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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854화 (854/1,277)

##  854화

병문안 자리는 내 이야기를 끝으로 파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 그리고 나까지 우리 세 사람은 다시 가위바위보를 해서 마지막 한 사람을 남겨야 하나 싶었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만 세 명 다 같이 돌아가라고 했다. 그도 꽤 피곤할 터였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집에 갈까?”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안 그래도 괜…… 아니, 부탁할게 그러면.”

다른 날이었다면 셋이서 식사라도 하고 돌아다녔으면 좋았겠지만, 날씨도 안 좋고 지금 놀러 다닐 기분도 아니었기에 오늘은 이만 집으로 가기로 정했다.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도로를 따라 발렌티나를 먼저 내려 주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타티아나.”

“조심히 올라가세요.”

“응. 잘 가. 아나스타샤 너도.”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발렌티나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다음, 아나스타샤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집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갈게. 타티아나.”

그렇게 작별을 고하고 나서도 아나스타샤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잠시 서서 날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인다.

나 역시 그녀에겐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다른 영향 없이 서로에게만 진지하게 집중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걸, 우린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쓰게 웃더니 내게 말했다.

“내일 봐.”

그녀가 내일을 약속해 주었다는 것만 해도 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친구들을 모두 보내고 나니 주변이 고요해졌다.

혼자서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다가, 운전 중인 빅토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마침 차가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섰고, 그가 날 불렀다.

“아가씨.”

“예, 빅토르.”

“전화는 하셨습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내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대답하길 바로 전화해서 거절해 버릴 것이라 했었으니까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난 약간 부끄러워졌다. 그에게 그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해 놓고선 막상 고민 중이었으니까.

“……아뇨. 아직.”

“생각 중이신가 보군요.”

“빅토르. 혹시 제 친구들이 절 설득할 거라고 예상하셨던 건가요?”

내가 고민에 빠지게 된 데엔 당연히 친구들의 비중이 컸다.

만약 혼자서 연락을 받았다면 난 정말로 칼같이 거절하는 쪽으로 결정했겠지.

빅토르가 어디까지 예상하고 있었을지 짐작하며 물어보았다.

그가 모른 척 잡아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그는 예상외로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 옆에 누가 있든 똑같은 말을 했겠지만, 지금 아가씨를 가장 잘 설득할 수 있는 건 친구분들일 테니까요.”

“…….”

빅토르의 말은 꽤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왔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진 않지만, 그는 내가 시야가 꽤 좁아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뭐든 빠르게 결정하지 않길 바라는 듯 보였다.

그런 그에게 난 뭐라고 했더라.

다시 돌이켜보니 정말 필요 이상으로 예민했던 것 같다. 너무 미안해진 난 운전석 쪽으로 다가가 말했다.

“아까…… 제가 경솔하게 말했던 것 미안해요. 괜한 신경질을 내기도 했었고. 이상한 사람이죠 정말?”

룸미러로 힐긋 내 쪽을 본 빅토르는 가볍게 웃더니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야 뭐 원래…… 아차.”

“예?”

“원래 생각이 깊고 현명하신 분이라고 말하려 했습니다.”

“거짓말에 그렇게 성의가 없어도 되나요?”

난 짐짓 힐난하는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그가 농담을 해 주었다는 것을 편하게 느끼고 있었다.

빅토르 역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대화할 수 있다는 것에 흡족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살짝 한마디 덧붙였다.

“그럼 거짓말 아닌 말 하나 하죠. 전 아가씨가 그런 사람이라 좋아하는 겁니다. 사실.”

“그런 사람이 뭐예요 그러니까…….”

“글쎄요?”

글쎄요라니…….

다시 한 마디 할까 하는 찰나, 빅토르가 이어 말했다.

“아가씨는 훈장 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명예가 뭔지 알고, 그러면서 제게 사과도 잘 하실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간 오랜 시간을 함께 다니며 그는 날 지켜봐 왔다.

