대에 올라 자신의 일을 해내고 또 그 연주로 스스로 확신을 얻은 끝에 그녀는 조금이나마 밝은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

“그…… 급하게 오느라 아무것도 가져온 것이 없는데…… 여기 있는 과일이라도 깎아 드릴까요? 드시겠어요?”

급하게 왔다는 말이 그 무엇보다 기뻤다. 사실 아무것도 필요 없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냥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타티아나는 옆에 있는 과일 바구니에서 깎기 편한 사과를 하나 꺼내선 접시를 무릎에 두고 칼을 쥐었다.

손을 덮는 긴 소매를 걷는 모습을 보니 무척 불편해 보인다. 에르네스트는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

연주회를 끝내고 타티아나가 올 것 같다는 예상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 늦게나 아니면 내일이 되어서였지, 이렇게 끝나자마자 불편하게 드레스 차림으로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덕분에 에르네스트는 화면상으로만 봤던 연주회를 조금이나마 직접 본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베아트리체가 먼저 천국으로 올라가 버리지 않고 계단을 도로 내려와 단테를 이끌었던 것처럼,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를 그냥 홀로 두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에르네스트는 의사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염증만 조금 더 가라앉으면 관절의 가동 범위를 제대로 확보한 뒤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외과 수술에 대해 에르네스트는 잘 아는 바가 없었다.

때문에 무지에서 비롯된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감 등을 느끼면서도 가까스로 외면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무지가 되레 반드시 잘될 것이란 긍정적인 기분을 잔뜩 가져다주고 있었다.

‘믿을 수밖에 없지.’

전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라고 했었던 타티아나가 무대에 서선 결국 모든 것을 이겨냈다.

그런 그녀와 손을 잡았으니 잘못될 리가 없었다.

‘정말 그뿐인가?’

에르네스트는 굳이 악수를 먼저 언급했던 이유를 떠올리다가,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타티아나가 연주회 다음으로 바로 자신을 찾았고, 지금은 잠시나마 곁을 지켜 주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드세요.”

“응.”

에르네스트는 포크에 꽂힌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타티아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기만 했다.

서서히 해가 저물어 가는 오후.

사과 하나를 겨우 다 먹을 정도의 시간이 흘러갔을 때, 에르네스트는 이쯤이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미 오늘 음악으로 너무나 많은 말을 했던 타티아나는 더 이상 인간의 언어로는 할 말이 별로 없어 보였고, 에르네스트는 연주로 피곤할 그녀를 오래 붙잡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무 말 없이 옆에서 쉬고 있기만 하더라도 좋을 것 같았지만, 오늘 그는 이미 충분하게 많은 것을 그녀에게 받았다. 더 욕심을 부릴 순 없었다.

슬쩍 시간을 확인하는 척하면서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곧 의사가 올 시간이네.”

“아, 그…… 그런가요.”

타티아나는 새삼 신경 쓰이는지 자신의 소매를 내려다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연주회용 드레스를 입은 상태로 다른 사람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걸 보여 주기 싫은 건 에르네스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대 위에서 연주자로서 활동할 때라면 모를까, 지금 이런 곳에선 절대로.

에르네스트는 먼저 침대에 몸을 조금 더 눕히며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히죽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난 이만 쉬는 척이라도 하고 있을게. 너도 들어가 봐.”

“예…… 알겠어요.”

타티아나는 주변을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애초에 가져온 것이 없으니 정리도 빨랐다.

하지만 정리를 마치고 나서도 괜히 주변을 서성이면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에르네스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타티아나. 다음엔 정말로 수술 마친 후에 보자.”

이전에 돌려보냈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수술은 미루어졌고, 결국 또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에르네스트의 목소리엔 부정적인 느낌이 전혀 담기지 않았다.

말을 하면서도 그는 지금처럼 이렇게 의욕과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적이 별로 없었음을 느꼈다.

