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0화
말을 걸어오신 분의 나이는 서른 살쯤 되었을까.
그야말로 영화 시상식 등에서 볼 법한 의상과 메이크업이 두드러져서 상대적으로 내가 너무 무난하게 온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더 화려하게 할 생각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다. 난 일단 받은 질문에 대답했다.
“예. 맞아요.”
“무슨 상? 아, 내가 맞혀 볼까? 그 드레스…… 혹시 피아노?”
역시 나제즈다의 선택이 옳았던 걸까? 보자마자 이렇게 빨리 알아낼 줄은 몰랐다. 난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을 맞춘 것이 기쁜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는지 높은 웃음소리가 따라왔다.
“센스 있네. 센스 있어. 딱 그 색감과 디자인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는 것 같네.”
“제가 고른 건 아니에요. 칭찬은 전달해 드릴게요.”
“오, 역시 누가 손을 댄 걸까? 모델의 포텐셜을 보는 눈이 좋은 사람일 것 같은데. 음…… 이 담백한 취향을 보자면…… 조야?”
“아뇨, 나제즈다라는 분이에요.”
“……처음 듣는데?”
이름을 대자 당연히 알아듣진 못했지만, 나제즈다가 프로로 생각되어지는 건 기뻤다.
나중에 그녀에게 전해 줄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개인적인 생각에 잠긴 사이, 당연하다는 듯 무언가 요구하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무튼, 이젠 네 차례야.”
“예?”
“이렇게 이야기하는데도 내가 누군지 아예 모르고,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 같아서. 어떤 것 같아?”
“그…… 그게.”
“그냥 편하게 해도 좋아.”
난 그제야 약간 실수했음을 느꼈다.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 얼결에 대화하고 있긴 하지만 지금 이 자리는 국가상 등을 주는 시상식 자리였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하자고 말을 건 건 아니겠지.
교류하면서 흥미를 보여 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당연했다.
척 봐도 유명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내가 못 알아보니 섭섭해하는 느낌이었다.
문제는 내가 클래식 음악계 외엔 아는 사람이 극히 적다는 점이었다.
난 수수께끼에 약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신경 써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저 외견과 30초 정도 나누어 본 대화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첫인상은 너무나 단순했다.
혹시 실례가 될까 싶어 조심스레 그 추리의 결론을 내놓아 보았다.
“디자이너이신가요?”
“힌트를 너무 많이 줬나?”
다행히 정답이라는 듯 환한 미소가 내게 향한다.
그리고 곧 정식적인 소개가 이어졌다.
“유럽에 너무 많이 나가 있었나 보네. 후, 아무튼 반가워. 아델리나 페트로브나 세르지엔코야.”
“아…… 반가워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예요.”
“베르체노바?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잠깐만?”
아델리나는 내게 잠깐 양해를 구하더니 곧장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선 내 이름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난 약간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바라보았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이렇게 태연하게 인터넷에 검색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나도 반대로 아델리나의 이름을 검색해 봐야 하나? 그게 예의인 걸까?
잘 모르면 빨리 알아볼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스마트폰을 꺼내는 건 조금 주저된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아델리나는 철저히 마이페이스적인 사람이었다.
화면을 휙휙 내리며 빠르게 인터넷 기사 등을 찾아보더니 곧 나를 돌아보았다.
“이름만 스쳐 지나가듯 봐서 몰랐었는데, 이런 얼굴이었구나? 사진도 똑바로 좀 봐 둘걸 그랬네.”
“그…… 예?”
“그래도 이름 보니까 기억나네. 언제부터더라 어디든지 틀기만 하면 네 이름이 나오더라고? 요즘은 좀 수그러들었고.”
“그, 그랬나요.”
“몰랐어?”
“아뇨…… 음…….”
알긴 안다.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정말 가을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었으니까. 내 이름 역시 굉장히 많이 오르내렸고.
하지만 안다고 해서 내 유명세에 대해 내 입으로 이야기하는 건 겸손하지 못한 일 같았다.
그렇게 자랑할 만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도 이상했고……. 난 일단 아직 갈 길이 훨씬 멀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아예 모른다고 하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릴 테고,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하는데 아델리나는 내 대답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아무튼 그 정도로 유명세 날리고 오늘은 표창 받는 날인 거야?”
