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6화
이른 아침부터 세연을 공항에 데려다주고 나선 곧장 학교로 향했다.
빅토르는 너무 일찍 가는 게 아니냐며 말했다.
“일찍 가면 뭐 하십니까? 아가씨가 엎드려 자는 건 상상이 안 가는데.”
“글쎄요. 그간 못 했던 교과 예습도 해야 하고…… 할 일은 많아요.”
“괜히 물어봤나 싶군요.”
빅토르는 내가 세연을 보내고 나서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혼자 교실에 앉아 있을까 싶어 걱정한 모양이다.
하지만 난 혼자 있을 때의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되레 친구들이 등교하면 어떻게 봐야 할지에 대한 생각만 가득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은 분명 반갑겠지. 하지만 마냥 편하고 기쁜 마음만 드는 건 아니었다.
지금 보면 정말 어색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나보다 몇 배는 친구들이 어색해할 테고.
“할 일이 많지요…….”
중얼거리면서 난 좌석 뒤로 몸을 뉘었다.
내가 조금 더 사교적인 성격이었다면 그간의 사정과 감정 등을 잘 이야기하고 되레 이전보다 더 가깝게 잘 지낼 수도 있었겠지.
착한 아이들이니까, 아마 내가 조금만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굳이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도 잘 대해 주려 노력해 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평소에도 내 이야기를 곧잘 하지 않는 편이었고, 지금은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하면서도 그것을 끌어내려고 한다는 건 그 아이들을 이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인사하고 다시 이전 생활로 돌아가려 하는 것도 이기적인 것 같았다.
한참이나 고심했다. 어떻게 하면 어색하지 않게 친구들을 마주할 수 있을지 여러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답도 내리지 못하고 그냥 생각만 하고 있는 사이 학교에 도착했다.
이럴 때 도로가 조금 막혔으면 좋았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어리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자 빅토르가 내 쪽을 휙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다녀오시죠.”
“…….”
아까 전엔 너무 시간이 이르다고 걱정하던 그 사람이 맞나 싶다.
빅토르는 내가 이미 이제 와서 다시 발걸음을 돌리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살짝 등을 떠민다. 난 못이기는 척 가방을 들고 나섰다.
“고마워요, 빅토르.”
차에서 내려 학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2년 넘게 다니고 있는데도 뭔가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그 전에도 학교를 며칠간 못 온 적은 많았는데도 이번엔 뭔가 묘하다.
내 의지로 멋대로 학교를 쉬어 버린 건 처음이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제 그럴 일은 없으리라. 난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정문으로 들어섰다.
“…….”
문도 열려 있고 불도 켜져 있었지만 사람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로비를 지나 계단을 오르는 내내 들려오는 건 오로지 계단을 딛는 구두 소리뿐.
아직도 난 다리를 들어 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만약 지금이 어두운 밤이었다면 난 무서워서 한 걸음도 못 딛고 도망쳤겠지.
그러나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이 햇빛을 교내 곳곳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그 일부가 계단을 타고 튕겨 올라 내게 닿는다.
나는 그 빛들을 지침 삼아 위로 향했다.
교실이 있는 곳까진 꽤 많은 계단들을 올라야만 했다.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것들이 하나씩 쌓여 비로소 간신히 이곳에 도달한 느낌이다.
“후…….”
살짝 차오른 숨을 내쉬고, 지금 내가 속해 있는 공간인 10학년 피아노과의 문을 열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고요가 그대로 남아 있다가, 갑자기 생겨난 진동에 반응하며 이리저리 날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먼지들이 햇빛의 경로를 그대로 보여 주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며칠 만에 돌아와도 교실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그 영속적인 분위기를 마주하고 있으니 차분해졌다.
“…….”
창문을 열어 환기부터 한 뒤 앉아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예습도 해야 한다는 말은 괜히 한 말이 아니었다.
그간 신경 써야 할 곳이 많아서 공부엔 거의 손을 못 대고 있었다.
물론 오래 쉰 건 아니었으니까 큰 차이는 없겠지만, 아무 대비도 없이 바로 수업을 마주하고 싶진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자세로, 난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동안 지나갔던 시간표와 교과 항목을 비교해 가며 어디까지 알아둬야 할지 체크했다.
교실 안에 펜이 종이 위를 스치는 사각거리는 소리만 흐르길 몇 분.
저 멀리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엔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점차 가까워지자 들리기 시작했다.
난 펜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도 귀를 그쪽으로 기울였다.
경쾌하고 높은 목소리는 바르바라, 그리고 조용조용한 쪽은 라리사였다.
난 펜을 내려놓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 애들도 오겠지?”
