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1화
12명이나 우르르 몰려갔으니 당연히 복잡하리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처음엔 당연히 에르네스트에게 제일 많은 관심이 향했지만, 그가 온전한 정신으로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선 수술 결과와 치료 계획 등을 차분하게 설명하는 것을 보자 다들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는지 점점 떠들썩해졌다.
“자자, 그럼 선물 수여 시간 있겠습니다.”
손에 든 건 얼른 줘 버리겠다는 듯 바르바라가 말하며 에르네스트에게 상자를 건넸다.
에르네스트는 당황해하면서도 한 손으로 그걸 받았다.
“고마…….”
“나도 여기.”
“나도.”
그 뒤로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의 앞으로 선물들이 향했다.
심지어 몇몇 남자애들은 무릎께에 대충 던지기도 했다. 직접 주는 건 쑥쓰러웠던 걸까.
그래도 혹시 팔에 맞기라도 할까 봐 난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라보았다.
물론 다들 나만큼이나 신경을 쓰고 있으리라.
나도 준비해 온 선물을 침대 옆에 살짝 내려놓았다.
12명의 선물이 갑자기 쏟아지자 에르네스트는 정신도 잘 못 차리는 것 같았다.
“이게 누구 거였지?”
에르네스트는 빨간 포장지로 싼 상자를 들고는 중얼거렸다.
기억력이 어마어마하게 좋은 그도 한 번에 다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를 그렇게 두고 친구들은 마치 이젠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산만해지기 시작했다.
몇몇은 창가로 가서 이 병실의 뷰에 감탄하기도 하고, 또 몇몇은 아예 텔레비전을 켜고는 뉴스 내용에 따라 이야기하기도 했다.
넓은 병실은 각자 흩어져서 돌아다녀도 될 만한 크기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계속 에르네스트 옆에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안드레이는 언제 가지고 왔는지 트럼프 카드 뭉치를 꺼내며 에르네스트에게 제안했다.
“저 옆에 보니까 먹을거 많더라. 그거 걸고 나랑 블랙잭 하자.”
“나도 끼워 줘.”
다른 아이들도 흥미를 보였고 리처드와 한승우도 그 자리에 끼었다.
남자애들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담소나 나눌 생각은 일절 하지 않고 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에르네스트는 황당한 듯 물었다.
“블랙잭? 뭘 어떻게 하게?”
“네가 딜러 하면 되잖아.”
“병문안 와서 환자한테 딜러를 시키는 건 대체 무슨 경우냐?”
난데없이 몰려와선 선물들을 마구 건네주고는 이번엔 둘러싸고 앉아서 블랙잭 딜러를 강요하는 모습에 에르네스트는 실소를 흘렸다.
그가 병문안 선물로 받았던 과자나 음료 등은 여기 있는 친구들 모두에게 잔뜩 나누어 주어도 남을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게임을 하잔 이야기를 듣고도 그냥 내어 줄 정도로 싱거운 사람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가 앉아 있는 침대를 놓고 양옆으로 두 사람씩 블랙잭 게임판이 벌어졌다.
세부 룰도 무언가 정해 놓고 하는 것 같았는데, 다들 표정이 꽤 진지했다.
“…….”
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그간 내가 병문안을 왔을 땐 이보다 훨씬 더 늦은 한밤중이어서 어두웠고, 넓은 병실의 분위기도 적막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밝고 떠들썩했다.
바르바라와 안드레이 등 친구들은 지금 일부러 더 활기차게 굴려고 노력 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에너지가 이 병실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카드 게임을 하고 있는 에르네스트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표정도 밝아졌다.
난 에르네스트에게 게임을 하자고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
얼굴을 보고 잠깐 이야기하고는 돌아갔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앞으로 간단한 게임 정도는 준비해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도 내기라면 꽤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마침 딜러로 블랙잭에 임하는 에르네스트가 이겼는지 안드레이에게 무언가 내놓으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굉장히 즐거워 보인다.
‘앞으로도…….’
에르네스트 주위에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는 음악적 공부를 공유하는 파트너로서 날 신임하고 있었지만, 나 말고도 이렇게나 많은 연주자 친구들이 그가 돌아오길 바라고 있었다.
이것이 정말 큰 힘이 될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나스타샤도 내 근처에서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말은 않고 있지만 그녀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언젠가 우리 세 명은 다시 한번 진지한 이야기를 해야 하겠지.
하지만 적어도 그때가 오늘이 아니라 미룰 수 있다면, 오늘만큼은 반 친구들이 만들어 준 이 분위기 속의 한 사람으로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블랙잭 게임이 몇 판 진행되고,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두어 번 바뀌었을 때였다.
