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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850화 (850/1,277)

##  850화

가까이에서 표정을 보며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전화로 이야기하면 목소리가 더 가깝게 들린다.

물론 스마트폰의 통화 품질로는 들을 수 있는 부분이 한정적이다.

그럼에도 난 그 속에서도 미세하게 느껴지는 진동들을 파악하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감정과 기분 등을 세심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의 목소리는 일견 씩씩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가 은근한 긴장을 느끼고 있다는 건 숨길 수 없었다.

난 왼손을 꼭 쥐며 말했다.

“오늘 수술이라고 들었어요.”

- 내가 말했던가?

“아뇨.”

난 태연하게 그렇게 말했고 에르네스트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를 그 병실에 데려다 놓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치료 경과를 보고받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지금 그리 중요치 않다.

“수술 후에 뵙기로 했지만…… 그냥 기다릴 수 만은 없어서 전화했어요.”

그가 수술 전에 아무말도 안 한 것에 대해 내 쪽에서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 정도가 내가 지킬 수 있는 선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호흡에 집중했다. 만약 에르네스트가 이마저도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빠르게 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점차 느려지는 호흡에서 그가 긴장을 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난 이 전화가 그리 나쁘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비로소 조금 여유를 가지고 물어볼 수 있었다.

“컨디션은 어떠신가요?”

- 의사가 그러더라고 10점 만점에 12점인 컨디션이라고.

“그 정도로 말씀하신 거라면…….”

- 그렇지? 내가 느끼기에도 괜찮은 것 같아.

수술하기에 적당한 시점이 왔다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난 폐부를 찌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가 그 상태로 괜찮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받아들이기 어렵다.

모든 걸 신뢰하고 기도하며 잘 되길 바라야 한다는 건 알지만, 여태껏 그래 왔던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무너지는 걸 직접 봤던 난 지금 그만한 자신을 가지기가 너무 힘들었다.

정신이 조금 약해졌음을 느낀다.

무대에 섰었던 때처럼,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기도를 모을 때처럼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나도 모르게 너무 힘이 들어간 손에서 힘을 조금 풀며 천천히 이야기를 하려는데, 에르네스트가 먼저 말했다.

- 나 정말로 괜찮아. 그러니까 믿어도 돼.

그 역시 내 소리를 유심히 듣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내 어조에서 묻어 나오는 불안. 그것이 조금이라도 그에게 전염되었을까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전화를 안 하는 편이 나았다.

난 급하게 마음을 추스르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전 지금이라도 가 봐야 하는 게 아닐까 해서…….”

- 이미 여긴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야. 부모님도 선생님도.

“아, 그런가요…….”

지금 그의 곁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를 하고 있을 테고, 그 사람들의 염원은 내 것보다 더 강하겠지. 그럼 역시 가만히 있는 게 나았다.

여러 생각이 들어서 어색하게 중얼거리던 차에, 에르네스트가 덧붙였다.

- 그러니 나중에 한가할 때 시간 내줘.

많은 사람들이 주변이 있다지만, 그는 내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지금 가장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였다.

때문에 아무도 없이 조용할 때, 그 혼자서 불안과 긍정의 혼탁을 느끼고 있을 때 연주자로서 믿고 의지할 사람으로 그는 날 택했다.

그렇게 의지해 온다면 난 당연히 지지해 줄 수 있었다. 그 무엇보다 강하게.

- 내줄 거지?

“물론이죠.”

강한 확신과 약속을 담아 답하자 에르네스트의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웃음기마저 서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 그래, 그럼 됐어. 지금은 이렇게 전화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고마워.

어쩌면 그가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난 마지막으로 이 전화로 했어야 할 말을 전했다.

“반드시 잘 될 거예요.”

난 무작정 잘 되리란 말을 좀처럼 쓰지 않는다.

근거 없는 믿음이 이루어질 정도로 세상이 친절하지 않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신은 난해하지만 심술궂지 않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난 신이 난해하고 심술궂기까지 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난 배신감을 느끼면 느꼈지 다시 신과 운명을 믿고 따를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지 음악을 다룰 뿐인 나로선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

무대에 오르고 전화를 하고 기도를 한다.

