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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853화 (853/1,277)

##  853화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자마자 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빅토르, 미안해요. 아직 면회 중이에요.”

- 그렇습니까? 죄송하지만 지금 아가씨 쪽으로 연락을 취해 온 곳이 있어서. 그럼 언제쯤…….

“곧 끝나요. 그러니 이따가 이야기해요.”

- 아가씨, 잠깐만.

아버지나 오빠에 대한 일이라면 모를까 다른 곳에서 내게 오는 일들을 지금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면 빅토르는 내 상황을 이해하고 전화를 끊어 준다.

하지만 이번엔 그가 판단하기에 무언가 중대사인 모양이다.

그는 전화를 끊지 않고 날 붙잡더니, 갑자기 묘한 질문을 했다.

- 친구분들 아직 옆에 계시는 거죠?

"예."

- 그럼 지금 말씀드려야겠네요. 연락 온 곳은 러시아 문화부입니다.

문화부쯤 되면 중요한 곳이긴 하다.

빅토르가 전화를 끊지 않고 다시 진지하게 이야기한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난 문화부가 아니라 크렘린에서 연락이 왔다 하더라도 요즘 부쩍 찾는 그런 이유라면 응할 생각이 없었다.

딱히 연주회를 흥미 본위로 분석하려는 의도들을 원천 차단하기 위함은 아니다.

내 개인적인 고집에 가까운 것이었다.

때문에 난 이번에도 내용을 듣지도 않고 낮게 대답했다.

“문화부에서도 취재나 인터뷰 같은 걸 하겠다고 하나요? 모두 거절해 주세요.”

- 그런 이야기였다면 전화드리지도 않았죠.

“……그러면요?”

너무 많이 넘겨짚었나?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문화부에서 날 찾을 이유를 모르겠다.

의아해하며 묻자 빅토르가 빠르게 말했다.

- 아가씨에게 공로 예술가 훈장을 수여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받으실…….

“……훈장이요?”

하지만 빅토르와 달리 내 목소리는 차갑고 느릿하게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었다.

기뻐해야 하는가? 당연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공로 예술가란 위치는 연주자로서 굉장한 명예이자 성취였으니까.

그러나 이번 연주회가 끝난 후 부차적으로 따라붙는 인터뷰나 방송 출연조차 모조리 고사하고 있는 내가 훈장이라고 해서 덥석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 난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해낸 연주자라는 입장보다는 이미 공로 예술가인 에르네스트가 피아노 앞에 못 앉게 된 원인 중 하나라는 입장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에르네스트는 내가 얽매이지 않길 바라지만, 그가 그렇게 모든 것을 자신의 운으로 돌리려 한다는 말인즉슨 이미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뜻과 같았다.

그런 내가 뭘 잘했길래 훈장까지 받아야 하지?

연주회? 그건 에르네스트와 함께 했었다면 훨씬 더 잘 할 수 있었을 터다.

내 시선은 차가운 병실 천장 구석 한쪽에 머물렀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그런 걸까, 신경이 약간 예민해지는 걸 느낀다.

나도 모르게 고드름처럼 차갑고 뾰족한 말이 나가고 말았다.

“제가 왜 그런 걸 받아야 하죠?”

- 받을 만한 일을 하셨다고 판단한 게 아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 판단을 누가 했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 빅토르는 날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겠지.

문화부에서 중요한 훈장을 수여하겠다고 하는데도 마치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신경질이나 내고 있으니까.

나도 더 이상 그에게 오해받을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짧게 대답했다.

“거절해 주…… 아니, 아니죠. 전화번호를 보내 주시겠어요? 제가 직접 거절할게요.”

- ……아가씨. 오늘 바로 결정을 내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뇨, 지금 할게요.”

누가 결정권자인진 모르겠지만, 만약 필요하다면 난 프세볼로트 장관님과 독대해서라도 똑바로 이야기할 각오를 갖추고 있었다.

그 정도 생각도 없진 않다.

난 내가 기분대로 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한 번쯤은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가 연락해야 할 번호를 보내 주세요.”

- 알겠습니다.

다시 단호하게 이야기하자 빅토르는 더 설득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진지한 조언을 건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을 꺾으려 하진 않는 사람이었다.

