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8화
아마 블라디미르는 내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었겠지.
처음 봤을 때 당혹스러워하던 눈빛은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이곳에 왔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진지한 태도로 날 대해 주었다.
문화부 내부의 이런저런 이유와 사정들.
그리고 내게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었을 이야기들까지, 난 블라디미르가 본래 했어야 하는 말보다 더 많은 말들을 해 주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건 그의 친절함이자 진정성이었다. 이야기들을 잘 경청한 나는 짧은 감사를 건넸다.
“이렇게까지 설명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블라디미르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더니 목을 축였다. 그리곤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받으시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겁니까?”
“…….”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확인을 바라고 있었다. 나 역시 이 자리에서 확답을 해 줄 생각이었다.
이제 문화부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전부 해 주었다.
이 정도로 내가 자격자임을 확실하게 보증해 주었으니 이제 거기에 대해서 반론을 하려면 그에 걸맞은 근거를 제시해야 했다.
이도저도 없이 무작정 스스로를 낮추는 건 겸허가 아니라 몰상식한 행동이 된다.
난 잔 표면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이 의미 있는 일이 되어 종국엔 누군가 알아보고 내게 돌려주려 한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과 고양감.
음악가이자 연주자로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건 정말 축복받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전히 가슴 한편에 콱 박혀 있는 거부의 마음 또한 느낀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지내고 싶은 어떠한 충동이 스멀거린다.
그 이중적인 생각들을 저울 양측에 놓고, 난 지금 내가 왜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이유를 이야기해야 함을 느꼈다.
이 대답을 듣고 나면 비로소 결정할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한 가지만 여쭐게요.”
블라디미르는 무슨 말이든 좋다는 듯 손은 슬쩍 펼쳐 보였다.
난 여전히 복잡한 머릿속에서 단어들을 하나씩 꺼내어 이어 붙였다.
“에르네스트가 얼마 전 수술을 받고 지금은 회복 중이에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다행이군요.”
“그가 재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죠.”
어제 보고받기로 그는 기계를 사용해서 관절이 굳어 버리지 않도록 움직이는 치료를 받으며 수술 부위가 안정되기를 기다리는 중이라 했다.
얼마나 오래 걸릴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리고 그 동안 그 애는 내게 무엇을 바라고, 이 사람들은 내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던 생각은 분명치 않은 언어로 변하여 나왔다.
“그사이에 저에게 바라는 것이라도 있나요?”
날 가만히 바라보던 블라디미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에르네스트를 대신하길 바란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난 블라디미르가 생각 이상으로 예리하고 심려가 깊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한참 지나서 내가 스스로 조금 침착해졌을 때 대답해 주었다.
“내부적으로 그런 고려는 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제가 개인적으로 바라게 된 것이 있긴 하군요.”
굳이 나라는 한 사람에 국한되지 않고, 블라디미르는 문화부 음악예술국의 부국장이라는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야기했다.
“에르네스트는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당신이 했었던 약속이 잊히지 않고 쭉 사람들 뇌리에 남아 있길 바랍니다.”
내게 바라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정반대로 그는 내가 바라는 말들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것을 바라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난 약간의 창피함과 더불어 적어도 내가 한 음악과 말들이 허투로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를 느꼈다.
적어도 내 움직임이 무의미하거나 무언가를 더 망쳐 놓지 않고 제대로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만으로도 난 많이 차분해질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는 길게 말하지 않고 간단하게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러니 간간이 활동해 주시죠.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씀하시고.”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다른 세 명의 사람들도 바라보았다.
모두 나와 눈을 마주치자 말은 하지 않아도 약속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눈빛을 보냈다.
블라디미르, 그리고 음악예술국의 사람들이 적어도 나와 같은 곳을 지향하며 노력하고 협조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자리를 요구하길 잘했다. 난 깊은 이해와 감사를 담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하하, 그렇다고 부담 가지실 건 없고요.”
내 짧은 대답이 어떤 뜻이었는지 블라디미르도 충분히 이해한 듯하다.
그는 한결 가벼운 목소리로 껄껄 웃으며 말했다.
“가끔 작은 연주회나 콩쿠르에 참가하는 걸로 충분합니다. 공로 예술가로 활동한다고 해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가 활동하던 걸 보면 알지 않습니까?”
“그리 특별할 건 없었어요.”
“학교도 그대로 다니고 원하는 것을 하시면 됩니다. 그나저나, 콩쿠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년 국제 콩쿠르에 참가합니까?”
내 커리어 등에 대해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는 그들도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지에 대해선 분명하지 않은가 보다.
오늘 들었던 많은 이야기들에서 그들이 얼마나 진정성을 보여 주었는지 느꼈으니, 나 역시 알려 줄 수 있는 한에선 성의를 보여야 한단 생각이 들었다.
“예. 퀸 엘리자베스에…….”
“오, 역시.”
“퀸 엘리자베스요?”
“쇼팽이 아니라?”
“특별한 이유라도?”
거의 동시에 세 사람이 득달같이 질문을 던져왔다. 마치 특종을 만난 기자들처럼 눈을 빛내고 있는 모습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저기…….”
머뭇거리고 있자 블라디미르가 중재해 주었다.
“다들 갑자기 있다가 왜들 이러나. 그리고 이 자리에서 나온 모든 사적인 대화는 대외비니까 입이라도 벙긋했다간 알아서 하게.”
“…….”
깔끔한 정리에 잔뜩 흥분해 있던 분위기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내 콩쿠르 계획에 흥미를 보이는 건 블라디미르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이전과는 또 다른 예리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때, 웨이터가 주문했던 요리들의 전채를 가져 와 테이블 위 각각 앞에 놓아 주었다.
블라디미르는 바쁠 것 없다는 듯 느긋하게 말했다.