“공로 예술가 훈장이라 들었어요.”
“공로 예술가……? 혹시 미안한데 열네 살쯤 되지 않아?”
“열여섯 살이에요.”
내 말에 아델리나는 어쨌거나 10대 중반인데 무슨 차이냐는 듯 날 바라보다가, 곧 웃으며 말했다.
“그 나이에 공로 예술가가 되다니 대단하네. 내가 이 자리에 왔던 건 마흔 살쯤 되어서였던가? 역시 클래식 하는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점찍어 놓고 밀어주는 경향이 있으니 비교적…….”
아델리나는 한 번 생각하고 나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타입인 것 같았다.
그녀는 시상대 쪽을 바라보면서 주르륵 이야기했다.
하지만 자신이 한 말을 돌이켜보고 사과하는 것 역시 빨랐다.
내가 멍하니 보고 있자 아델리나가 아차 싶었는지 급히 말했다.
“아, 네게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
“괜찮아요.”
“그런데 표정은 완전 오해 잔뜩 한 표정이네.”
“그게 아니라…… 전 아델리나 페트로브나께서 서른 살 근처일 것이라 생각했어서…….”
“어? 응? 뭐? 얘 좀 봐? 아하하하하.”
아델리나는 괜한 소리 하지 말라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지만 난 진짜로 조금 당황했다.
마흔 살이 마치 옛날 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면 지금은 몇 살이라는 거지? 당장 스마트폰으로 그녀의 이력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아델리나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한층 더 친근하게 이야기했다.
“왜 그렇게 어색하게 부르니? 그냥 아델리나라고 해. 괜찮아. 괜찮아.”
“저도 그러면 타티아나로 좋아요.”
“그럴까 우리?”
이야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사교성 좋은 아델리아 덕분에 우린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대부분 이야기는 아델리나가 먼저 이야기하고 내가 대답하는 식이었다.
사실 한참 어린 내가 먼저 살갑게 굴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녀는 자기 스타일대로 말하는 걸 즐거워하는 사람인 것 같아서 내가 일부러 더 나서진 않았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도 속속 시상식장에 도착했고, 아델리나는 제일 앞열에 앉은 사람들 위주로 자신이 아는 사람들은 내게 알려주기도 했다.
클래식뿐만이 아니라 미술, 문학, 건축, 디자인 등 정말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중에서 서른 살이 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차라리 서른이면 다행이지 평균으로 치면 마흔도 훌쩍 넘는 느낌이다.
그 반절도 안 되는 내가 앉아 있으려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내가 있으면 안 될 자리인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아까부터 느끼던 긴장감이 조금씩 더 강해진다.
올라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내 말이 전해지기는 할까?
내 태도를 객관적으로 보면 인터뷰도 방송도 모두 거절하고 있었으면서 상을 준다니까 냉큼 나온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옆으로도 느껴졌는지 아델리나가 슬쩍 물었다.
“어려서 유명세 타는 게 별로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 혹시 너도 그렇니? 타티아나. 아까 보니까 그런 것 같던데.”
처음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난 세간의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똑바로 이야기하지 못했었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부정해 봐야 무의미했기에 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아델리나는 그것을 옳다 그르다 말하는 대신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 왔거든. 뭐, 그것도 성격 나름이라고 생각해.”
“그렇겠죠.”
“하지만 생각을 조금 달리 해 보는 건 어때?”
그러나 한참 오래 전부터 이 세계에서 꽤 유명한 디자이너로 살아온 그녀에겐 내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네가 유명해짐으로써 음악가로서 하는 일들이 보다 쉽게 주목을 받을 수 있을 테고? 그럼 그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더 많이 나올 테지. 그렇지? 그럼 같은 노력으로 훨씬 더 나은 결과를 얻어내는 것도 가능해. 그건 정말 유리한 거야.”
예술가로서 성공에 필요한 요소들이 몇 가지 있는데 실력은 기본이고 유명세라는 것도 굉장히 중요했다.
난 성공 자체에 중요도를 크게 두지 않고 그저 실력에만 몰두하는 타입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외의 것들을 멸시하진 않는다.
아델리나의 말이 옳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리고 거리에서 널 만난 사람들은 행운의 네잎클로버를 찾아낸 것처럼 기뻐하겠지. 그 자체로 얼마나 좋은 일이니? 안 그래?”
