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2화
박수를 받으며 다시 자리로 돌아온 나는 붉은 함에 든 증서를 펼쳐 보았다.
그 안엔 오늘 받은 훈장이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나,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정확하게 쓰여 있었다.
“…….”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것은 앞으로 향하기로 한 내 결정에 대한 증서이기도 했다.
그것은 훈장만 놓고 본다면 에르네스트와 보다 가까운 곳으로 향하는 길이었지만, 그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보자면 더 먼 곳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와 길게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리며 난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결단은 형체를 가지고 내 손에 쥐어졌다. 이젠 멈출 수 없이 난 나아가야만 했다.
‘잘못 이야기한 건 없겠지?’
입술을 꾹 깨물며 난 마이크 앞에서 했던 말들을 천천히 돌이켜보았다.
이 훈장을 내가 받는 의미, 사람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더 높은 곳을 향하겠다는 확고한 다짐.
에르네스트가 원했던 건 이런 것이겠지.
난 그를 귀찮게 만들기 싫어서 필요 이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지금 내가 다시 한번 일어서 움직일 수 있는 건 그가 그리해도 된다고 말해 준 덕분이었다.
후회하지 않겠다고, 그러니 갈 수 있는 곳까지 가 보라고 말해 준 것은 그와 내가 할 수 있는 약속이었으리라.
그 약속에 대한 증표로 난 오늘 사람들 앞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모두 밝혔다.
돌이킬 수 없도록 만들고 나면 반드시 해내야 할 목적으로 눈앞에 선명해진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던 시야가 먼 곳을 향하자 비로소 난 본래 해야 할 일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연주자로서 훈련된 머리는 절로 계산을 마친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 필요한 것들과 준비해야 할 것들. 내가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자기평가.
그 결론을 마주하고 나니 서서히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든다.
“타티아나.”
증서를 집어넣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옆에서 작게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델리나가 상기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마치 소녀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빠르게 속삭였다.
“혹시 눈도 내리게 한 거니?”
“……예?”
“그, 있잖아? 인공 눈이라던가.”
황당하단 얼굴로 바라보자 살짝 들떠 있던 그녀의 얼굴색은 곧 창피함의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미안해,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괜찮아요. 눈에 대한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를 하다 보니 보여서 했을 뿐이에요.”
“너무 자연스럽더라고.”
사실 갑자기 눈이 내려서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이후엔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했을 뿐이다.
말을 더듬거나 실수하진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이상하게 들린 건 없을까 싶어서 아델리나에게 어땠는지 살짝 물어보려는 찰나, 그녀가 먼저 말했다.
“아무튼 굉장히 좋았어. 네가 어떤 심정으로 이곳에 왔는지 알 것 같아. 음…… 네 친구에 대한 일은 유감이야. 그 애는 지금 괜찮은 거지?”
“치료 중이에요.”
“그래, 그래…… 분명 잘 될 거야. 네가 말한 것처럼. 눈은 그치고 또 녹기 마련이니까.”
아델리나는 아련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중얼거리더니 문득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한 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모두들 너희를 응원할 거야.”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내가 더 감사하지. 간만에 정말 좋은 걸 본 기분이거든.”
음악가가 음악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런 말을 듣는 건 쉽지 않겠지.
그리고 그 말은 마치 무대를 잘 마치고 내려와 들었을 때처럼, 내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다.
작은 목소리로 아델리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프세볼로트 장관님이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짧은 마무리 인사가 이어지고, 곧 사회자가 시상식의 끝을 알렸다.
“이상으로 시상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귀빈 여러분을 위해 로비에 리셉션이 준비되어 있으니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역시 꽤 큰 행사이다 보니 그냥 시상식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이후에도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로비로 통하는 중간 홀로 향하니 그곳엔 안내대로 간단한 핑거푸드와 음료 등이 테이블 위에 세팅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상을 받은 예술가들과 그들의 지인들이 서로 축하하며 인사를 나누고, 또 예술가들끼리도 친목을 다졌다.
난 그들 중엔 아는 사람이 없어서 살짝 구석진 곳으로 물러나 있는데, 그런 날 찾아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왔다.
두 사람은 내 양손을 잡더니 마치 자신의 일인 것마냥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멋졌어 타티아나!”
“너 어쩜 그렇게 말을 잘 하니? 얼마나 연습한 거야? 응?”
“아하하, 조금요.”