바르바라가 교실 문을 탁 열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쪽을 바라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내가 앉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눈빛이다.
당혹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난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녀가 방금 이야기했던 그 애들 중 한 명이 나일 거라 생각하니 기뻤다.
“좋은 아침이에요. 바르바라, 라리사.”
“타티아나!”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내 옆으로 다가왔다.
마치 무언가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이리저리 날 보더니 곧 안도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바르바라는 아직도 놀란 기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빠르게 물었다.
“이렇게 일찍 와 있어? 왜?”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이젠 학교에 충실해야 할 때이기도 하고요.”
“그래, 그렇게 하기로 했구나.”
지난 며칠은 바르바라에게도 아마 편하지 않은 시간이었으리라.
13명밖에 안 되는 교실에서 3명이 한 번에 사라져 버렸다.
물론 가끔 연주회 등의 일정으로 학생들이 빠지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엔 어떻게 보더라도 무난하게 넘어가리라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일단 지금 가능한 최소한의 것들을 매듭지어 놓고 정상적으로 돌아와서 생활하려 한다는 것에 대해, 바르바라는 조금 고마워하는 것 같아 보였다.
밝은 성격이지만 주변을 잘 살피는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연주회 힘냈더라. 진짜 보고 깜짝 놀랐어.”
“봐 주셨나요?”
“당연한 거 아냐? 직접 가진 못했지만…….”
살짝 아쉽다는 듯 말끝을 흐리던 그녀는 갑자기 생각났는지 이야기의 방향을 옆에 가만히 서 있는 라리사에게 옮겼다.
“있잖아, 그거 알아? 라리사가 얼마나 바보 같은 애인지.”
“마, 말하지 마!”
목소리가 작은 그녀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직 아무 이야기도 안 했는데 라리사가 깜짝 놀라며 바르바라의 팔을 붙잡았다.
그래도 바르바라는 지금 이 이야기를 해 놓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지, 되레 조금 놀리는 투로 전부 말했다.
“이 애는 그 연주회 티켓까지 사 놓고는 결국 안 갔어. 취소한 것도 아니고 그냥.”
“?”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라리사를 바라보았다.
연주자들만 모여 있는 우리 학교에선 티켓을 선물하는 일이 초대이면서 부담이기도 하니 드문 편이다.
그런데도 자비로 구매했다는 건 분명한 관심과 우정의 표시였다.
난 순수한 의문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왜요? 라리사.”
“그게…….”
라리사는 안절부절못하고 움츠리며 한참을 주저하다가 정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못 보겠어서…….”
딱히 이유를 말해 준 건 아니었지만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예매가 끝난 후에 에르네스트의 부상 소식을 듣고 나와 아나스타샤도 잠적해 버린 상황에서 만약 연주회를 하더라도 그 현장이 어떻게 될지, 불안해서 가까이에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거의 강행하는 것처럼 열렸던 연주회였다.
라리사의 걱정대로 실제로 연주회 시작 전 현장의 분위기는 상당히 뒤숭숭했었다.
아마 비슷한 생각으로 가까스로 왔었던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라리사는 친구이니만큼 조금 더 많이 힘들어했고.
“…….”
말을 마치고 난 라리사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하더니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르바라를 올려다보고, 다시 날 바라보았다.
후회와 아쉬움, 그리고 미안함 등이 잔뜩 뒤섞여 있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난 평소 차분한 라리사와 교과 공부나 음악이론 등의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이었다.
때문에 마음이 여린 그녀가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알 수 있었다. 나도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여기서 사과하는 건 모두를 바보 취급하는 일이다.
때문에 난 착한 그녀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며, 무대에 섰던 연주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했다.
“티켓은 가지고 계시는 거죠?”
“응? 응…….”
“그렇다면 다음에 오시면 되어요.”
언젠가 올 다음을 약속해 둬서 다행이다. 지금 다시 한번 느끼면서 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연주회 티켓을 어떻게 사용할 건지에 대해선 이미 들었는지 라리사는 내 말을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웃으며 그녀를 조금 더 안심시켰다.
“그땐 기대하면서 와 주실 수 있을 거예요. 라리사.”
“응…… 미안해, 타티아나.”
“미안할 일이 어디 있나요? 전 라리사가 많이 염려해 주신 것 같아서 기뻐요.”
“……그래도 미안해.”
내가 분명 무대에 오르리란 것을 믿지 못했다는 게 친구로서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게 배신이라면, 나 역시 떳떳한 사람은 아니었다.
원래 연주회를 취소하려고 했던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상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할 시간이 있겠지. 에르네스트와 함께 모여서.