그만큼 그가 하는 말은 내가 스스로를 판단하는 것보다 더 객관적이고 예리한 부분이 있었다.

난 그의 말을 곱씹어보다가, 가늘게 웃었다.

어렴풋하게나마 그가 내 생각에 근접해서 이해하고 또 존중해 주려 한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항상 고마워요. 빅토르.”

“보람차군요.”

빅토르는 유쾌하게 웃으며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집으로 돌아오니 8시가 다 되어 있었다. 마침 날 마중 나온 예고르가 물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가씨.”

“안 했어요.”

“그럼 유리 님과 루슬란 님도 방금 전 들어오셨으니 함께 식사하시겠습니까?”

“아, 그런가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그리 전하겠습니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고 오늘은 친구들과 다 함께 병문안을 갔다 온다고 전해 놓았기에 이미 다른 사람들은 식사를 다 마쳤겠거니 했는데, 오늘은 모두 다 같이 늦는 날이었나 보다.

먼저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씻은 뒤 식당으로 향했다.

이미 아버지와 오빠는 테이블에 앉아서 무언가 진지한 사업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날 발견한 오빠가 먼저 이야기를 멈추곤 와서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아버지도 내 쪽을 바라보았다.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 하루 잘 보내셨나요? 아버지.”

“그래. 덕분에.”

흐뭇하게 웃으며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일이 잘 되어 가는 걸까. 그런 것이라면 나 역시 기뻤다.

그런데 루슬란 오빠는 뭔가 묘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아까부터 뭔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음? 으흠…….”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내 쪽을 바라보셨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그 질문을 내 쪽으로 넘겼다.

“혹시 기분 좋은 일 없느냐? 타티아나.”

“……예?”

상황을 파악 못 한 내가 멍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 건 아버지였고, 오빠도 아버지에게 물었는데 왜 나한테? 아버지는 실없는 이야기는 잘 하지 않으시는 분인데.

내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아버지는 잠시 날 살피며 무언가 고민하셨다. 그러더니 천천히 말씀하셨다.

“오늘 내게 누군가 와서 말해 주더구나. 네가 러시아 공로 예술가 훈장을 수여하게 될 것 같다고. 혹시 못 들은 이야기라면 지금 내가 괜한…….”

“아뇨, 들었어요.”

“아, 그래. 그렇구나.”

그제야 어찌 된 일인지 이해한 내가 대답하자 아버지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슬란 오빠는 그야말로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무언가 먹고 있었다면 아마 뿜었을 것 같다.

“무, 무슨 훈장?”

“공로 예술가요.”

“열여섯 살이 받을 수 있는 거야 그거?”

나이 제한이 걸려 있는 건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내 나이에 받는 게 평범한 게 아니라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나보다 빠르게 공로 예술가가 된 에르네스트 같은 경우도 있었다.

황당해하는 루슬란 오빠와 달리 아버지는 차분하셨다.

“그게 어떤 의미인진 네가 잘 알겠지. 어떤 힘이 될지도.”

“알아요.”

“난 네가 자랑스럽구나. 정말로.”

난 살짝 가슴이 찌릿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껏 온전히 내 기조와 음악가로서의 고집 등을 이유로 행동해 왔다.

하지만 아버지나 오빠에게 있어 자랑스러운, 그리고 도움이 되는 가족이 되는 것 또한 내게 있어선 강력한 동기 중 하나였다.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멋대로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음속 저울이 조금 더 기울어 간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때였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저울의 추를 모조리 없애 버렸다.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네가 스스로 만족할 수 없다면 마음대로 하려무나.”

“……예? 무슨 말씀이세요?”

놀란 내가 되묻자 아버지는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네가 지난주 무엇을 겪었는지, 어떤 무대에 섰는지…… 곁에 있지 못해 줘서 미안하지만 어느 정도는 들었다. 네 성격상 그걸 온전히 기쁘게 받아들이긴 어렵겠지. 타티아나.”

“…….”

멀리서 전화 통화 정도만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날 상당히 이해해 주고 계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아버지는 다시 짧게 말했다.

