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7화
국가상이나 훈장 등의 수여는 일반적으로 협회 등의 공인단체에서 먼저 추천하고 수상자에겐 전화 정도로 통보를 하는 편이다.
이 과정에선 추천 단계에서 이미 추천자와 협회의 조율이 끝난 상황이기 때문에 딱히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이번에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에게 공로 예술가 명예칭호와 훈장을 수여하기로 한 것은 문화부에서 자체적으로 추진한 일이었고, 베르체노프에선 그것을 그냥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타티아나로부터 직접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블라디미르의 머리에 스친 건 이 이야기가 혹여 유리 알렉세예비치의 심기를 거슬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유리는 재계의 거물로서 이런 명예칭호 등이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이제 갓 데뷔한 것이나 다름없는 피아니스트에게 주어진 선물은 반드시 그 대가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다면 이 상황은 이쪽에서 먼저 수작을 부린 셈이 된다.
훈장을 수훈하는 데 수작이라는 말이 정말 기이하게 느껴지지만, 베르체노프는 그렇게 해석하더라도 누가 무어라 할 사람 없을 정도의 가문이었다.
당연히 블라디미르는 억울했다.
타티아나를 추천한 사람들이나 허락한 사람들 모두 베르체노프와의 입장관계 등에 대해선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모두들 타티아나가 해낸 일들과 자격요건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항상 이상적으로 흘러가는 건 아닐 테니까…….’
어쨌든 베르체노프 쪽에선 설명을 요구했고, 음악예술국에선 합당한 사람들을 구성해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총수이다 보니 국장급이 나가도 괜찮은 경우였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로 정계와 재계의 모임 같은 형태가 되어 버린다.
그 자체로 설득에 난항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번엔 부국장인 블라디미르와 그 밑의 직원들이 함께 한 것이다.
좋은 자리를 예약해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블라디미르는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러시아 재계의 전설과도 같은 남자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기본적으론 타티아나에게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어필하고 그녀와 비슷한 나이 대에 똑같이 훈장을 받았던 사례들을 설명할 예정이었다.
2년 남짓밖에 되지 않은 활동 기간에 대해선 그간의 연주회 목록과 성과를 읊을 예정이고.
훈장을 주고자 하는 입장에서 이렇게 필사적으로 이유를 설득하려 한다는 게 굉장히 우습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며 블라디미르를 비롯한 네 명의 음악예술국 사람들은 베르체노프의 행차를 기다렸다.
그리고 정확히 약속시간 5분 전에 베르체노프가 도착했다.
닫힌 문 밖에서 웨이터가 처음 노크를 하고 타티아나가 도착했음을 알렸을 때부터 블라디미르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왔다고 하는 거지?’
그가 예상했던 대로라면 유리 알렉세예비치가 도착했다고 알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것도 타티아나 혼자였다.
그 뒤로 아무도 없이 문이 닫히고, 타티아나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혼자 인사했다.
얼결에 인사를 받고 나서도 분위기가 어색해진 건 당연했다.
블라디미르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분명 쉽지 않을 것이라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런 이유로 난처해질 줄은 몰랐다.
저쪽엔 겨우 열여섯 살인 타티아나 혼자.
그리고 이쪽은 마치 잔뜩 겁먹기라도 한 듯 음악예술국에서 우르르 나온 네 명의 성인이었으니 이렇게 우스운 광경도 찾기 어려울 듯했다.
문제는 그 우스운 성인들 사이에 블라디미르가 끼어 있다는 것이었다.
‘친절, 설득, 속도…….’
블라디미르의 머릿속에선 이 상황을 빠르게 해결할 방법만 돌아다녔다.
어떻게 보더라도 타티아나는 혼자서 이 자리에 온 걸 꽤나 어색하고 불편해하고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것도 어렵게 보인다.
수훈 전 심사를 위해 무대 위의 모습을 영상으로 봤을 땐 성인 연주자들도 압도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테이블을 마주하고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마치 컵에 담긴 물처럼 차분하고 예답게 행동했다.
주변이 진동하면 함께 파문을 그리며 대답하다가도 곧 잠잠해진다.
또래 중에서 특히 어른스러운 연주자들을 꼽는다 치더라도 타티아나의 태도는 특별했다.
일단 그녀에게 훈장 수훈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블라디미르는 일단 맛있는 식사와 함께 잔뜩 칭찬이나 해 주고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베르체노프의 총수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훨씬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블라디미르의 두 번째 착각이었다.