그 분위기는 타티아나에게도 전해진 듯 보였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도할게요.”

타티아나는 천천히 뒤돌아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를 휘감고 있는 검보랏빛 드레스가 흔들리며 그녀의 자취를 어른거리게 만들었고, 곧 병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병실은 고요해졌다. 의사는 아마 몇 시간 후 저녁이 되어서야 오겠지.

에르네스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수마가 찾아들어 그의 의식을 끌어내렸다.

하지만 그 밑엔 암흑 대신 음악의 선율들로 가득한 신비한 공간이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에르네스트는 양손을 뻗었다.

***

가을 연주회로부터 하루가 지났다.

전날의 피로가 다 풀리지 않은 채였지만 난 새벽부터 일어나 몸을 일으켰다.

슬리퍼를 신은 채 조심스레 방을 빠져나와서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세연에게 내어 주었던 손님방 앞으로 가 보니,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난 잠시 기다렸다가 천천히 노크했다. 부스럭거림이 멎더니 세연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파자마 차림의 날 보고는 당혹스러워했다.

{타티아나.}

{돌아갈 준비하시나요?}

방 안을 보니 그녀의 캐리어 안에 옷가지 등이 마구 들어가 있었다.

세연은 황급하게 그것을 가려 보려 했지만, 손으로 가린들 가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울상이 되어 팔을 축 늘어뜨렸고 난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전날 밤, 난 세연과 꽤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벌써 며칠이나 그녀와 함께 있었지만, 계속 연주회 준비가 우선이었기에 이렇게 사적인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는 아주 멀리서부터 시작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났을 때, 세연이 악보를 빼앗기고 곤란해하고 있었던 걸 내가 도와주었던 것부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세연을 보며 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할 순 없었지만, 이미 그녀는 우리가 서로 닮아 있는 음악을 구사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자각하며 납득하고 있었다.

음악적 동질감은 그 우릴 강력하게 끌어당겼다.

그렇게 이어진 이야기는 세연이 내 독주회를 보러 모스크바에 왔었던 것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던 이야기로 이어졌다가, 이윽고 오늘날까지 도착했다.

‘이 아이가 없었더라면…….’

난 내가 그녀 덕분에 힘을 얻어 무대에 설 수 있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구세프 선생님과 에르네스트가 종용한 것도 있었지만, 만약 세연이 없었더라면 난 혼자서 그렇게 빠르게 결정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이 촉박했을 때, 무조건적으로 날 믿어 주며 긍정적인 힘을 실어 주었던 건 바로 세연이었다.

세연 역시 나 덕분에 피아노 연주자로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세연은 엘리트 연주자 코스를 밟지 못하고 피아노 학원을 전전하다가 갑자기 교수님의 눈에 띄어 가르침을 받게 된 케이스였다.

막연히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연습에 임했을 뿐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나를 보며, 피아니스트의 한계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두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하면서, 세연은 스스로의 한계 또한 계속해서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따뜻한 차와 함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대화와 웃음을 나누면서, 나와 세연은 많이 가까워졌다.

누군가 먼저 의도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그리되었다.

그 때문인지, 세연은 떠나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아쉬운 듯 보였다.

{가야지. 비행기는 날 기다려 주지 않을 테니까.}

{비행기가 필요하다면 전용기를 빌려 드릴 수도 있어요.}

{뭐…… 전용…… 뭐?}

{전용기.}

{……정말 뭐든 다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네.}

세연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더니 돌연 허리를 쭉 펴고는 담백하게 말했다. 고민조차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양할게. 그런 비행기에 타면 멀미할 것 같아서.}

{저희 조종사는 경력이 긴 베테랑인…….}

{조종사 실력을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알잖아!}

세연은 깔깔거리며 말했다.

아쉬움은 아쉬움이고. 떠나야 할 땐 떠나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볼 때 더더욱 반가워질 테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나도 그녀도 이해가 일치했다.