우리가 막 도착했을 때도 거의 저물어 가던 해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고 창밖으로 모스크바의 야경이 하나둘 빛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그 풍경을 우리는 하나둘 인식하고는 서서히 돌아갈 채비를 했다.
“슬슬 가자 우리. 에르네스트도 쉬어야지.”
“그래, 지금 편하게 있어야 할 때잖아.”
태연하게 그런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모습에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썼다. 이미 병실은 한껏 어질러져 있었다.
침대 앞에 잔뜩 놓인 카드와 옆의 의자들, 선물더미들 등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대로 그냥 가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친구들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전부 대충대충이었다.
자기 카드들을 챙긴 안드레이가 다른 건 알 바 아니라는 듯 말했다.
“다음에 또 온다고 약속은 못 하겠지만 어쨌든 잘 있어. 에르네스트.”
“솔직하게 말하면 뭐든 괜찮은 줄 아냐?”
물론 안드레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꾸했다.
“그 전에 빨리 나아서 퇴원하란 말이야.”
장난이나 계속 치던 안드레이가 건넨 위로의 말에 에르네스트의 표정도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작게 무언가 투덜거리더니 여전히 무언가 잔뜩 쌓여 있는 옆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이거 가져가.”
판돈으로 꺼내 놨던 과자와 음료수 들이었다.
에르네스트가 게임을 워낙에 잘해서인지 4명을 상대로 하면서도 그는 판돈을 거의 잃지 않았다.
그걸 마지막에 에르네스트는 하나씩 나눠 주었다.
음료를 받아 쥔 안드레이가 물었다.
“이걸 왜 주는데?”
“어차피 나 혼자 다 못 먹어. 가져다주신 분들도 병문안 오는 애들 주라고 했어.”
원래 당분이나 염분이 많은 이런 간식들은 환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방문자를 위한 것에 가깝긴 했다.
에르네스트는 간식을 즐겨 먹는 편도 아니었고.
손에 집히는 대로 과자들을 건네주자 되레 가져온 선물보다 더 많이 가져가는 것처럼 되었다.
이런 물물교환은 언제라도 환영이라는 듯 바르바라가 웃으며 말했다.
“할로윈이 조금 일찍 왔네.”
“제드 마로스, 저는 착한 일 많이 했는데 더 주시면 안 될까요.”
“할로윈인지 크리스마스인지 하나만 해.”
에르네스트는 장난치는 친구들을 보며 눈살을 찡그렸지만 그래도 그 손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중간에 에르네스트는 내 쪽으로 눈짓을 하기도 했다. 과자를 받아 가라는 것 같다.
하지만 난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그냥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분이었으니까.
그렇게 밖이 더 어두워지고, 돌아갈 준비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이제 12명이 다 돌아가야 한다고 누군가 에르네스트에게 말을 해야 했다.
딱히 곤란한 건 아니었지만 누구 먼저 입을 열지 않아 침묵이 흐르던 찰나, 갑자기 바르바라가 제안했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야. 갑자기 우르르 왔다가 우르르 가면 에르네스트가 외로워할지도 모르겠다. 그치?”
“?”
우리가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여기에 계속 있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에르네스트도 안다.
외로움을 탈 수도 있겠지만 그는 절대 그런 걸 내색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외로움 운운하는 말이 놀리는 것처럼 들렸는지 에르네스트가 인상을 썼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그쪽은 보지도 않고 이어 말했다.
“우리 절반씩 나눠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사람들이 먼저 가는 걸로 하자. 진 쪽은 5분 더 있기.”
아예 구체적인 계획이 나왔다. 에르네스트는 더 이상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분명하게 반대 의사를 보였다.
“바르바라. 그런 짓을 대체 왜 하는 건데?”
“저번에 우리 할아버지 병문안 갔었는데 되게 외로워하시더라고 그래서…….”
“잠깐,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12명이 나눠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대하려다가 본전도 못 찾은 에르네스트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더 이야기가 길어지면 할아버지가 아니라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른다고 직감한 것 같다.
난 바르바라가 제안한 이야기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금 여기 12명의 친구들은 이 병실에 활기를 가득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두 한꺼번에 휙 사라지듯 가 버린다면 혼자 남게 될 에르네스트가 느낄 허무함도 클 테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본다면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몇 명씩 돌아가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물론 남자애인 에르네스트는 그런 걸 신경 쓴다는 것 자체에 불만이 많은 것 같았지만, 우린 이미 곳곳에서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내 앞에도 한 명이 손을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
“타티아나.”
“……예?”
내 이름을 부르는 리처드의 눈빛이 번뜩인다.
