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1화
얼마 지나지 않아 빈 의자들이 가득 찼고 행사가 시작되었다.
“자리에 계신 귀빈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곧 시상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안내 멘트가 나가는 사이에 직원 분들이 앞 열을 돌아가면서 체크하고, 오늘의 시상식 순서 등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 복잡할 건 없었기에 난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한 남자가 단상 위에 올라갔다. 주변에서 크게 박수 소리가 들렸고 나 역시 따라서 박수를 쳤다.
꽃다발이 전달되고, 프세볼로트 문화부 장관님이 직접 그 남자의 옷깃에 훈장을 달아 주었다.
그리고 왼쪽에 설치된 마이크로 남자는 소감을 전했다.
“이렇게 큰 상을 받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남자가 받은 건 연방 국가 표창이었다. 디렉터로서 굉장히 많은 행사들을 기획하고 또 성공시킨 공로로 받게 되는 것이었다.
오랜 기간 노력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감격했는지 그는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 후로도 친선 훈장이나 대통령 표창, 영예 증명서, 조국 공로 훈장 등 다양한 상들이 전달되었다.
난 모두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내 차례는 거의 마지막이라 많은 사람들을 먼저 볼 수 있었다.
열 명 가까운 사람들이 단상 위로 올라가 상을 받고 소감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30분 넘는 시간이 흘러갔다.
시간이 흐르고 내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난 보다 차분해졌다.
“갔다 올게.”
그리고 옆에 있던 아델리나도 내게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녀가 받는 건 대통령 표창이었다.
벌써 이런 자리가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녀는 유려한 태도로 마이크 앞에 서선 여유 있게 멘트를 해 나갔다.
난 그녀를 바라보며 지금까지 봤었던 모든 사람들의 행동과 멘트들을 돌이켜 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머릿속으로 내 리허설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크게 변화한 건 없었다. 그 사실에 난 만족하면서 조용히 앞을 바라보았다.
***
자신의 차례를 마치고 돌아온 아델리나는 그다음으로 호명된 타티아나가 옆자리에서 일어나자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돌아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로 강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방금 전 농담을 건네고 대화를 하던 그 아이가 열여섯 살에 러시아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으러 이 자리에 나왔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일어난 타티아나가 박수를 받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델리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힘이 과하게 들어가지도 않았고, 흐느적거리지도 않는 적당한 텐션을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자세를 만드는 방법을 배우지 않고선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걸음걸이다.
디자이너인 그녀의 눈엔 벌써 타티아나에게 입히면 빛날 옷들이 수십 개씩 비춰지고 있었다.
‘욕심 나네…….’
타티아나는 키도 그리 크지 않고 왜소한 편이다.
얼굴도 좋고 자세는 곧지만 누가 봐도 아직 어린애라서 사실 방금 봤던 그녀의 친구 아나스타샤가 더 모델에 어울리긴 했다.
하지만 저 태도는 그러한 조건들을 따질 수준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것처럼 보인다.
타티아나의 뒷배경 덕분인 걸까? 아니면 음악가라서?
아델리나로선 알 수 없었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무리해 보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날 정도였다.
“…….”
무대에 오른 타티아나는 꽃다발을 받아 들고 옆으로 섰다.
그녀와 마주 본 문화부 장관 프세볼로트는 타티아나의 드레스에 직접 훈장을 달아 주었다.
여기저기에서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또 한 명의 천재가 공로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순간이니만큼 기록으로 남길 가치가 충분한 순간이었다.
훈장을 달고 프세볼로트와 나란히 앞을 보며 잠시 기자들에게 시간을 주고 나서, 앞서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그랬듯 타티아나는 마이크 앞으로 향했다.
‘난 뭐라 했었더라.’
처음 2급 조국 공로 훈장을 받고 저 자리에 섰을 때 아델리나는 그저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당시 아델리나의 절반도 안 되는 나이임에도 담담한 표정으로 마이크 높이를 조절했다.
저 애는 긴장도 안 하나? 하고 의아해할 때가 아니었다.
아델리나는 지금 타티아나가 아무 생각 없이 상 받는다는 기쁨으로 마냥 소감을 말하러 저 자리에 서는 게 아니라는 것을 문득 직감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약간 자신없어하던 건 이 장소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확고함에서 퍼즐조각 하나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타티아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곧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선 지금도 꿈을 꾸는 기분이에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듣기 좋은 목소리.
그 앳된 목소리의 주인공이 공로 예술가 상을 받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인 건 지켜보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빠르게 모두를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이 향기와 박수, 그리고 이 무게에 비로소 현실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제가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할 현실.”
한 손에 안은 꽃다발 쪽으로 얼굴을 살짝 기울인 타티아나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하고는 다시 문화부 장관 쪽을 짧게 눈짓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무게 있는 상을 받기엔 어리고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지만, 지금까지 잘 해냈고 앞으로도 많이 기대해 주신다는 의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옅은 눈웃음을 보였다.
“다행히 전 부족함을 자각하는 만큼 앞으로도 할 일이 많음을 느껴요. 음악가로서 무척 행복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아델리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몰랐어.’
타티아나가 시상대에 오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사실 아델리나가 응원하는 부분은 이 시상식 자체를 잘 끝내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발을 헛디디거나 말을 더듬지 않고 잘 이야기하기만 한다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샌가 아델리나는 타티아나의 말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말 자체가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멘트 정도야 밤새 준비했겠지.
무거운 자리이니만큼 타티아나가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왔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대본이 필요 없을 정도로 준비를 충분히 했다 하더라도, 사람의 말에서 진정성을 느낀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그것을 정확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살짝 숨을 들이쉬고, 타티아나는 감사인사를 전해왔다.