사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한 게 전부였지만, 그만큼 잘 해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았다.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친구들을 데리고 리셉션 테이블로 향했다.
일단 음식들을 하나씩 먹이면 조금 차분해질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진정한 건 단 음식 덕분이 아니라 아버지와 마주하고 나서였다.
“…….”
수행원분들과 함께하는 아버지는 이 자리에 들어오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여기저기에서 시선들이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쪽엔 신경도 쓰지 않고 나만을 바라보았다.
낮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른다.
“타티아나.”
“아버지.”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곧 자상한 미소가 입가에 맺혔다.
“장하구나.”
짧은 칭찬이었지만 난 오늘 이 일을 아버지가 정말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내게 고마워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눈길은 내 가슴 쪽에 달린 훈장으로 향했다가 증서로 내려갔다.
그런데 직접 보여 드릴까 싶어서 들어 올리자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난 네가 높은 훈장을 받은 것뿐만이 아니라, 소감으로 밝힌 이야기들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단다.”
“…….”
“네가 추위를 많이 탄다는 건 알고 있었지.”
이전부터 난 추위를 싫어했었다.
몸이 약해진 이후로는 더더욱 조심해야만 했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난 사실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그것을 알기에 늘 내 걱정이 많으셨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렇지 않으신 것 같았다.
“지금은 따뜻하니.”
“예.”
“그럼 됐다.”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는 격려하듯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앞으로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나가길 바라마.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니까.”
어차피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버지는 잘 아실 테지. 그리고 엇나가지 않을 것이란 역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어깨에 올린 손을 다시 내리며 웃었다.
그때였다. 옆에서 불쑥 아델리나가 끼어든 것은.
“저기.”
그녀는 곧장 내게 말을 거는 대신 아버지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아버지를 무시하는 건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따님과 잠깐 시간을 가져도 될까요? 사진 한 장 찍고 싶은데.”
“……디자이너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셨던 분이군.”
“기억해 주시네요? 맞아요. 아델리나입니다.”
아버지도 아델리나도 서로 첫인상이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다.
“그리하시죠. 오늘은 타티아나에게 귀중한 시간이 될 테니.”
“고맙습니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나서야 아델리나는 내 쪽을 바라보았다.
“허락받았다?”
“그냥 저에게 말씀하셔도 괜찮았어요. 아델리나.”
“먼저 그랬다가 너희 아버지가 언짢아하시면 말 걸기 어렵잖아.”
아델리나는 뭔가 천진난만하단 느낌이 들면서도, 마흔 살이 넘는 만큼 당연한 연륜이 느껴지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난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던 요청대로 아델리나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어 잠깐 조작하더니, 문득 내 옆의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도 불렀다.
“거기 친구들도 같이 찍을까?”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지?”
아나스타샤는 이미 아델리나의 팬이라고 했던 만큼 이 기회를 붙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발렌티나도 자신이 껴도 되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탁월한 사교성으로 금방 사양하지 않고 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우린 리셉션 자리에서 추억이 될 사진을 몇 장 남겼다.
아델리나가 다 찍고 난 후엔 아나스타샤의 스마트폰으로 똑같이 했다. 나중에 그녀에게 사진을 보내 달라 할 생각이었다.
촬영이 끝난 후, 아델리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넘겨 가며 사진을 확인하더니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이야, 너희 셋 다 사진도 잘 나오는구나. 방법을 아는데? 요즘 애들은 셀피를 많이 찍어서 그런가?”
무언가 혼자 고민하듯 사진들을 앞뒤로 왔다 갔다 하던 아델리나는 이윽고 고개를 들더니 날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놓치기 싫네. 음, 타티아나.”
“예.”
“내가 너와 사진을 조금 더 많이 찍어 보고 싶다고 하면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실까?”
“……예?”
갑작스러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아델리나가 조금 더 분명하게 원하는 바를 말했다.
“내가 꽤 오래전부터 디자인하고 있던 드레스가 있거든. 그걸 네가 입어 주었으면 해서.”
난 깜짝 놀랐다. 그리고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델리나가 패션 업계에서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 난 잘 모른다.
하지만 오늘 받은 대통령 표창이나 아나스타샤의 반응 등은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처음 본 내게 왜?
모델이 필요한 것이라면 내가 아니라 아나스타샤가 있는데.
“…….”
놀라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해서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아델리나가 살짝 떠보듯 물었다.