그의 손짓에 따라 얼떨결에 주먹을 쥔 채로 손을 들어 올렸고 그 어정쩡한 자세로 난 굳어 버렸다.
건반을 만질 때와 달리 내 손은 이럴 때 제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물론 리처드는 전혀 봐주지 않았다. 기습적으로 승리한 그는 기분좋게 웃었다. 당황한 내가 항의했다.
“뭐, 뭔가요 갑자기?”
“가위바위보 이겼으니까 난 집에 가야지. 넌 더 남아 있어야 하고.”
“예?”
“역시 너랑 하면 이길 수 있을 줄 알았어.”
그제야 나는 나 역시 멀리서 관망하는 게 아니라 이 가위바위보에 참가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나 아니면 발렌티나와 할 생각이었는데…… 리처드는 굳이 이기겠다고 날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살짝 기분이 안 좋다. 왜 나랑 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거지?
“리처드. 지금 여기에서 가위바위보를 가장 못 하는 사람으로 절 짚은 건가요?”
“다른 종목이었어도 마찬가지야.”
“…….”
리처드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도 내기 운이라면 정말 안 좋은 편이었지만, 난 그와 막상막하였으니까.
더 할 말 없다면 되었다는 듯 그는 휙 물러섰다.
“아무튼 더 있다가 와. 난 간다. 어라, 저 녀석도 이겼네.”
내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가 버린 그를 보다가, 난 여전히 쥐어져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게임에서 진 건 살짝 기분 상하는데, 5분 더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또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묘한 균형이 내 기분을 왔다 갔다 하게 만들었다.
다시 앞을 바라보자 바르바라를 위시로 한 6명이 이미 가방을 메고 있었다.
“자 그럼 6명의 승자들은 먼저 집에 갑니다. 남은 6명은 에르네스트가 외로워하지 않도록 잘…….”
“헛소리하지 말고 갈 사람은 가!”
“어머, 무서워라. 빨리 가야겠네.”
참지 못한 에르네스트가 윽박지르자 바르바라가 깔깔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6명이 가고, 6명이 남았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나스타샤도 발렌티나도 다 졌는지 남아 있었다. 발렌티나는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가 아직 있다는게 의외였다.
그녀는 동전던지기 같은 운으로 하는 게임에도 강한 편이었는데, 이번엔 어떻게 졌나 보다.
“…….”
5분간 더 있기로 한 약속을 충실히 지키는 건 좋지만, 아까 놀던 것도 다 정리하고 이렇게 있자니 할 게 없었다.
묘하게 어색한 가운데에서 안드레이가 물었다.
“6명이서 뭐 해 줄까? 에르네스트.”
“……제발 나 좀 그만 괴롭히고 그냥 가라. 응?”
“그러니까 가기 싫은데.”
“…….”
안드레이는 그냥 에르네스트를 놀리는게 재밌나 보다…….
아무튼 이렇게 인원이 적어지자 나도 멀찌감치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침대 근처 가까이로 다가갔다.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에르네스트 주변으로 모여든 우리는 아까보단 조금 더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드레이와 에르네스트가 농담을 주고받는 걸 지켜보는 게 거의 전부였지만, 그런 것 만으로도 충분히 안심이 되고 즐거웠다.
5분이 더 흘렀다. 시간에 딱 맞추는 것도 너무 매정하지 않나 싶었지만, 안드레이는 이럴 때일수록 더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듯 말했다.
“자, 그럼 다음 가위바위보 하자.”
“뭐야, 이제 가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한 번 게임을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12명을 반으로 나누어서 각각 돌아가는 건 줄 알았는데, 안드레이는 남은 6명도 다시 반으로 나누어서 또 3명이 5분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최후의 한 명을 정하는 건 그렇게 하면 되겠지만…… 굳이 그래야 하는 걸까?
다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제 그만하고 다 돌아가자고 말하진 않았다.
다들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우리도 할까?”
“그래요.”
내 상대는 라리사였다.
아깐 리처드가 너무 멋대로 굴어서 당황한 나머지 져 버렸지만 이번엔 집중할 수 있었다.
난 신중하게 세 가지의 수 중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또 졌다.
가위바위보는 집중하거나 신중하게 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 우리도 간다. 너희는 5분 더 지키고 와.”
“이렇게 가도 되는 건가…… 그, 안녕. 다음에 봐.”
다시 승자들이 손을 흔들며 떠나갔고, 이젠 3명만 남게 되었다.
연속으로 2번 진 우리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 왜 또 졌나요?”
“그러게.”
“가위 낼걸.”
나와 아나스타샤, 발렌티나는 중얼거리다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폭소를 터뜨렸다.
왜 갑자기 웃음이 나오는지, 그런 이유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 역시 우리를 보더니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