“언제나 절 지지해 주신 아버지, 그리고 오빠. 감사합니다.”
가족들, 그리고 그녀를 돕는 집안의 사람들. 음반사 대표와 직원 등 몇몇 사람의 이름들이 빠르게 흘러간다.
아델리나로선 그들이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타티아나가 빠르게 언급하면서도 건성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분명히 느껴져 왔다.
이어 타티아나는 학교에도 감사를 표했다.
“존경하는 미하일 선생님, 구세프 선생님. 중앙음악학교의 모든 선생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 정말 감사합니다.”
친구들에 이르러서 짧게 끊어 준 것이 타티아나의 자제력과 판단력을 돋보이게 했다.
당연히 한 명 한 명 모두를 언급하고 싶었겠지만, 그러면 말이 너무 길어진다는 것을 계산한 것이다.
그녀는 말의 속도와 호흡 전부를 디테일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음악을 다루는 사람이라 그렇다기엔 뭔가 초인적인 능력처럼 느껴질 정도다.
빠르게 이름들을 언급한 그녀는 다시 호흡을 조절하며 말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사람의 집중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추위에 약한 제가 눈보라를 만나 떨고 있을 때, 주변을 녹이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주었던 건 전부 곁에 있어 준 분들 덕분이었습니다. 한 분이라도 없었다면 저 역시 이 자리에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눈빛이 주변을 스치면서 비단 지금 말한 사람들뿐만이 그 대상이 아님을 전했다.
타티아나는 그 전부를 끌어안듯, 한 손을 가슴 위에 올리며 말했다.
“지금도 전 그 따뜻함에 힘입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 따뜻함을 보다 많은 분들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 제가 음악가로서 살아가는 이유라 생각합니다.”
그 목소리와 태도에서 느껴지는 건 순수함뿐만이 아니었다.
기특함마저 쉽게 느끼기 어려울 정도의 묘한 박력이 타티아나에게서 느껴졌다.
아델리나는 지금 그녀가 대충 그럴싸한 말들을 달달 외워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타티아나는 스스로를 가까이에서 자각하고 진정 하고픈 말들을 찾아서 최선을 다해 꺼내어 놓고 있었다.
어떻게 어린 그녀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델리나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소감을 밝혔지만 타티아나처럼 가깝게 다가오진 않았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타티아나는 마치 누군가에게 맹세하듯 말했다.
“앞으로도 더욱 많은 활동을 하겠습니다. 수많은 선배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 음악이 필요한 곳엔 음악을, 그리고 이 순간에도 눈사태와 고전하고 있을 친구에겐 불꽃이 되어 주려 합니다.”
그 말에 아델리나는 지금까지 느낀 이 강렬한 설득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클래식 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는 타티아나가 누군지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문외한인 그녀라도 에르네스트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에르네스트가 겪은 사고와 무너지기 직전의 연주회를 두고 친구로서 타티아나가 했어야 했던 일들.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아델리나는 타티아나에 대해 검색해 보면서 그녀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도 보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그 일이 문화부의 눈에 들어서 에르네스트를 대신할 공로 예술가로 선택된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타티아나는 그것을 마냥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큰 부담감과 고뇌를 이겨내고, 그럼에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서 가까스로 발을 내디딘 것이다.
숭고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결단을 완전하게 이해할 순 없었다.
하지만 아델리나는 타티아나가 지금 정말로 큰 결단과 맹세로 앞에 서 있음을 느꼈다.
다시 한번 분명하게, 처음과 같이 곧게 선 자세로 타티아나는 말을 맺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크고 맹렬하게, 나아가겠습니다.”
지금까지 타티아나가 어떤 이력을 가지고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 공로 예술가로 인정받을 정도이니 분명 여러 활동들을 해 왔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타티아나가 굉장히 자중하고 있었다는 걸 아델리나조차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녀는 다친 에르네스트가 이겨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려 한다.
그리고 그 최선은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음악가로서 가능한 최대한을 해내는 일이었다.
그것은 아마 굉장할 것 같다고, 아델리나는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짧은 소감이 끝나고 박수가 터져 나와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이미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혀와 호흡을 지배한 타티아나가 발언을 완전히 마쳐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모두가 가슴이 저릿한 기분을 느끼며 타티아나가 숨을 내뱉길 기다렸다.
그때, 타티아나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눈이 오네요.”
마치 지시라도 받은 것처럼 타티아나의 시선을 따라 모두가 아트리움의 유리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10월 말, 첫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법에라도 걸린 기분으로 아델리나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이런 것까지 조종할 수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타티아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이 이 하늘을 덮고 세상을 덮는 섭리를 막을 수는 없겠죠.”
그녀는 눈보라나 눈사태 등 차가운 무언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덮쳐오는 것들을 단지 피하기만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현명함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도 안다.
“그러나 따뜻함으로 잘 견뎌 낸 사람들에겐 봄이 돌아오고 네잎클로버가 피어난다는 걸 저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싱긋 웃으며 타티아나는 주변을 돌아보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봄이 돌아오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좋은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크고 맹렬한 불꽃이 되겠단 타티아나의 말은 마지막 선언으로 구체화되었다.
아델리나로선 그 콩쿠르가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알지 못했지만, 주변의 분위기가 폭발할 듯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타티아나가 그곳으로 향하는 게 어떤 일이 될지.
타티아나는 작게 묵례했고, 곧 아트리움을 울리는 커다란 박수 세례가 그녀에게 향했다.
그 소리들은 마치 카펫처럼 단상 앞에 깔린다. 타티아나는 사뿐한 걸음으로 그 위로 내려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