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2화
우리 네 사람이 이렇게 한 공간에 모인 건 얼마나 오랜만의 일인지 모른다. 항상 누군가가 바쁘거나 빠지기 마련이었으니까.
발렌티나가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남으니 기분 이상하네. 나만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조용히 맞장구치는 아나스타샤의 목소리엔 어두운 기색이 깔려 있었다.
역시 지금 우리가 마지막으로 남은 것에 대해 마냥 재미있어하기만 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쾌활한 어조로 농담을 던졌다.
“우리 과에서 공식적으로 운 나쁜 세 사람이 너희들이겠네.”
2연패 한 사람들의 모임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으니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였다. 에르네스트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제일 운 나쁜 게 나일 테고.”
9명의 목소리가 사라지면서 점차 식어 가고 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그냥 웃으며 넘기기엔 너무 무거운 농담이었다. 특히 나와 아나스타샤에겐. 발렌티나 역시 어쩔 줄 몰라 했다.
몇 초간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자 에르네스트가 빠르게 사과했다.
“내가 실언했어. 미안.”
“아니…… 어떤 의도인지는 이해했으니까…… 괜찮아.”
아나스타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전부터 에르네스트가 견지하던 입장은 명확했다.
모든 건 자기 운이 나빠서 생긴 일이니 죄책감 같은 건 절대 가지지 말란 것이었다.
지금 한 말 역시 그 입장의 연장선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농담이겠지.
그는 끝까지 모든 것이 자기 탓임을 분명하게 하고 싶은 것 같다. 나나 아나스타샤가 딴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어떤 마음인진 알겠다. 내가 에르네스트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을 테니까. 더 하면 더 했지 절대 못 하진 않았을 터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해서, 우리가 편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배려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친구로 그를 더 걱정시키고 싶지 않을 뿐이다.
“…….”
4명이 남아서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분위기가 너무 어색해졌다.
난 씁쓸한 눈빛으로 내 사랑스러운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걱정 없이 웃고 떠들며 놀 수 있는 장소에서 기쁜 일로만 모인 것이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에르네스트 우리 세 사람의 사이는 이미 여유 있게 서로를 대하기엔 문제를 너무 많이 겪고 있었다.
평등해지기 어려울지도 모르는 친구간의 저울에 관한 문제라든가, 직접적으로 에르네스트의 사고의 원인이 되었다는 문제라든가.
해결이 난 것도 없는데 바로 해결하기도 어렵고. 심지어 옆에 발렌티나를 두고는 이야기조차 쉽게 할 수 없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아직 이렇게 모이기엔 너무 이른 게 아닐까.
일단 아나스타샤부터 발렌티나와 함께 돌려보내고, 내가 마지막으로 남아서 조금 더 있다가 가야 하나 생각하던 차였다.
우리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발렌티나는 이미 눈치껏 이 분위기를 파악한 지 오래였다.
어색함을 너무나 싫어하는 발렌티나는 우리 주변에 퍼져 있는 안개를 모두 흩날려 버리듯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그, 그래도 수술도 잘되었다 했으니까. 이제부턴 좋은 일만 있지 않겠어? 안 그래?”
깜짝 놀랄 정도로 큰 목소리에 난 그녀를 돌아보았다.
발렌티나의 표정엔 간절한 바람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얘들아…… 우리 지금은 좋은 이야기만 하자. 응?”
발렌티나가 어디까지 아는지, 어디까지 알아도 되는지에 대해선 아직 아무것도 협의된 것이 없다.
우리에겐 보다 많은 이야기가 필요할 테지.
하지만 그것들을 앞질러 예감한 발렌티나는 오늘이 아닌 다른 날을 택했고, 우린 당연히 그녀를 존중해야만 했다.
“알았어요.”
“알겠어, 발렌티나.”
내가 먼저 대답하자 이어 아나스타샤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발렌티나를 방패 삼고 있다는 죄책감이 조금 들기도 하지만, 그 역할 자체를 발렌티나는 자처했다. 우리가 웃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정말 무엇이든 하리라.
난 그 마음을 느꼈기에 무조건적으로 따라 줄 수밖에 없었다.
에르네스트도 즐거웠던 병문안 기억을 이어 나가고 싶었는지 옅게 웃으며 옆에 있는 선물 더미를 가리켰다.
“좋은 이야기라…… 아까 애들이 하도 정신없게 해서 선물 하나도 못 까 봤는데. 이거나 하나씩 까 볼까? 너희들은 이거 뭔지 알아?”
“글쎄? 몰라.”
“나도 우리가 산 것밖에.”
알록달록하게 포장된 선물들은 자연스레 시선과 흥미를 끈다.
이참에 잘 되었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그러더니 이리저리 휙휙 돌려보고는 투덜거렸다.
“이름이라도 좀 써 놓지. 참나.”