내가 이곳에 왜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마저 모두 무너지는 것 같은 끔찍한 어둠 속에서 난 다시 한번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에르네스트의 회복에 단 한 줌이라도 기여가 된다면, 여한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난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2시간쯤 지났을 무렵,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에르네스트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내용의 보고였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난 의자 위로 축 늘어지며 간신히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꼼짝도 못 할 것 같은 탈력감 속에서 갑자기 졸음이 뇌리를 덮쳐왔다.

뭐든 상관없었다. 난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에르네스트의 수술 성공 소식은 아침 뉴스부터 시작해서 온 매체를 뒤덮었다.

러시아 공로 예술가이자 촉망받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주목받는 에르네스트의 소식은 하나하나가 특종감에 가까웠다.

그중 발 빠른 언론이, 수술을 집도한 의사를 인터뷰했다. 나도 얼굴을 알고 있는 의사였다.

그 의사는 차분한 어조로 자신들이 한 일을 설명했다.

이 수술의 난이도와 피아노 연주자로서 그에게 필요한 운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의료진이 했던 조치와 노력들.

그 어조는 담담했지만 난 이 사람이 에르네스트를 위해 진심으로 집중하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감사를 표하며 난 몇 번이나 봤던 인터뷰를 껐다.

학교에 도착하니 교실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타티아나! 뉴스 봤어? 에르네스트 수술 성공했대!”

“재활은 좀 걸릴 거라고 하는데, 그 천재 독종이 그것도 못 하진 않을 테니까. 안 그래?”

“그치, 재활이 문제겠어?”

방금 뭔가 너무한 말이 들렸던 것 같은데,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 역시 이 애들과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인대 수술에서 이어지는 재활이 정말 팔을 새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고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그것을 견뎌 내지 못하는 미래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는 반드시 철저한 노력 끝에 돌아와 줄 것이다. 그런 믿음만으로도 난 기쁘게 웃을 수 있었다.

어제만 하더라도 반에선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조금 자중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정말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그 안에서 바르바라가 제안했다.

“오늘 오후 스케줄 다 끝나고 우리 반은 단체로 에르네스트 병문안 가 보는 건 어때?”

갑작스런 제안이었지만 모두가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로 들떠 있는 지금 이만큼 확실한 이야기도 없었다.

물론 조심스러운 목소리도 있었다. 라리사가 살짝 끼어들며 물었다.

“괜찮을까? 안정을 취해야 할 텐데.”

“바로 전화해 보지 뭐.”

행동력이 빠른 바르바라는 곧장 구세프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선 에르네스트의 상태를 묻고, 병문안 허락까지 일사천리로 받아냈다.

막상 병원과 다이렉트로 연락이 가능한 내가 아무것도 못 하고 그냥 구경만 해야 할 정도였다.

시간을 얻어낸 바르바라가 모두에게 물었다.

“다들 저녁에 약속 없지?”

“있어도 빼야지. 근데 12명은 너무 많은 것 아니야?”

“아, 내가 일전에 갔었는데 엄청 넓어. 괜찮을걸.”

“그럼 다 가는 걸로.”

일반적으론 병실이 그렇게 크지 않으니 이 중에서 대표만 몇 명 추려서 가게 되겠지만, 앞서 병문안을 간 적이 있는지 안드레이가 괜찮다고 하자마자 자연히 모두가 가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우르르 모여 머리를 맞댄 친구들 사이에선 선물은 뭘 할지, 이벤트라도 해 줘야 하는 건지 의견이 많았다.

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옆에서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발렌티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피유, 하고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에르네스트는 친구들과 그리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둥글어지고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여 왔고, 그것이 지금에 와서 친구들을 이렇게 열성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의 어깨를 톡톡 쳤다.

“저희는 뭘 가지고 갈까요?”

“글쎄?”

시끌시끌한 친구들을 두고 우리 세 명도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차트를 든 의사가 에르네스트의 팔에 부목과 붕대로 한 반깁스를 살피며 물었다.

“느낌은 어떻습니까?”

“괜찮네요.”

“불편하진 않고요?”

“불편하기야 하죠.”

하지만 그 목소리를 불만이 아니라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일단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아직 팔꿈치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위화감이 꽤 남아 있었지만, 힘을 주면 분명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사는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일단 이 상태로 2주 정도 지내시면서 그사이 원한다면 통원 치료도 가능하시겠지만…… 되도록 입원하고 계시길 권장드립니다. 그리고 그 후엔 실밥을 풀고 석고로 굳히는 깁스로 교체할 예정입니다.”