대신 난 지금 라리사와 다시 평범한 학교 친구로서 마주하고 싶었다.
“그럼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부탁?”
“예.”
설마하니 내가 정말로 무언가 요구할 줄은 몰랐는지 라리사는 당황해했지만, 그래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부탁을 하더라도 들어주겠다고 다짐한 표정이다.
난 책상 위에 펼쳐 놓은 교과서와 노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그사이 과제 나온 것 있다면 알려 주시겠어요?”
꽤 어려운 부탁까지 각오하고 있었는지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라리사는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옆에 있던 바르바라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풉, 지금 그게 부탁이야 타티아나? 그 엄청난 일을 해 놓고 교실에 돌아오자마자? 모범생도 정도가 있는 것 아냐?”
그런 티를 내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굳이 지금 부탁이란 말까지 해 가면서 물어본 건 내 평소 이미지가 거기에 가깝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내 의도를 어느 정도 짚어냈는지 바르바라가 날 놀리며 깔깔거리며 웃어 준 덕분에, 약간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앞서 나서 준 그녀에게 감사하며 난 맞장구를 쳐 줬다.
“라리사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요.”
“난 못 믿겠다는 거네!?”
“그렇게 들렸나요?”
가벼운 장난과 놀림이 오간다. 별것 아니지만 우리가 꽤 오랜 시간 이곳에서 함께 했었다는 증거들.
그 무엇도 변하거나 어디론가 가지 않았다. 라리사도 따뜻하게 웃으면서 즐거워했다.
이 아이들을 만나기 전까지 난 여러 가지 걱정을 했었다.
내가 없었던 동안의 어색함이나 의구심, 그리고 일방적인 걱정과 불안 등을 마주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직접 보고 나니 그런 걱정들은 아무 필요 없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린 서로 같이 대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었다.
바르바라가 가방을 마구 뒤적이며 말했다.
“안 되겠다. 그 부탁은 내가 들어줄게. 나도 싹 다 체크해 놨거든?”
“내, 내가 할게. 바르바라.”
“같이 교차검증 하든가!”
시원하게 웃으며 바르바라가 라리사를 내 옆에 앉히곤 자신도 앉았다.
우리 세 사람은 모여 앉아서 한참이나 이야기했다.
과제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앉은 것이라 각자 앞에 노트가 펼쳐져 있긴 했지만, 그 주제는 꼭 과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당연히 내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고, 그사이 두 사람은 인터넷도 많이 봤는지 뉴스나 SNS 등에서 떠도는 이야기 등도 내게 전해 주었다.
그런 소식에 약한 편인 난 그녀들로부터 전해 듣는 이야기들이 꽤 흥미롭게 느껴졌다.
한창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내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믿는 자에게 구원 있으라.”
“!?”
기겁해서 올려다보니 어느새 왔는지 리처드가 키득거리고 있었다.
뒤편엔 한승우가 살짝 어색한 미소와 함께 날 바라본다.
이 아이들과 최근에 대화했던 것도 꽤 오래 전이었다. 사고가 난 뒤로는 정말 한 마디도 못 했고.
그 한을 풀겠다는 듯 리처드가 더더욱 장난스레 말했다.
“요즘 정말 난리더라. 네 약속이 알려지고 나니까 찬양하는 사람들마저 생겼던데? 거의 신이라도 되어 버린 줄 알겠어.”
“농담하지 마세요. 리처드.”
“너무 놀렸나.”
리처드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내 옆의 책상에 기대어 섰다.
언제나 그렇듯 그 깊이를 잘 가늠하기 어려운 녹색 눈동자가 내 쪽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가 기뻐한다는 것 정도는 분명하게 전해져 왔다.
“그만큼 멋진 무대였어. 타티아나.”
만족스러움과 기쁨, 하지만 약간의 부채감과 에르네스트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그가 내게 보일 수 있는 건 가벼운 농담과 표면적인 칭찬뿐이었다.
난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되도록 밝게 웃으려 노력하며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내 곁엔 곧 네 명이나 되는 친구들이 자리잡았다.
그 후로도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곁으로 모여드는 친구들은 점점 늘어났다.
난 모두와 마주하면서도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녀가 교실로 들어왔다.
“안녕.”
짤막한 인사 한 마디뿐이었지만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기기엔 충분했다.
그녀도 나만큼이나 이 화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 속에서 난 지금 제일 먼저 그녀를 끌어당겨야 하는 건 나라는 걸 깨달았다.
“어서 와요, 아나스타샤.”
친구들 사이에서 날 발견한 아나스타샤의 눈은 잠시 커졌다가, 곧 포근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