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63화 (863/1,277)

##  863화

시상자들을 위한 리셉션도 슬슬 마무리되는 분위기에 접어들었다.

난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한 명 한 명 누군지 기억하려 애썼다. 너무 정신없이 많은 사람과 인사하느라 이름도 다 못 외울 정도였다.

간신히 기억나는 건 소속 정도여서, 몰래 명함들을 꺼내 보면서 이름을 다시 기억 속에 집어넣었다.

그중엔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이나 콰르텟의 리더뿐만 아니라 콘서트홀 관리자와 화가, 심지어 영화감독도 있었다.

모두들 각 예술계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는 사람들이니 알아두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렇게 오늘 만난 사람들을 되돌아보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명함첩 하나 사지 그러니?”

“그게 아니라 명함부터 만드는 게 우선인 것 같은데?”

“…….”

발렌티나의 제안을 들으니 솔깃했다.

받기만 하고 줄 게 없으니 기분이 묘했던 건 사실이었다. 어정쩡하게 감사인사밖에 할 게 없었다.

정말로 만들어야 하나? 얼마 전 에르네스트로부터 명함을 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 역시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겪고 나서 필요하다 생각했겠지. 그의 명함은 깔끔하고 멋스러웠다.

잠깐 고민하며 돌아보자 발렌티나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말했다.

“만들고 싶어 하네?”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앞으로 음악가들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에 그런 게 필요하겠단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당장 급하게 가지고 싶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발렌티나의 행동력은 나보다도 빨랐다.

“오늘 할까?”

“예?”

“하자구.”

내가 괜히 머뭇거리는 걸 이제 봐줄 생각 없다는 듯 그녀는 내 손목을 잡았다.

뭔가 반항할 틈도 없이 그녀의 손에 끌려나가다가, 복도에서 중간에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프세볼로트 장관님과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우리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시선들이 휙 날아온다. 난 움찔하며 멈춰 섰다. 일단 발렌티나에게 끌려가는 건 아버지에게 구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먼저 발렌티나가 명랑한 목소리로 선수를 쳤다.

“유리 아저씨, 혹시 타티아나랑 점심식사 하러 가도 될까요?”

이렇게 물어보면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하라 허락했다.

난 지금 이대로 끌려가면 점심식사만 하는 게 아닐 것 같단 직감을 강하게 느꼈다.

공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고 해서 이것저것 만들어 치켜세워 주려고 한다면 난 부끄러워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적당히 도망쳐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프세볼로트 장관님이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왔고, 난 빠르게 감사인사를 전한 후에 친구들과 함께 마린스키 극장을 빠져나왔다.

“…….”

“와.”

나오자마자 바뀌는 풍경에 우린 감탄사를 내뱉었다.

새하얀 눈이 세상을 얇게 덮고 있었다.

지금부턴 아마 몇 개월 동안 지겹단 생각이 들 정도로 봐야 할 풍경이지만, 이번 겨울의 시작을 두 눈으로 본다는 건 조금 특별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우린 잠깐 서서 마린스키 극장 옆의 공원과 도로 등을 바라보았다.

다들 마음 같아선 산책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지금 이 얇은 드레스 차림으로 돌아다녔다간 감기에 걸리기 딱 좋았다.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것도 준비해 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

“너희 나랑 같은 생각 하고 있니?”

우린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니 이 애들과 쇼핑을 하러 간 것도 너무 오래된 일이었다.

에르네스트가 다치고 난 후는 물론이고 그 전에도 연주회 준비 때문에 좀처럼 모이지 못했으니까.

지금은 핑계도 좋고 타이밍도 좋았다. 난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빅토르에게 전화했다.

그에게 부탁해서 향한 곳은 근처의 백화점이었다.

“……사람들이 엄청 보네.”

“보라고 하든가.”

“빨리 가요. 저희.”

드레스를 입고 백화점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린 빠르게 근처 기성복을 파는 가게로 향했다.

그런데 급한 내가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싸고 평범한 티셔츠를 집어 들자,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도끼눈을 하고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이 애들은 자기 건 신경도 안 쓰고 내가 뭘 하는지만 감시하는 것 같다.

별수 없이 조금 더 신경 써서 살펴보았다. 어차피 고른 건 티셔츠였지만.

잠시 후, 우린 평범한 차림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괜찮지 않니?”

“막 고른 거 치곤 좋네.”

드레스를 입고 돌아다니기 귀찮단 이유로 백화점에 와서 위에서 아래까지 몽땅 사 버린다는 건 굉장한 사치처럼 느껴지지만, 매장 자체가 그리 비싼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닌 덕분인지 아우터와 신발까지 계산해도 생각보다 그리 비싸지 않았다.

