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59화 (859/1,277)

##  859화

문화부 음악예술국에서 나왔던 사람들과 만나고 2주 정도 시간이 흘렀다.

10월이 끝나가며 날씨는 훨씬 더 추워졌고 사람들의 옷차림 역시 그에 비례하며 두터워졌다.

나도 꼭 모자와 목도리를 하고 다니게 되었다.

에르네스트는 석고 깁스를 하고 학교에서 한 번 등교했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인사도 하고 자잘한 행정들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학교에 왔을 때의 분위기는 사실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연주자들만이 가득한 이 학교에서 깁스를 한 에르네스트의 모습은 그 자체로 굉장한 괴리가 있었다.

학생들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다가와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간신히 위로를 건네곤 했다.

정작 에르네스트는 이렇게 되리란 걸 예상했는지 어려워하지 않고 능숙하게 사람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우리 반에 들어왔을 때만큼은 모두들 한마음으로 즐겁게 에르네스트를 맞이해 주었다.

이것도 분명히 나아지는 방향으로의 한 발자국이라고 희망하는 것이었다.

안드레이와 리처드를 필두로 꽤 짓궂은 농담과 우스갯소리가 오갔고, 종국에 안드레이는 정말로 에르네스트의 깁스에 예술을 하고야 말았다.

한 가지 간과했던 건 그의 의욕에 비해 실력은 정말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기술이 동반되지 않은 예술은 전달되기 어렵다는 걸 보여 줬었지.’

모두의 엄청난 질타와 함께 안드레이는 물러났다.

그러나 낙서로만 보이는 그림이 그려진 덕분에 모두들 한층 의욕적으로 그 옆에 무언가 더하길 바랐다.

나 역시 친구들과 함께 그의 팔에 종적을 남겼다.

물론 그림은 그릴 줄 모르기에 쾌유를 빈다는 짧은 글귀뿐이었지만, 에르네스트는 굉장히 기뻐했었다.

“…….”

손끝으로 스마트폰 액정을 옆으로 스쳤다. 그 날 친구들과 찍었던 사진들이 한 장씩 넘어갔다.

천천히 찍었던 사진들을 끝까지 넘겨 본 나는 고개를 들었다.

늘 내가 타는 차량이 아닌 리무진 차량의 실내가 보인다.

그리고 맞은편엔 아버지가 앉아서 서류철을 들고 무언가 업무를 보고 계시는 중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시선을 눈치챈 아버지가 코끝에 걸친 안경 위로 날 바라본다.

“왜 그러지? 타티아나.”

“아뇨, 아무것도 아녜요.”

이렇게 함께 공적인 행사에 가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려다가, 괜히 평소엔 그러지 못했다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아서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내 표정을 어떻게 보셨는지 아버지는 피식 웃더니 말씀하셨다.

“긴장하는 것 같구나.”

실제로 긴장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연주회 무대에 서는 것이라면 단지 내 머릿속에 있는 건 무대 위에 올릴 곡의 선율과 화성의 탑뿐이다.

피아노가 있는 무대로 향하는 것은 그것들을 펼쳐낼 기회를 얻는 순간일 뿐이다.

긴장감보단 고양감이 조금 더 크게 나를 장악하고 움직인다.

맨몸이라 하더라도 피아노를 찾아 향할 때 나는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가는 곳엔 피아노가 없다. 그 사실은 나를 하여금 살짝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그, 글쎄요?”

“하하, 네가 그렇게 긴장하는 건 드문 일인데.”

“재미있다는 듯 말씀하시지 마세요.”

“미안하다. 음.”

난 일부러 장난치듯 핀잔을 주었으나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기쁜 일이었다.

혼자서 문화부 사람들과 만나고 훈장을 받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아버지는 감탄에 가까운 칭찬을 해 주셨다.

내가 어떠한 결정을 내려도 지지해 주셨겠지만, 결국 용기를 내었다는 것을 알아주신 것이다.

그런데 빙그레 웃던 아버지는 돌연 서류들을 무릎 위에 내려놓더니 말씀하셨다.

“사실 재미있다기보단 조금 민망하구나.”

“미, 민망요?”