전화를 끊고 다시 고개를 드니 눈이 휘둥그레진 세 명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타티아나. 방금 무슨 전화야?”

“그게…….”

“훈장이라고 했었는데?”

나가서 이야기하든가, 아니면 중요한 단어는 되묻지 말걸. 모두가 보는 앞에서 너무 많은 말을 했음을 깨닫곤 후회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길 상황이 아니었다. 난 어쩔 수 없이 이야기했다.

“모르겠어요. 문화부에서 제게 공로 예술가 타이틀을 주려는…….”

“그럼 받아야지!”

“뭘 거절할 생각부터 해!?”

생각해 보니 거절하겠단 말도 입으로 냈었구나.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바짝 다가와서 내게 말했다. 혹시라도 내가 정말 거절할까 봐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에르네스트도 물끄러미 날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진짜 거절할…… 아니, 너 정말 진심으로 받을 생각 없구나.”

이 애들은 내가 개인적인 이유로 꽤 이상한 일들을 자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때문에 세 명 다 불안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에르네스트가 대표로 내게 이야기했다.

“그냥 받아. 타티아나. 나도 받았잖아.”

“……저와 에르네스트가 같나요? 전 받을 이유가 없어요. 공로라 할 만한 것이 없는걸요?”

“왜 없어? 이번 연주회도…….”

“그것 때문이라면 더더욱 제 생각은 명확해요.”

예의는 아니었지만 난 일부러 그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이유가 명확해서 훈장을 받는 것이라면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 없다.

난 피아노 연주자로서 높은 궤도에 올라 나 자신의 한계와 세계의 한계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공정한 경쟁에 대해 호의적이며 성취에 따라오는 상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연주회는 여기에서 깔끔하게 매듭짓고 싶다.

그건 내가 이 연주회를 에르네스트에 대한 예우이자 하나의 작품으로서 마무리하고 싶은 방식이기도 했고, 만약 문화부 사람들이 날 에르네스트 다음을 잇는 공로 예술가로 만들 심산이라면 절대 따르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전했다.

“전 그 연주회에 최선을 다한 것으로 만족해요. 그 이상 무언가 받거나 얻어낼 생각은 전혀 없어요.”

“유명세를 탈까 봐?”

“유명…… 그런 것도 있겠네요.”

“그것도 나 때문이야?”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하고 말았다.

사실 이런저런 것들을 떠나서 그것이야말로 가장 강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근본적으로 내가 가지는 두려움과 죄책감. 내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을 속박하게끔 만드는 강박.

난 지금껏 걸어온 발자취를 되짚어보다가, 조용히 이야기했다.

“……에르네스트. 저 지금까지 잘하려고 애써 왔잖아요?”

모든 것이 최선이었다고 하긴 어려웠다.

에르네스트의 일도 세연의 일도. 다른 모든 것들도. 그러나 난 최선을 다하기 위해 늘 고민하고 노력해 왔다.

“끝까지 잘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러고 싶어요.”

난 적어도 이번 연주회에 대해선 이렇게 마무리 짓는 것이 내가 잘할 수 있는 마지막 최선이라 생각한다.

그가 알아주길 바라며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때때로 가차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곧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난 네가 그 훈장을 받는 것으로 끝까지 잘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해. 연주회를 살려낸 것으로 내 명예와 네 명예. 그리고 나아가 문화부의 명예, 우리나라에까지. 네가 세운 공은 명백하니까.”

연주회를 살려냈다는 말이 듣기에 우습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그럼 왜 저만? 아나스타샤는요? 스푸마토 콰르텟분들은?”

“공로 예술가는 한 연주회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야. 네가 올해 한 것들을 돌이켜 봐. 얼마 전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예술감독까지 맡지 않았었어?”

상식적인 답변에 난 말문이 막혔다.

당연히 1년에 한 번 수여하는 공로 예술가 훈장을 그렇게 간단하게 줄 리가 없다.

그간의 모든 활동을 조사한 뒤에 판단할 테지.

그렇게 따지자면 난 송년 연주회 무대에 출연하고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에서 주최한 연주회에도 참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선 빠진 연주자를 대신했으며 이번에도 무대에 섰다.