“깁스를 꽤 오래 해야 하겠군요.”

“안전성이 중요하니까요. 피아니스트들은 과격한 중량을 들진 않지만 순간적으로 빠르게 움직일 때 걸리는 힘은 생각 이상으로 강해서…….”

그저 수술하고 치료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사는 확실하게 피아니스트로서 활동하는 데에 생길 만한 문제들을 모두 염두에 놓고 치료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를 믿고 있는 에르네스트는 성실하게 그 정보들을 모두 머릿속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마친 의사는 차트를 탁 덮더니 말했다.

“오늘은 면회가 있습니다. 반 친구들이 찾아온다 하더군요.”

“친구들? 누구요?”

“전부 다라고 들었습니다.”

“……너무 많지 않나?”

약간 당황한 에르네스트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의사는 낮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열이 있거나 다른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니 안정에 큰 문제가 있진 않으시겠죠. 그래도 혹시라도 팔을 만지거나 하진 말라고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정도야 다들 알겠죠.”

“하하, 그래도 말입니다.”

그렇게 웃으며 의사는 나갔다.

아직 오전 10시였다.

어제 수술을 마치고 약기운에 잠들었던 에르네스트는 너무 오래 자서 정신이 말짱했다. 그런데 병문안은 그럼 언제지?

그렇다고 거꾸로 전화를 걸어서 언제 오느냐고 묻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에르네스트로선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기다리는 내내 그가 할 일은 음악을 듣거나 쓰는 것뿐이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에르네스트는 시간 감각을 잊고 있었다. 그저 때에 맞춰 검사를 하거나 식사를 하고 남은 시간은 전부 오선지에 쏟아넣었다.

그렇게 그가 넘긴 오선지가 30장쯤 되었을 때였다.

“면회입니다.”

병실 앞의 경비가 문을 똑똑 두드렸고, 그 뒤로 반가운 얼굴들이 들어왔다. 모두 피아노과의 친구들이다.

그중엔 그전에 병문안을 왔던 친구들도 있고 아닌 친구들도 있었다.

아마 상태가 워낙에 심각한지라 쉽게 오지 못했다가 이번에 희소식이 들리자 비로소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올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그 사이에서 타티아나도 뒤편에 끼어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화색을 띠었다.

타티아나도 어색한 미소를 보인다.

“어서 와. 모두들.”

“야, 에르네스트. 몸은 좀 어떤 건데?”

그 말을 시작으로 모두들 침상 주위로 모여들었다.

각자 가지고 온 선물들을 주기도 하고 위로와 격려의 말들을 전해 온다. 가끔은 장난을 치는 녀석들도 있었다.

“간만에 석고에 예술 좀 하려고 했는데, 이게 뭐야. 붕대네.”

“미친놈, 아예 붓을 가지고 왔네.”

“기왕에 하는 거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

안드레이는 낄낄거리면서 붓을 흔들었다. 피아니스트인지 화가인지 모를 모습이다.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2주 후엔 석고로 바꾼다고 하니까 그때 또 오든가.”

“……뭐? 그게 더 심한 거 아니야? 왜 그때 그렇게 바꾸는데?”

“지금은 아직 수술한 자리가 안 붙었잖아.”

“아, 그런 건가.”

이렇게 심각한 부상을 볼 일이 잘 없는 친구들은 치료 계획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잘 몰랐다.

물론 에르네스트도 잘 몰랐었던 일이지만, 오늘 아침에 의사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들었기에 잘 설명해 줄 수 있었다.

치료와 회복에 대해 이야기를 할수록 친구들은 놀라워하기도 하고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는 걸 깨닫는지 진지하게 듣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도 에르네스트는 계속 타티아나를 살폈다.

전화로 이야기를 들을 땐 멀리 있어도 정말 가까이인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옆에 친구들이 하도 많다 보니 가까이에 있는데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나.’

그래도 에르네스트는 조바심 내지 않았다.

언젠가 한가할 때 오라는 약속을 타티아나는 반드시 지켜 줄 테지. 그건 꼭 지금이 아니라도 좋았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지금 다른 친구들에게 충실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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