“그러니 마음대로 하거라.”

난 물끄러미 아버지와 오빠를 바라보았다.

내가 공로 예술가가 된다면 기뻐해 줄 분들.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마 하시는 일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공로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지금보다 더 많을 테고, 난 이미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와 연이 닿아 있으니 사실 베르체노프를 위해 움직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터였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내 자유와 의지를 우선시해 주셨다.

그건 내가 딛고 오를 수 있는 바람처럼 내 주변을 맴돌았지만, 난 나도 모르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기뻐하실…….”

“난 신경 쓰지 말고. 그리고 어차피 훈장 같은 건 나도 거절한 게 많아.”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내가 보자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리셨다.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정도의 강인함으로 아버지는 내게 약속해 주었다.

“타티아나. 분명히 말하지만 난 네가 그런 걸 받는다고 해서 기뻐하고 거절한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하지 않으니 걱정 말거라. 네가 무엇을 하든 난 자랑스럽고 기쁘니까.”

“……아버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진 알 수 있었다.

그건 내가 정말 대책 없이 막무가내로 굴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만큼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일들을 봐 왔으며 앞으로도 믿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잘 생각해서 결정할게요.”

“그러거라. 내 딸아.”

그 한마디가 가져다주는 견고함은 내가 의지하기에 충분했다.

난 바짝 긴장해 서 있던 등허리에 힘을 풀고, 의자에 기대었다.

지금 난 의지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 충분한 이유와 여유를 가지고 행동해야 했다.

그렇게 약간이나마 여유를 찾은 나는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

다음 날, 오전 수업을 마치고 레슨을 받으러 갔다.

오늘 미하일 선생님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진 분명하게 정해져 있었다. 공로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지.

미하일 선생님은 당연히 제자가 공로 예술가가 된다면 무척이나 기뻐하실 터였다.

선생님을 생각한다면 난 당연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지금 그런 상을 받고 싶진 않다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때문에 난 선생님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볼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레슨 시간이니 혼자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함께 계셨다. 난 두 분 모두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너라.”

“아, 레슨 시간이군.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미하일.”

구세프 선생님은 곧 나가려는지 발걸음을 옮기시다가 말고 문득 날 돌아보고는 씩 웃었다.

“그나저나 축하한다 타티아나.”

“예?”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는다고 들었다.”

이미 소문이라도 난 걸까? 정말 거절했다간 후폭풍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닥쳐올 것 같다.

확정 난 것처럼 말씀하시는 구세프 선생님을 보며 난 고민했다.

사실 그걸 받을지 말지 고민 중이라고 말하면, 엄청나게 혼나지 않을까?

아니면 안쓰럽게 바라보실지도 모르겠다.

“…….”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마음이 쓰리다.

내가 무엇에 얽매이고 있는지 구세프 선생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시고, 또 그에 대한 입장 또한 에르네스트처럼 명확했다.

난 그걸 알면서도 구세프 선생님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제가 받아도 되는 걸까요?”

“아직도 그런 소리냐?”

아니나 다를까 구세프 선생님은 눈을 부라리며 말씀하셨다.

“당연히 받아야지. 타티아나. 특히 네가 마무리한 연주회가 에르네스트를 위한 부분이 있고, 그걸 문화부에서 알아차렸기에 훈장을 주기로 한 것이라면 더더욱.”

“……더더욱이요?”

“당연하지 않나? 네가 한 일이 공로로 여겨질 만큼 에르네스트가 러시아 클래식계에서 중요인물이라는 건데.”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너무 간단한 일처럼 말씀하시는 구세프 선생님을 보니 무어라 반론할 방법도 없었다.

내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구세프 선생님은 갑자기 내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거칠게 몇 번 쓰다듬었다.

이런 손길은 처음이라 당황한 내가 올려다보니 선생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가서 받아라. 타티아나. 네겐 그럴 자격이 있어.”

“…….”

난 구세프 선생님 역시 많은 생각 끝에 하는 말씀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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