그런데 단순한 성공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는 조금 더 내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날 알아보게 된 사람들이 조금 늘어났고, 그렇게 우연히 만난 사람들은 정말 날 본 것만으로도 기뻐했었다.
그런데 난 그런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 하려고 애썼었나? 약간 당황스러워하며 난색을 표하지 않았나?
어쩌면 나와 만난 일이 그 사람에겐 그날 하루를 기쁘게 지낼 수 있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약간 잘못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에르네스트가 팬들에게 친절한 것도 단순히 프로 의식이 아니라 그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부분에서 필요한 일인 것 같단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렇게 아델리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 혼자서도 생각을 해 보고 있는데, 저 멀리서부터 사람들을 이리저리 살피던 두 명의 아이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타티아나, 여기 있었구나.”
“아나스타샤. 발렌티나.”
나 역시 반갑게 친구들을 맞이했다.
시상식에 반 친구들을 모두 부를 순 없어서 부른 두 사람이었다.
내가 전화 받을 당시에 옆에 있어서 자연스레 모든 걸 알고 있기도 했고.
아델리나는 두 사람을 슬쩍 바라보더니 물었다.
“친구들?”
“예, 그렇…… 아델리나?”
내 옆에서 친근한 척하는 그녀를 보고 가볍게 대답하려던 아나스타샤가 순간 깜짝 놀랐다. 그러더니 급히 사과했다.
“갑자기 이름을 불러 죄송해요. 평소 팬이어서…….”
“네잎클로버가 된다는 건 역시 행복한 일이네.”
“예?”
“아무것도 아냐, 괜찮아. 괜찮아. 편하게 해도. 타티아나의 친구들이라고 했으니까.”
평소 패션 등에도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아나스타샤에겐 아델리나를 본 것이 굉장한 일인 것 같았다.
그리고 반대로 아델리나 역시 누군가 알아봐 주었다는 것이 기쁜 일이었고.
하지만 두 사람이 인사한 것도 짧은 시간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지금 여기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고 곧 내게 집중해 주었다.
“오늘 정말 예쁘다. 타티아나.”
“진짜 상 받는 사람 같아.”
“와 줘서 고마워요. 두 분.”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야말로 당장 시상대에 올라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잘 어울리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이 두 사람이 단지 날 축하하기 위해 와 주었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럽다.
그런데 나보다 더 감격한 건 두 사람인 것 같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으로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언젠가 이런 자리에 서게 될 거라 생각했었어.”
“그러니까 말이야. 타티아나 네가 이걸 거절했으면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해. 거절하지 않고 받기로 결정 잘 했어. 진짜로.”
나도 이제 와서야 두 친구가 감격해하는 모습을 보며 조금 더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었다.
만약 받지 않기로 했다면 지금 내가 받는 건 걱정 등이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옆에서 우리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제일 앞줄에서 이야기를 나누니까 당연히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오래 있는 것도 방해되는 일이라 생각했는지 아나스타샤가 빙그레 웃으며 살짝 물러났다.
“뒤에서 보고 있을게. 아마 저 앞에서도 보일 거야.”
“떨지 말고 잘 해. 응원할게.”
“……고마워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그 정도였다.
시상식이 다 끝나고 나면 모두를 데리고 조금 더 길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
맛있는 음식이 함께 하면 더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난 뒤쪽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보았다.
바로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는 걸 보니 인사를 드리려는 모양이다.
내 시선을 따라 뒤쪽을 보던 아델리나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친구들도 귀엽네. 다들 피아니스트? 비주얼로 뭔가 하는 쪽이 아니라?”
“예, 피아노를 쳐요.”
“참…… 이건 국가적 이득이라고 해야 하나 손해라고 해야 하나.”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해 바라보자 아델리나는 농담이라는 듯 낮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친구들도 네가 자랑스러운가 봐.”
“제가…….”
난 약간의 용기를 얻은 것을 살짝 끌어내어 물어보았다.
“제가 네잎클로버처럼 될 수 있는 걸까요.”
아델리나는 멍하니 날 보더니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거침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해.”
당연히라는 말이 이렇게 쉽게 할 수 있으면서도 이렇게 강하게 다가올 수 있는 말이라는 걸 난 처음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