그녀가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이렇게 장난을 받아 줄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난 무척 기뻤다.

{저도 준비할게요.}

{어…… 네가 왜?}

{공항까지 바래다 드려야죠.}

{알아서 가도 되는데.}

{이 정도는 하게 해 주세요. 세연.}

전용기도 반은 진담이고 반은 장난이었지만,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건 백 퍼센트 진담이다.

난 그녀를 배웅할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세연도 그 부분에 대해선 내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는지 웃으며 기쁘게 받아들였다.

욕실로 향한 난 제대로 씻으며 준비했다.

어제 있었던 피로가 아직 다 가시지 않아서 피곤함이 남아 있지만, 따뜻한 물로 씻어내리니 조금 나아졌다.

곧바로 학교로 갈 생각으로 교복으로 갈아입고 가방을 챙긴 후 로비로 나오자, 세연이 캐리어를 옆에 두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갈까요?}

우리는 어두운 새벽으로 향했다.

전날 빅토르에게 부탁해 놓은 덕분에 그는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차에 올라타니 우리가 가볍게 먹을 간식도 준비되어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한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빅토르!”

세연이 짧은 러시아어로 감사를 표했다.

세상에 빅토르 같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와 세연은 거의 감동하며 쿠키를 나누어 먹었다.

모스크바를 가로질러 공항까지 가는 길은 꽤 멀다.

그나마 새벽이라 그런지 차가 별로 없어서 막히는 일 없이 편하게 갈 수 있었다.

그사이 난 세연과 못다 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도로가로 보이는 장소들에 대해 난 설명해 주었다.

다음에 그녀가 편하게 오면 놀러가 볼 수 있을 만한 곳들이었다.

어젠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오늘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였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진 모르는데도, 우리 대화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이윽고 차가 천천히 셰례메티예보 공항의 주차장에 멈춰 섰다.

빅토르가 세연의 캐리어를 꺼내어 주었다. 세연은 직접 캐리어를 들고는 빅토르에게 다시 감사 인사를 했다.

세연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빅토르는 웃으며 그녀에게 절도 있는 경례를 해주었다.

난 그녀를 따라 공항 안으로 들어섰다.

{저쪽이었던가?}

{예, 맞네요.}

새벽인데도 공항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시간 여유도 꽤 있긴 했지만 만에 하나 수속이 늦어진다면 곤란했다.

난 슬슬 세연을 보내 줘야 할 때라는 것을 느꼈다.

비행기 탑승자들이 우르르 향하는 가운데, 우린 멈춰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세연에겐 감사의 마음이 크다.

난 조금이나마 이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며 가볍게 그녀와 포옹했다.

며칠 전 세연이 이곳에 왔을 땐 그녀가 무작정 날 끌어안았었지. 그 생각을 하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세연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걸까. 포옹한 채로 우린 소리 내어 웃었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또 올게. 그게 아니더라도…… 벨기에에선 만날 수 있겠지?}

우리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만약 그곳에서 만난다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경쟁자로서 마주 봐야 한다.

그런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우리는 두근거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예, 그렇겠죠.}

{기대되네.}

{저도요.}

{나 그때는 지금이랑 또 다를지도 몰라.}

은근히 호승심을 일으키며 세연이 속삭였다.

강렬한 그 분위기는 연주자로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난 너무나 흡족했다.

그녀가 정말로 내 위를 향했으면 좋겠다.

물론 마냥 당해 줄 생각은 없지만.

{저도 마찬가지예요. 세연.}

{아하하하, 그렇겠네. 응. 응. 타티아나.}

까르르 웃으며 세연은 기뻐했다.

그리고 휙 멀어지더니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날 바라보더니 즐거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잘 있어. 타티아나!}

난 손을 흔들며 그녀를 배웅했다.

{다음에 봐요.}

{응!}

그 말을 끝으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세연은 등을 돌려 용감한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될 언젠가를 기다리며 난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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