입고 온 드레스와 구두는 종이백에 잘 집어넣었다. 뭔가 기분이 들떠서 더 돌아다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종이백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어딘가 있을 빅토르를 불러 맡기기도 미안해서, 우리는 다시 차로 돌아갔다.

차 앞에 서 있던 빅토르는 트렁크를 열어 주며 말했다.

“조금 더 있다가 오실 줄 알았는데요.”

“쇼핑 자체는 다음에 조금 더 느긋하게 하려고요. 지금 시간이 애매하기도 하고.”

“시간…… 아, 그렇군요.”

리셉션에서 핑거푸드 등을 조금 먹어서 그리 배고프진 않았지만, 앞으로 더 돌아다닐 것을 생각하면 제대로 미리 먹어 두는 게 나았다.

각자 먹고 싶은 건 상이했지만 의견을 모아서 파스타로 결정했다. 근처의 파스타 레스토랑이 괜찮은 곳이 있기도 했고.

테이블을 잡고 주문을 한 뒤에, 발렌티나는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검색해 보더니 호들갑을 떨며 내게 보여 주었다.

“타티아나, 이거 봐 봐! 벌써 네 이야기가 뜨고 있는데?”

“……시상식 전반의 내용이잖아요?”

“그런데 메인 사진은 네 사진이잖아.”

인터넷 뉴스에 벌써 이번 시상식에 대한 기사가 올라왔다.

오늘 다양한 상을 받은 사람들만 열 명도 넘는다.

때문에 내용의 대부분은 그 모든 사람들의 분야와 소속 그리고 상의 종류 등에 대해 짧게 설명하고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에 나온 내 이름은 그냥 넘어가는 게 아니라 이전까지의 짧은 이력들까지도 모두 소개되고 있었다. 몇몇 전문가의 의견까지 첨부해서.

주목을 받게 될 것이란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 대대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열여섯 살에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은 것만으로도 이런데, 그보다 훨씬 전에 받은 에르네스트는 도대체 얼마나 유명세를 탔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어딜 가나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발렌티나가 싱글벙글 웃으며 뉴스 기사들을 찾아내어 내 이름이 나오는 대로 보여 주었고, 곧 그 놀이엔 아나스타샤도 합류했다.

내가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고 곤란해하는 걸 재미있어하는 느낌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이렇게 보여 줘도 너무 당당해서 좀 그랬는데 말야.”

“맞아 조금 재수 없긴 했지.”

“…….”

당사자가 앞에 없다고 대놓고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없는 말을 지어내어 흉을 보는 것도 아니니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정말로 에르네스트라면 그랬을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난 지금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다행스러움을 느꼈다.

여전히 병실에 있을 그를 생각하면 쉽게 농담하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모두 그런 걸 생각하면서도, 그렇기에 더더욱 일부러라도 언급해 준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어디론가 가 버리거나 하지 않았다.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거란 믿음이 이젠 우리 사이에 공고했다. 지금 난 그 정도만으로도 행복했다.

“여기 진짜 괜찮다. 그치?”

“맛있어 보이네.”

곧 주문했던 파스타가 나왔다.

우린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밖에 나와서 식사를 한 것도 쇼핑을 한 것만큼이나 오랜만이었다.

조금 더 느긋하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우리는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점심식사를 가볍게 마치고 난 뒤엔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고 싶어 했다.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나는 당연히 디카페인 차를 주문했고, 계속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우리는 찻잔을 기울였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발렌티나를 불렀다.

“저기, 발렌티나.”

“응?”

“정말로 식사하려고 절 끌어당겼던 거네요?”

그런데 발렌티나는 내 말을 듣자마자 빠져나갈 생각 말라는 듯 딱 잘라 대답했다.

“아니, 이제 갈 건데? 명함 만들러.”

“……정말로 가요?”

“그럼 뭐 하게?”

딱히 생각나는 게 없긴 했다.

그렇다고 지금 이제 쇼핑도 식사도 간소하게 했으니까 각자 집으로 가자고 하기엔 너무나 아쉽다.

나 역시 어떻게 해서든 이 애들과의 시간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명함을 만드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기도 했고.

그사이 아나스타샤가 빠르게 근처를 검색했다.

“내가 하나 찾았어. 전화해 볼게.”

“행동력도 빠르네. 마음에 들어.”

발렌티나가 흡족하게 말했고, 아나스타샤는 눈을 흘겼지만 별말 않고 스마트폰을 귀에 붙였다.

두 사람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 주면 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기쁘게 따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지금 바로 들러도 되는지에 대해 문의한 아나스타샤는 짧은 통화를 마치곤 우릴 돌아보았다.

“가 볼까?”

명함 디자인과 인쇄를 하는 가게는 정말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일부러 눈을 밟으며 걸어서 가게로 향했다.