“먹으면서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이제 시작된 대화가 꽤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른 넷을 마주하면서도 난 별로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
식사를 마치고 문화부 사람들과 헤어졌다.
잠시 레스토랑 근처를 서성이던 나는 바로 빅토르에게 전화하는 대신 다른 번호를 눌렀다.
“에르네스트.”
- 안녕.
전화를 바로 받는 걸 보니 치료 중은 아닌 것 같다.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조금 놓인다. 바로 안부부터 물었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 괜찮아. 오늘은 조금 움직여 보기도 했어. 물론 내가 한 건 아니고 의사가.
“그, 그런가요? 어땠나요?”
- 안 아팠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지. 그래도 상태가 괜찮나 봐.
그는 짐짓 태연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난 이미 전날 에르네스트의 치료에 대해 보고를 받은 뒤였다.
수술한 부위가 낫는 도중에도 잘못 굳어 버리지 않도록 계속 움직여 주는 치료를 병행해 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하다고 한다.
에르네스트는 어차피 익숙해져야 한다며 진통제도 마다하고 치료에 임하고 있다고 하는데, 마음 같아선 당장 가서 진통제를 왜 안 먹냐며 강제로 입에 넣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 이상 뭘 할 수 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겁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에르네스트는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 넌 어때?
“저요?”
- 응.
지금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아시나요?
정말 별의별 말들이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다가, 안개처럼 사라져 간다. 난 결국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저야 늘…… 같죠.”
- 그래? 다행이다.
“다른 이야기도 있어요. 그래서 전화를 드렸고.”
- 뭔데?
“오늘 문화부 음악예술국에서 나오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봤어요.”
그에겐 해야 할 이야기였다.
난 들리지 않게 수화기에서 입을 조금 뗀 채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공로 예술가 훈장은 받기로 결정했어요. 제가 움직여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렇게 하려고 해요.”
가책과 책임감을 느끼며 최소한의 것들을 매듭짓고는 조용히 있으려 했다.
연주자로서 할 수 있는 일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나도 미처 몰랐던 것들이 많았다. 내가 해냈고, 해낼 수 있으며, 해내야 하는 것들.
에르네스트가 고통을 참으며 노력하는 만큼 나 역시 감내할 수 있어야만 했다.
적어도 그와 함께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내 말을 듣고 에르네스트는 잠시 조용히 있더니 자기 의견을 내지 않고 말했다.
- 오래 고민했나 보네.
“오래 고민했어요.”
- 그래도 잘 생각했어.
“…….”
주저앉으려던 날 다시 일으킨 사람들은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내 강박과 속박을 풀어 준 사람은 에르네스트였다.
“에르네스트.”
- 그래.
“전 연주회에도 나갔고 훈장도 받을 예정이고 내년엔 국제 콩쿠르에도 나가려고 해요.”
그 외에 무엇을 더 하게 될진 모른다. 하지만 만약 필요하다면 난 하고야 말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날 지켜보겠지.
“얼마 전에 하셨던 말 기억하시나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절 무대 위로 올려보내고 싶다 하셨죠.”
- 했었지.
“그 말, 지금도 여전히 같나요?”
자꾸 귀찮게 굴고 있다는 자각은 있다. 하지만 난 그에게 직접 말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괜찮지만 나중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른다고.
그리고 내가 그것을 정말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 ……하하.
수화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마치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고 묻는 것 같은 느낌.
음악도 말도 아닌 그 진동도 충분한 감정을 전달해 온다.
가만히 듣고 있자 그가 이야기했다.
- 네가 줬었던 CD말야, 선물해 준 플레이어로 몇 번 들어 봤어.
“그, 그랬나요.”
- 응.
들으라고 준 것이지만 막상 들었다니까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에르네스트는 그에 대한 총평을 내놓았다.
- 그걸 들어 보고 나니까 네가 예전에 했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더라고.
“무슨…… 말이죠?”
- 이런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서지 않는다는 건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일이라고.
“……예?”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예전에 그와 겨울의 표리 악보 출판을 놓고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에르네스트가 자신의 음악을 형태를 갖춰 세상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그 이야기를 돌려받자 할 말이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 그러니까 난 지금 아주 만족하고 있어. 내가 잠깐 쉬는 동안 네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데.
“그게 무슨 말씀…….”
- 그리고 그 지점까지 빠르게 쫓아갈 거야.
회복은 당연히 정해져 있는 미래고, 그때가 기대된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 안심하고 최대한 멀리 가 있어도 돼.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는 절대 우리 사이의 인연이 끊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 보였다.
어떠한 확신과 믿음이 그를 안정시키고 있음을 느낀다.
먼저 가 있어도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받았다.
그리고 애초에 훈장 수훈 같은 건 그와 나란히 서는 것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난 안심하지도 못하고 최대한 멀리가 어디까지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지금 분명히 말씀하신 거예요? 후회하지 않는다고.”
- 그래. 그 뜻이야.
“…….”
지금 확실한 것 하나는 있었다.
훗날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내가 아무 발전 없이 여전히 근처를 서성이고 있다면 승부욕이 강한 그는 화를 낼 것이란 점이었다.
가책을 이유로 머뭇거리는 건 여기까지다. 난 그렇게 결정하며 말했다.
“다음에 방문할 땐 무엇을 사다 드릴까요? 드시고 싶은 것이라도 있으시나요?”
- 어, 글쎄. 햄버거?
“……의사에게 상담해 볼게요.”
- 잠깐만, 그냥 가져와 준다는 거 아니었어?
당황한 그의 목소리에 난 숨죽여 웃었다.
커리어를 만들어 나가며 발을 뗀다 하더라도 내 생활에 변화는 없을 터다.
난 어느 쪽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지켜나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