아까 모두들 한꺼번에 그에게 줘 버린 탓에 어떤 걸 누가 줬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준 사람이라도 알면 내용물이 얼추 유추라도 가능할 텐데, 에르네스트는 어쩔 수 없이 상자를 몇 번 흔들어 보더니 능숙하게 한 손으로 포장을 풀어냈다.
혹시 도와줘야 하나 싶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가 포장지에서 꺼낸 건 한눈에 봐도 장난감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이건 뭐지. 피젯 토이?”
“한 손으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인가 본데?”
“내가 심심할까 봐 걱정되었나 보네.”
선물은 선물이지만 이런 걸 왜 줬는지 모르겠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상자를 열고 피젯 토이를 꺼낸 그는 곧 한 손으로 그것을 빙글빙글 돌려 보더니 표정을 달리했다.
막상 만져보니 생각보다 재미있는 걸까.
“나중에 재활도구로 써도 되겠다.”
“효과가 있을까?”
“써 보면 알겠지.”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웃더니 개봉한 선물은 다시 옆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다음 선물은 길고 얇은 무언가였다. 포장지만 봐서는 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에르네스트는 추리 게임을 할 생각도 없는지 그냥 열어보았다.
그 안엔 팬더의 눈과 귀를 캐릭터처럼 해 놓은 안대가 들어 있었다. 언제든 편하게 쉬고 싶으면 쓸 만한 제품이었다.
하지만 선물들엔 모두 반 친구들의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편하게 쓰기엔 너무 귀여운 게 문제였다.
에르네스트가 투덜거렸다.
“이런 안대를 누가 써…….”
“진짜 귀엽다! 한 번 써 봐!”
“싫어.”
발렌티나의 부탁에도 에르네스트가 칼같이 거절하자 그녀는 거의 애걸했다.
“제발, 한 번만. 응?”
그렇게까지 보고 싶어요?
그런데 매사 의젓한 그에게 안대를 씌운 상상을 해 보니 나도 그게 보고 싶어졌다. 같이 부탁해 보면 들어줄까?
어쩐지 못 이기는 척 들어줄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멋대로 굴고 싶진 않았다.
대신 난 그가 혼자서 부끄러움을 부담하지 않게 하기로 했다.
“제가 써 볼까요? 어떻게 보이는지.”
난 그가 미처 반응하지 못하는 사이 안대를 낚아채선 내 눈에 썼다.
눈앞이 캄캄해져서 하나도 안 보인다. 빛을 가리는 성능은 문제없는 것 같다.
그렇게 눈을 가리자마자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푸흡.”
“생각보다 너무 귀엽잖아!!”
“그거 그냥 너 가져도 되겠어. 타티아나. 누가 봐도 네 건데?”
어떻게 보일진 모르겠지만 안대 한 번 쓰고 모두를 웃겼다면 이득 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난 여기서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내가 먼저 했으니까 다음은 에르네스트 차례다.
“잠깐…….”
내가 안대를 벗어들고 다가가자 에르네스트는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는지 저항하려 했지만, 내가 이번엔 조금 빨랐다.
당혹스러워하는 눈동자를 못 본 척 안대를 올려놓고 끈을 당겨 귀에 걸었다.
무언가 방어하려던 에르네스트는 눈을 가려놓으니 얌전해졌다. 난 살짝 물러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선물하신 분은 에르네스트에게도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나 봐요.”
“…….”
팬더 안대를 쓴 채 시무룩하게 기대어 있는 에르네스트를 보니 조금 너무했나 싶었지만, 그래도 상상했던 것보다 더 귀여워서 놀랐다.
옆에 있던 발렌티나가 호들갑을 떨면서 스마트폰부터 꺼내들었다.
“잠깐만 그대로 있어 봐.”
“사진 찍으려는 거잖아!”
에르네스트가 버럭 화를 내며 안대를 벗어 버렸다. 우리는 당연히 또 웃고 말았다.
그 후로도 계속 선물 개봉이 이어졌다.
친구들이 가져 온 각양각색의 센스 있는 선물들은 어느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받는 사람이 즐거워하길 바라는 마음을 잔뜩 느낄 수 있었다.
우리들은 그것들을 확인하면서 이야기와 웃음을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우리 세 사람의 선물이 남았다.
“그게 내 거야.”
붉은 포장지로 싸인 박스를 에르네스트가 들자 발렌티나가 말했다.
그 안에 든 것은 발렌티나가 고심해서 고른 콜라겐 젤리였다.
“콜라겐이 관절이나 인대에도 좋다고 하더라고. 음, 피부도 좋아지고.”
“피부는 상관없는데.”
“어쨌든 좋은 거니까! 먹어서 나쁠 건 없잖아!?”
발렌티나가 빽 소리를 지르자 에르네스트가 미소를 지었다.
“당장 하나 먹어야겠네.”