아버지의 입에선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단어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아버지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간 네 연주회를 자주 보지도 못했고 최근에도 너 혼자 모든 것들을 해냈는데, 훈장을 받는 자리에만 따라가려니 말이다.”

“그런 말씀 마세요.”

어떤 생각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진 알겠다.

그러나 난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너무나 많은 지원과 지지를 받아왔다는 걸 잘 안다.

이전에 서로간에 오해가 컸을 땐 어쩔 수 없는 알력도 많았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찾아 나아가려 했을 때 아버지가 날 반대했던 건 중앙음악학교에 입학하기 전, 말도 제대로 못하던 시절의 잠시뿐이었다.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금 내가 느끼는 바를 온전히 전하려 애썼다.

“출장지에서도 제 무대를 봐 주셨다고 들었어요. 지금도 바쁜 와중에 와 주신 것이고…… 전 행복해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나.”

“후후, 솔직히 말씀드리면 오늘은 혼자였다면 정말 긴장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난 다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그래.”

그제야 다시 아버지는 안심한 듯 안경을 치켜올렸다. 나도 나대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다시 스마트폰을 꺼내어 보자 그사이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시상식에 와 주기로 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였다.

두 사람은 드레스는 뭘 입었냐면서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사진을 찍어 보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아마 너무 튀지 않도록 나와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시상식의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 적당히 포멀하고 세련된 의상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가장 어린데다가 등급이 높은 훈장을 받아서 시선을 잔뜩 받을 텐데, 의상마저 확 튀어 버리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최종적으로 고른 의상은 피아노 블랙 계열의 윤기가 흐르는 검은 드레스였다.

내가 즐겨 선택하는 보라색도 생각해 보았지만, 크게 튀지 않는 어두운 색을 택할 것이라면 아예 피아노와 같은 색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며 나제즈다가 추천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드레스는 너무 클래식해 보이지 않게 무늬도 들어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어서 난 다른 치장 없이 목걸이와 어깨를 덮는 케이프만으로 시상식 의상을 정돈했다.

“…….”

일단 친구들이 바라는 대로 사진이나 찍어야겠다 생각하고 스마트폰을 멀리 하고 셀피를 찍는데, 맞은편에서 아버지의 눈빛이 이쪽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난 뭔가 들떠서 셀피를 찍는 사람이 된 기분이 되어서 약간 창피했다.

하지만 나보단 아버지가 더 들떠 있었다.

“사진 찍으려면 내가 해 주마. 타티아나.”

“…….”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고 아버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옆에 있는 작은 가방에서 DSLR을 꺼내들었다.

몇 년 전에 예고르가 처음 저 카메라를 아버지 손에 쥐어 드렸을 때가 생각나서 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셔터음이 들렸다.

이상한 표정이 찍히진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 살짝 움츠렸는데,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몇 번이나 셔터를 더 눌렀다.

그런데 피사체의 역할에 충실하다보니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데 아버지.”

“그래.”

“제가 사진을 필요로 했던 건 아나스타샤에게 보내 주기 위해서였는데…… 그 카메라로 혹시 전송할 수 있나요?”

“……응?”

아버지는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셨다. 그러더니 어정쩡하게 말씀하셨다.

“안 될…… 걸?”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난생처음이다. 나도 모르게 빵 터져선 깔깔거리며 웃고 말았다.

심지어 운전석 쪽에서도 웃음소리가 들린다.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있던 아버지도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더니 다시 이번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더니 내게 전송해 주셨다.

“감사해요.”

“나중에 네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도 찍어 주마.”

“예.”

난 기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과 따뜻함 속에서 차량은 조금 더 달려 오늘 시상식이 열리는 볼쇼이 극장에 도착했다.

국가에서 주는 훈장들은 크렘린에서 수훈하는 경우도 많지만,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을 위한 경우엔 볼쇼이 극장에서 하곤 했다.

주차장에 차량이 멈춰 서고, 난 아버지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을 연상케 하는 양식은 모스크바 한가운데에 있음에도 잘 어울렸다.

예전 기억들이 난다. 어릴 적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을 보러 왔었던 기억들이었다.