‘지금…….’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마르티노바가 타티아나에게 진학 이야기 등을 꺼냈다.
여기 있는 음악예술국 사람들은 모두 타티아나가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전문가들이니 만약 그녀가 상담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마르티노바가 그런 상담으로 시작해서 적절히 좋은 분위기로 끌고 나가려 하는 것을 느낀 블라디미르는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몇 마디가 오가기도 전에, 타티아나는 분명한 태도로 상담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음을 밝혔다.
이미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 명료한 기준을 가지고 타티아나는 거꾸로 문화부의 의도를 물어 왔다.
그 질문은 모든 선택이 그녀에게 쥐어져 있음을 분명히 했다.
“하하하핫.”
블라디미르는 감탄의 의미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그들은 베르체노프의 심기를 거슬렀다. 그 점은 맞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버지인 유리가 아니라 타티아나 본인일 것이란 건 미처 몰랐다.
그냥 적당히 돌려보낼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 느꼈던 여리여리한 느낌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한 피아니스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블라디미르는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만약 이 자리에서 음악예술국이 타티아나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훈장을 고사하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근래 잘 느끼지 못했던 감탄과 고양감을 느끼며 블라디미르는 천천히 이야기했다.
“왜 당신에게 공로 예술가라는 높은 명예 칭호와 훈장을 주려고 하느냐…… 사실 그건 우리 음악예술국 내부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활동 2년의 열여섯 살 피아니스트에게 주기에 공로 예술가란 무게는 너무 무겁다.
적당히 표창이나 4급 조국 공로 훈장 정도로 처리해도 괜찮았을 터였다.
문화부 내부에서도 심사 단계에서 갑론을박이 조금 있었던 문제였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는 빠르게 해결되었고 지금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저희 직원들의 과반수 이상이 찬성했고 저와 국장님. 그리고 장관님까지도 모두 찬성했죠.”
“그게 이유인가요?”
타티아나는 자신이 원하는 건 그런 대답이 아니었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단지 관료들 몇 명이 모여서 회의하고 결론을 내렸다는 말은 아무런 이유도 되지 않는다는 투였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자리에서 자기 의견을 제대로 내는 것조차 쉽게 하지 못한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당돌하리만치 또렷한 시선을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블라디미르에겐 그녀에게 충실할 이유가 생기고 있었다. 그가 이어 설명했다.
“상세한 이유를 이야기하자면……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의 회원으로서 활동 중이고 자선 연주회나 문화부에서 주최하는 연주회에도 몇 번이나 참여했었죠.”
이제 러시아 클래식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간단한 그녀의 약력이었다.
특히 블라디미르는 1년 정도 그녀를 지켜보면서 서면이나 영상으로 기록을 접해 왔었다.
그 뚜렷한 발자취를 그는 전부 외우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전부 짧게 넘기기엔 너무나 대단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취소될 위기였던 연주회를 두 번이나 연달아 구해 내고, 친구이자 동료 예술가를 위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그의 평가에 타티아나는 처음으로 부끄러운 듯 어깨를 움츠렸다. 이런 모습을 보면 평범한 소녀처럼만 보인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동안 저보다 더 공로가 많으신 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렇긴 하죠. 그럼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볼까요.”
하지만 겨우 이 정도 설명으로 타티아나를 납득시킬 순 없었다.
현실적이란 말에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라디미르는 그녀의 행적 그 이면을 살짝 테이블 위로 끌어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우승한 뒤 당신은 음반을 내고는 이후 쭉 연주회 활동만 했었죠. 이건 다른 연주자들을 배려한 일 아닙니까?”
타티아나는 평가하기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활동을 자제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콩쿠르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나 음악원에 진학하지 않는 것 모든 것이 그러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눈가를 꿈틀거리더니 반박했다.
“절 그렇게 오만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 주세요. 다른 연주자들에게 실례잖아요?”
“음, 그러면 전 세계 음악계에 도전장은 왜 내신거죠.”
“예?”
“방금 제가 음반 이야기를 했을 때 되묻지 않으셨잖습니까.”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무언가를 생각하던 타티아나의 얼굴은 곧 창백해졌다.
블라디미르는 나지막이 웃었다. 이런 간단한 수에 넘어가 주니 즐거웠다.
타티아나의 연주 데이터가 쌓인 지금, 그녀의 음색을 특정해 낸 음악예술국의 전문가들은 작년에 있었던 파란이 그녀의 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단 의견을 냈었다.
그리고 지금 보니 그건 사실인 것 같았다.