미리 전화를 한 덕분일까, 문을 열고 들어서자 혼자 앉아 있던 사장님이 일어나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운차게 일어선 사장님은 우릴 눈으로 훑더니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봐도 너무 어리고 명함 같은 걸 필요로 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명함을 만들고 싶으시다고…… 혹시 용도가 어찌 되시는지?”

용도가 딱히 있을 리가 없었다. 난 그냥 필요성을 왜 느꼈는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명함을 받았을 때 저도 돌려 드릴 만한 게 필요해서요.”

“아, 그런 비즈니스용 명함이라면 이런 디자인이…….”

“비즈니스는 아니고요, 그…….”

“?”

뭐라 설명해야 할지 어려워져서 잠깐 단어를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발렌티나가 내 어깨를 잡으며 크게 외쳤다.

“이 애가 오늘 훈장 받았거든요!”

“공로 예술가라고 하니 같이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요. 오늘 명함을 잔뜩 받았는데 인사만 하니 민망하다고 하네요.”

“그, 그만하세요…….”

발렌티나에 이어 아나스타샤까지 거들자 얼굴에 열이 오른다. 갑자기 더워졌다.

사장님은 갑자기 훈장이니 공로 예술가이니 하는 말에 잠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날 유심히 보며 말했다.

“와우…… 공로 예술가요? 죄송하지만 혹시 나이가? 굉장히 어려 보이시는데.”

“열여섯이에요…….”

“맙소사. 사인받아도 됩니까?”

클래식 음악에 그리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냥 맞장구쳐 주는 건가 싶었는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장님은 정말로 사인펜과 무슨 판넬 같은 걸 가지고 왔다.

장난을 받아 주는 거 아니었어?

하지만 정말 진지한 표정이라서 난 별수 없이 진짜로 사인을 해 줘야만 했다.

사인을 받아 본 사장님은 잠깐 멍하니 그걸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판넬을 집어넣고는 아까보단 더 정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이야기했다.

“그럼…… 음, 알겠습니다. 저번에도 예술가로 오셨던 분이 계시죠. 그쪽 디자인을 조금 보여드리겠습니다.”

잠깐 기다리니 그는 곧 명함첩을 몇 개나 가지고 왔다. 그 안엔 명함들이 수백 개도 넘게 준비되어 있었다.

보기 편하게 만들어놓은 템플릿이었다.

잠깐 들여다보고 있자 사장님이 이어 설명했다.

이것 중에 마음에 드는 걸 그대로 택하거나 레퍼런스로 참고해서 베리에이션을 줘도 되고, 아니면 아예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어 완전히 새로 디자인해도 된다고 한다.

그야말로 원하는 대로 전부 들어주겠다는 말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조금 더 신경 써서 명함들을 보았다. 각양각색의 명함들은 정말 그 자체로 그 사람의 개성을 드러내는 예술품처럼 보였다.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서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거 예쁘다.”

“그러네? 이것도.”

몇 개씩이나 후보들을 나열하다가 말고, 발렌티나가 손끝으로 그 위를 그으며 말했다.

“여기 위쪽에 러시아 공로 예술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라고 쓰는 건 어떠…….”

가만히 듣고 있던 난 두 사람을 조용히 불렀다.

“두 분.”

“응?”

“같이 만들어요. 저랑.”

난 퉁명스레 말했다.

어쩐지 혼자만 이렇게 동떨어진 무언가처럼 취급당하는 건 싫었다.

물론 큰 상을 받았으니까 오늘만큼은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보단 같이 놀러 나온 지금 이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게 난 더 기쁘다.

입술을 내밀며 바라보고 있자 두 사람은 조금 당황한 듯 말했다.

“우리가 왜?”

“아직 만들어 봐야 쓸 곳도 없…….”

“그런 거 몰라요. 그냥 만들어요. 그리고 저한테 주시면 되잖아요.”

논리도 뭣도 없는 대꾸에 할 말을 잃은 듯 아나스타샤가 눈을 깜빡였다.

발렌티나도 똑같은 표정으로 날 보더니, 느닷없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그냥 만들라니. 아깐 그렇게 잘 말하던 애가.”

“제가 이상한가요?”

“아니야, 아니. 알았어. 알았어. 그럼 우린 몇 장만 할게.”

기분 좋게 웃으며 발렌티나는 너무나 좋아했다.

단순히 재미있어하며 또 놀리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기뻐한다는 것이 느껴져서 나도 덩달아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즐겁게 웃는 우리 사이로 사장님이 찬물을 확 끼얹었다.

“죄송하지만 디자인이 들어가니 최소로 주문하셔도 200장은 해 주셔야…….”

“…….”

신나게 웃던 발렌티나의 얼굴은 200장이나 되는 명함을 주문하면 어디다 써야 할지 고민하는 심각함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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