그 후로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었지만, 이렇게 지나간 기억들 속에 있는 장소에 오는 일은 내가 누군지 보다 확실하게 느끼게 하곤 했다.

“가자꾸나, 타티아나.”

“예.”

나와 아버지는 몇 명의 수행원분들과 함께 천천히 극장으로 들어섰다.

몇 번의 소실과 재건, 그리고 폐쇄와 재개장 등을 거친 이 오래 된 극장은 그 홀만 하더라도 4개나 되는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내가 연주자였다면 그 홀들에 관심을 가지고 뒤편으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난 홀이 아니라 중앙부에 있는 아트리움으로 향하고 있었다.

“…….”

유리로 된 천장에선 햇빛이 그대로 스쳐 내려온다.

회랑처럼 구성된 새하얀 벽은 그 햇빛을 반사해서 아트리움 전체를 밝게 만들었다. 마치 빛의 도시를 재현한 세트장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 앞에는 수십 개의 의자들과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지금도 자리를 세팅하고 카메라 등을 조작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분주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저곳이 바로 오늘 예술가들을 위한 시상식이 열리는 곳이었다.

“생각보다 그리 춥지는 않구나. 괜찮겠지? 타티아나.”

“예, 괜찮아요.”

천장이 유리라서 탁 트인 기분이 들지만 보온이 잘 되는지 춥진 않았다. 케이프로 충분했다.

난 혹시 친구들이 먼저 왔는지 보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으나, 모르는 사람들만 잔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서성이고 있자니 저쪽 편에서 직원으로 보이는 여성분이 우리를 알아보고 다가오시더니 말을 걸어왔다.

“유리 알렉세예비치,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일찍 오셨군요.”

“아……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오시죠.”

안내를 받아 단상 옆에 있는 간이 테이블 옆으로 갔다.

직원분은 빠르게 말을 시작했다.

“우선 축하드립니다. 제가 이곳에서 오래 근무했지만 타티아나 유리예브나처럼 일찍 상을 받는 분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유리 알렉세예비치께서도 자랑스러우시겠어요.”

“그렇소.”

아버지도 짧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아버지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 위압감 때문에 말도 잘 못 붙이기 마련인데, 이 직원분은 넉살이 얼마나 좋은지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던 그녀는 날 휙 돌아보더니 요모조모 뜯어보고는 말했다.

“자…… 아직 시상식 시작까진 시간이 꽤 남았는데…… 의상도 메이크업도 직접 하셨고…… 저희가 할 건 없겠네요. 음. 혹시 필요하시다면 무대 위에서 잠깐 서 보시기라도? 리허설처럼요.”

마이크 테스트 같은 걸 직접 할 필요는 없을 테고, 이따가 긴장하지 않도록 지금 느낌만 느껴 보라는 것 같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안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굳이 그럴 필욘 없긴 하죠. 좋아요. 음…… 죄송하지만 나란히 앉으시긴 어렵고,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는 맨 앞줄에. 그리고 유리 알렉세예비치와 다른 분들은 뒤쪽에 앉아 주셔야 해요.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소.”

그리고 어떻게 시상식이 진행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듣고, 직원은 다시 바쁜 듯 어디론가 가 버렸다.

난 직원이 말해 준 순서에 맞춰 좌석을 세어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말했다.

“그럼 뒤에서 보고 있으마. 타티아나.”

“예.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날 가볍게 한 번 포옹한 아버지는 수행원분들과 뒤쪽 좌석으로 향했다. 난 혼자 맨 앞줄로 갔다.

“…….”

앞쪽엔 무대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일찍 와서 그런가 옆에도 멀리 몇몇 사람만 보이고 썰렁했다.

어색하기도 하고 할 것도 없어서 난 스마트폰을 꺼냈다. 언제쯤 올 것 같냐고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에게 메시지를 할 참이었다.

“어머…… 여기는 상 받는 사람들이 앉는 곳인데. 우리 애기도 잘못 온 게 아니라면 무슨 상 받나 봐?”

“???”

깜짝 놀란 내가 옆을 보니 화려한 의상을 입은 한 여성분이 얼굴을 바짝 가까이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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