그런 모든 것에 대한 평가라는 말을 듣고 나니 목에서 힘이 쭉 빠졌다.

이전까지의 모든 노력과 결과를 무의미하다 할 순 없었다.

할 말을 잃은 내가 조용히 있자 옆에서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난 미국에서 상 타 왔는데.”

“그게 우리나라를 위한 공로라 하기엔 애매하지.”

“그건 그렇네.”

아나스타샤는 이번 연주회가 끝난 후에도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고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내가 거의 다 가져가 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괜찮아. 타티아나. 왜 그래? 좋은 일이잖니.”

“아나스타샤…….”

정말 이 정도로 어려운 마음이 들 줄은 몰랐다.

난 콩쿠르 등에서 경쟁하는 상황이었다면 그 상대가 누구든 간에 신경 쓰지 않고 최대한의 역량을 쏟아부어 1등을 향해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주는 대로 받을 수 있는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난감한 눈으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자 세 명 역시 날 보며 비슷한 눈빛을 했다.

이런 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건 에르네스트였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봐 봐. 여기 있는 우리들도 모두 당연히 네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잖아.”

“어떻게 제가 그렇게…….”

내가 중얼거리자 그는 손가락을 딱 튕기더니 명료하게 이야기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봐. 내가 먼저 공로 예술가가 되었고 그다음 네가 따라왔으니까, 그다음은 저 애들 차례인 거지. 네가 받아야 진행이 되는 거야.”

“……진행이요?”

“그래. 난 이깟 직위 별것 아니라고 말할 생각은 없어. 분명 도움이 많이 되니까. 그렇다면 모두 받으면 되잖아?”

공로 예술가 훈장이라는 게 그렇게 받기 쉬운 게 아니다.

물론 그 위로 더 높은 등급의 훈장도 있긴 하지만, 친구 네 명이 모두 공로 예술가가 된다는 건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첫 단추를 끼웠으니 내가 두 번째 단추가 되는 것일 뿐이란 말은, 꽤 괜찮은 이야기처럼 들렸다.

발렌티나가 밝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나중엔 공로 예술가 모임이 되는 건가?”

“이미 그런 커뮤니티가 있기도 해.”

“괜찮네 그거.”

그런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지 세 사람은 모두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나스타샤는 의자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내년에 받을 순서는 나겠네.”

“뭐? 왜 당연한 듯이 너야?”

“나 내년에 활동 열심히 할 생각이거든.”

“너만 열심히 하니? 난 너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할 거거든?”

발렌티나가 발끈해서 대들자 아나스타샤는 여섯 살짜리들이나 할 법한 대꾸는 그만 좀 하라며 핀잔을 주었고, 당연히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늘 좁은 스포트라이트를 향해 달려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또 하나 이렇게 공통적으로 목표할 수 있는 것이 생겼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

물론 이렇게 빠르게 설득될 정도로 내 기조가 서툴고 무르진 않다.

두 번째 단추라면 다음에 달아도 되는 것일 테니까. 굳이 지금일 필요는 없었다.

난 성급해지지 않고 보다 신중하게 상황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내 앞으로, 에르네스트를 상체를 쭉 가까이 해 왔다.

깜짝 놀란 내가 바라보자 그는 빙그레 웃더니 작게 말했다.

“그리고 분명 이번에 넌 굉장히 유명해질 거야. 당연히 난 뒷전이 될 거고.”

“…….”

그 말은 내 우려를 그대로 자극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어린 공로 예술가 피아노 연주자 자리에 에르네스트 대신 날 채워 넣으려는 것이라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거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런 건 전혀 상관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안 받으면 더 유명해질걸?”

그건 또 생각도 못 해 본 일이다. 그냥 거절하면 끝이지 뭐가 더 있겠나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그의 말대로였다.

공로 예술가 훈장을 거절했다간 그 여파가 얼마나 커질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아마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주목받겠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난 중얼거렸다.

“생각해 볼게요.”

“알았어.”

지금은 그 정도로 되었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웃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빅토르가 보내 준 전화번호가 있었다.

난 바로 전화를 걸지 않고 다시 화면을 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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