에르네스트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곧장 젤리 스틱 하나를 까선 입에 넣었다.
그가 스틱 하나를 다 먹기까진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짐짓 무심하게 말하긴 했지만 발렌티나가 정말로 그를 걱정해서 이런 선물을 준비했다는 건 분명히 그에게 전해진 것 같다.
“잘 먹을게. 앞으로 낫는 데에 큰 도움 될 것 같아. 고마워 발렌티나.”
“응…….”
실제로 콜라겐이 어떤 작용을 하는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가 형태를 갖춘다면 바로 저런 모양이겠지. 난 이 기도가 직접적인 효능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고 싶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다음으로 상자를 집어 들더니 먼저 말했다.
“이건…… 네가 줬었던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
“맞아.”
아나스타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만큼이나 안에 든 선물도 심플했다. 바로 케이블이 긴 스마트폰 충전기였다.
“저번에 보니까 선이 짧아서 충전 중엔 폰 못 쓸 것 같길래.”
“정확해. 진짜로. 너 천재냐?”
에르네스트는 진심으로 놀랐는지 충전기 케이블을 쭉 늘려 보고는 그 길이에 다시 한번 감탄사를 금치 못했다.
약간 허탈한 웃음마저 흘리며 그가 말했다.
“난 멍청하게 그냥 배터리 다 되면 충전시켜 놓곤 언제 되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선이 길면 되잖아.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필요했던 것 같네.”
“진짜로 필요했던 거야. 잘 쓸게. 정말로.”
그도 평소였다면 당연히 불편한 걸 바꿀 생각을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여력도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나야말로 그간 자주 병문안을 오면서도 그가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 대신 아나스타샤가 알아주어서 다행이었다.
“마지막이네.”
모든 선물들을 다 열었으니 마지막은 내 것이었다.
난 조용히 그가 포장지를 다 열기까지 기다렸다가 내용물이 보이자 설명해 주었다.
“알렉산드라가 전해 달라며 맡긴 이번 연주회 CD예요.”
“아. 그걸…… 녹음한 건가?”
“녹음 자체는 방송으로 내보내기 위해 했었으니까요.”
커버도 없는 회색 CD는 얼마 전 알렉산드라에게 받았다.
그녀는 만약 필요하다면 더 제대로 만들어서 기념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기념의 목적으로 필요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건 제 선물이 아니고…… 제 선물은 그 밑에 있는 CD플레이어예요.”
에르네스트는 음반을 앞뒤로 돌려보더니 내려놓고 그 밑에 있는 더 큰 상자를 꺼내 들었다.
작은 포터블 CD플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마트폰이 널리 퍼진 요즘은 음반을 쉽게 재생시키기도 어렵다. 특히 이런 병실 같은 곳에선.
이 CD플레이어는 연주회 CD뿐만이 아니라 다른 음반들을 듣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골랐다.
나름대로 괜찮은 선물을 한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에르네스트는 내려놨던 음반도 들어 보이더니 내게 말했다.
“난 음원도 네 선물이라고 생각해. 맞잖아?”
“…….”
“고마워.”
아나스타샤와 내가 무대에 올랐던 것을 그가 제대로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선물이라며 기분 좋게 받아 준 것이 난 너무나 기뻤다.
에르네스트는 주위를 휙 보더니 말했다.
“갑자기 부자 된 기분이네.”
“그러네. 뭔가 많아.”
12개나 되는 선물들에 둘러싸인 그는 확실히 지금 부자였다.
마음으로 가진 것이 만족스러울 정도로 많다는 걸 그는 웃음으로 보여 주었다.
“이걸 나중에 어떻게 돌려줘야 하나…….”
“누가 뭘 줬는지도 모르면서.”
“그건 그렇네.”
기분이 좋은지 어깨를 살짝 돌려보기도 하고, 다친 팔을 괜히 매만지면서 그가 말했다.
“아무튼 팔이 좀 괜찮아지고 나면 피아노는 못 치더라도 잠깐 퇴원해서 학교에 가 보긴 해야겠어. 봐야 할 사람들이 많네.”
학교 친구들은 물론이고 전교의 학생들, 선생님들도 모두 그를 반겨 줄 것이다. 난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급하게 움직이는 건 절대 반대였다.
“우선은 치료에 전념해 주세요. 에르네스트.”
“당연히 그래야지. 나중에 말이야. 나중에. 걱정하지 마.”
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몇 번이나 확답하면서 당분간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걸 분명히 했다.
난 그럼에도 걱정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그가 움직여야 한다면 차량 등 이동에 필요한 준비는 내 쪽에서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혹시 필요하다면…….”
거기에 대해 내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 막 설명하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내 전화벨이 울렸다.
타이밍을 딱 깨뜨린 그 소리에 난 살짝 귀찮음을 느꼈지만, 빅토르로부터 온 전화라는 걸 보고는 바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