당혹스러워하는 타티아나를 보던 블라디미르는 양옆의 다른 사람들과도 눈빛을 교환하고는 설명했다.
“작년에 음반시장에 돌연 나타났던 무명의 음반이 누구 작품인지에 대해 의견은 분분하지만, 우리 음악예술국에선 아주 강력하게 당신이 주인공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 저기…… 그…….”
“그것 또한 굉장한 업적입니다. 전 세계 평론가들이 그 음반 하나에 충격을 받고 쇄신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죠.”
갑자기 러시아에서 툭 튀어나온 무명의 피아니스트를 두고 클래식계가 거의 한 번 뒤집어졌었다.
누군지 밝히지 않으면 평도 시상도 없다고 단호하게 대하던 여러 평론가들은 무시무시한 여론의 질타에 못 이겨 결국 항복했고, 그 후론 권위적이고 일방적이던 평론계의 분위기가 옅어졌단 이야기가 많았다.
그건 어린 피아니스트의 당돌한 도전장이자 완벽한 승리이기도 했다.
당연히 클래식계에서 러시아가 다시 한번 만만찮은 나라임을 증명한 계기이기도 했고.
여전히 무명 음반의 주인공은 가려져 있는 것이 대외적 효과가 좋았으니 밝히지 않고 있지만, 이 사실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여러 전문가들은 이것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타티아나에게 훈장을 수훈하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입을 모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건 타티아나가 한 아주 일부분의 일뿐이었다.
“데뷔하자마자 첫 콩쿠르에서 우승하고는 미련 없이 내려와 음반으로 도전하고, 그 후엔 계속 연주회로 사회에 공헌하는 일만 계속해 온 피아니스트가 특별하지 않으면 누가 특별하겠습니까?”
현존하는 음악가들의 거의 모든 활동은 음악예술국으로 집결되어 그중 특별한 몇몇은 위로 보고된다.
때문에 꽤 많은 사람들의 활동을 봐 온 블라디미르였지만, 그중에서 타티아나만 한 사람은 적어도 몇 년 안에 없었다는 건 분명했다.
나이가 열여섯 살인 건 아무 문제도 안 된다. 물론 타티아나가 보호자 없이 혼자 온 것에 대해 조금 놀랐던 건 사실이었지만, 지금 블라디미르는 정말로 그녀를 독립적인 피아니스트로 보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밝히지 않았던 음반에 대한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워하다가도, 한편으론 그걸 알아봐 준 것에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그 순수한 행복의 표시에 블라디미르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그 기분을 이어 그는 다음 이유를 꺼내 놓았다.
“현실적인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번엔 솔직한 이야기를 해 보자면…… 이건 문화부가 할 수 있는 화해의 제스처이기도 합니다.”
“……예?”
이번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가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번 가을 연주회를 기획한 것도 문화부이지만 반대로 취소를 가장 강력하게 종용한 것도 문화부였죠. 하지만 타티아나는 혼자서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최고의 무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미 문화부는 체면이 많이 상한 상태죠.”
체면이 상한 정도가 아니라 창피해서 고개를 들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사실이 널리 퍼지지 않아서 다행이지, 만약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내고 방해를 했다가 만약 타티아나가 성공시키는 일로 갔다면, 문화부가 감당해야 할 지탄은 엄청나게 컸을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선 가만히 있어 준 알렉산드라와 다른 연주자들이 정말 큰 역할을 했다.
블라디미르는 개인적으로도 그 점에 감사했다.
때문에 지금은 솔직하게 이야기할 때였다.
“하지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역시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막상 필요할 때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외면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죠. 그 점에 대해선 지금 늦게나마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괜찮아요.”
타티아나는 담백하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당황해하거나 거부하지 않으니 차라리 이야기하기가 편했다.
지금까지 다른 연주자들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까지 해 본 적이 있었나.
지난 몇 년을 돌이켜 봐도 없었지만, 블라디미르는 상당히 유쾌한 기분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국가기관의 오판과 실수를 수습한 연주자에게 훈장이 주어지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그런 부분은 또 생각지 못했다는 듯 타티아나는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그녀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음악 외적이고 복잡한 이야기들이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녀가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아마 스스로 한 가치판단에 따라 훈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해도 지금 블라디미르로선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에 담긴 진실됨에 타티아나는 꽤나 영향을 받고, 또 이 이후의 미래를 생각해 나가는 듯 보였다.
그 신중한 태도는 가만 보고 있기만 해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