“곤란해하는 건지 놀란 건지 보니까…… 그냥 놀란 것 같네? 맞아?”
“예……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라서요.”
“왜 몰라? 할 수도 있지. 내가 베르체노프에 의상을 팔고 싶어 하는 사람일지도 모르잖아?”
갑자기 나온 직설적인 말에 난 당황했지만 듣고 보니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는 날 통해 쉽게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난 그녀가 직설적이어서가 아니라, 첫인상과 그 후에 날 대하는 모습 등을 총체적으로 따져서 그녀가 그렇게 날 사업 도구로만 보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난 사람을 보는 눈이 꽤 괜찮은 편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보이진 않아요.”
대번에 그렇게 이야기하자 아델리나는 되레 할 말이 없어졌는지 피식 웃기만 했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어 내게 막 건네주려다가 말고, 다시 말했다.
“그럼 저쪽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니?”
“다른 사람들이요?”
“응. 너랑 이야기하고 싶어할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아델리나가 등 뒤쪽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난 아까부터 곳곳에서 시선이 향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아버지에게 가는 것이 아닐까 했는데, 아델리나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아버지가 아니라 내게 향하는 것이라 말했다.
날 통해 뭔가 하려는 거라면 어렵겠지만, 내가 목적이라면 별로 어려울 것 없지 않나.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요.”
“쿨하네? 타티아나.”
아델리나는 마음에 든다는 듯 말하더니 명함을 손가락 사이에 넣고는 휙 흔들었다.
“그럼 이건 아버지에게 맡겨 둘게. 나중에 생각나면 물어봐 줘.”
내가 마음에 들면 그냥 나한테 주면 되는데, 아델리나에겐 여러 가지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정말로 다시 아버지에게 가선 명함을 건네며 무어라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생각보다 조금 길어졌고, 잠시 후 아버지는 문화부 장관을 만나고 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아델리나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차리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가고 잠시 우리 셋만 남아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저편에 머물고 있던 시선이 점차 강렬해지더니, 곧 내 옆으로도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난 그제야 이 사람들이 정말로 아버지가 아니라 내게 흥미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이가 지긋한 한 남성분이 점잖은 태도로 악수를 청하며 내게 말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반갑습니다. 그간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인사할 기회가 생기는군요.”
“아…… 감사합니다. 저기…….”
“메트너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 미그란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이 이렇게 직접 말을 걸어 올 줄은 몰랐기에 깜짝 놀랐다.
내가 놀라는 걸 본 미그란은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공로 예술가가 된 걸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저도 축하드려요.”
“하하, 고마워요. 그나저나…… 앞으로 활동을 많이 하겠다고 들었는데, 약간 관심이 생기더군요.”
그는 명함을 꺼내어 내게 건네주며 이어 말했다.
“저희 오케스트라의 레퍼토리는 너무 많아서 다 설명해 드리기 어려우니, 이 명함에 있는 홈페이지에 한 번 접속해서 봐 주셨으면 합니다. 보시고 혹 마음에 들어서 협연하고 싶다면 그때 한 번 연락 주시죠.”
“……알겠습니다. 꼭 찾아볼게요.”
그렇게 메트너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과 이야기를 하고 연락처를 받고 나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음 사람들이 다가왔다.
“공로 예술가 훈장 축하합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감사합니다.”
“저희는 이번에 연방 국가 표창을 받은 차스 콰르텟입니다.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해외 공연도 자주 다니죠. 실내악 연주에도 관심이 있다면 편하게 연락 주셨으면 합니다.”
“예, 그…… 표창 축하드려요. 명함도 감사합니다.”
교류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간이니만큼 이렇게 다가오는 사람들 역시 당연한 것이겠지만, 난 순식간에 이 공간의 중심이 내게로 향하자 조금 당혹스러웠다.
지금까진 아버지가 옆에 있어서 멀리 있던 예술가들이 지금은 거리낌 없이 내게 인사를 하고 악수를 청해 왔다.
정신없이 사람들을 보며 이름이 막 혼란스러워질 때였다.
간신히 조금 숨을 돌릴 틈이 있었고, 그제야 난 가방에 넣은 명함이 열 장도 넘는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얻은 것은 다만 훈장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진 몰랐던 사람들을 만나며 교류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인적 자원들.
내 주변을 둘러싸는 무언가가 조금 더 두터워진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며 난 앞으로 무엇을 더 해나갈 수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