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4화
샘플로 나온 명함을 쥐고 요리조리 돌려보던 발렌티나는 마음에 쏙 드는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너무 귀여운 거 아닌가 몰라.”
“나도.”
한참이나 디자인을 고른 두 사람은 각각 원하는 것들을 찾아냈다.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건반이 한 면을 따라 그려져 있는 디자인이고, 발렌티나는 작은 곰이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기본이 될 명함을 찾아낸 뒤 컴퓨터로 원하는 대로 수정하는 것까지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명함을 만드는 과정은 진지하게 비즈니스를 생각한다기보단 놀이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둘 다 기본적인 센스가 좋은 편이라서 그 결과물은 상상 이상으로 괜찮았다.
“…….”
나 역시 내 몫으로 받은 샘플을 앞뒤로 돌려보았다. 제일 깔끔하고 무난한 디자인이었다.
“넌 그걸로 괜찮아?”
“너무 미니멀리즘한 거 아닌가.”
두 사람에 비하면 특이할 것도 없고 재미없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 만드는 것이니만큼 이 정도면 너무 화려하게 하는 건 이상할 것 같았다. 애초에 난 그런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당연히 명함에 드러나는 정보도 간단하게 내 이름과 공식 연락처 그리고 이메일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발렌티나의 농담처럼 공로 예술가라고 써넣는 일은 절대 없었다.
에르네스트도 그런 것 없이 심플하게 했는데 내가 이제 와서 내 이름 앞에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렇게 우린 각자 디자인을 결정한 뒤 제작을 의뢰했다. 매수는 최소라 했던 200장. 그보다 많이 만들어 봐야 더 쓸 곳도 없을 것 같았다.
대신 나중에 더 필요하면 꼭 이곳을 찾겠다는 약속을 해 두었다.
“하하, 첫 명함이니 이 정도면 충분하죠. 알겠습니다. 그럼 완성은 다음 주 월요일까지 될 것 같습니다. 완성되면 택배로 보내 드릴까요?”
“와서 찾아갈게요. 그편이 나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작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계약을 마치고 명함첩도 하나 사서 가게 밖으로 나오니 그사이 눈은 그쳐 있었다.
생각보다 꽤 오래 디자인을 고르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뭔가 연주자로서 큰일을 해냈다는 기분이 든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도 비슷한 기분인지 약간 들떠 있었다.
“난 오늘 내가 명함까지 만들 줄은 몰랐지 뭐니.”
“나야말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즐거움은 보다 깊은 추억으로 남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번엔 형태까지 남게 될 테니, 더더욱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전 즐거웠어요. 다 같이 하니까 더욱.”
“그래…… 네가 시킨 거였지?”
“만들기 싫었나요?”
어떻게 대답할지 다 알면서 일부러 물어보았다.
발렌티나는 다시 자신의 명함을 햇빛에 이리저리 비춰 보더니 말했다.
“아니, 재미있었어. 그치? 아나스타샤.”
“안 했으면 후회할 뻔했지.”
“맞아. 맞아.”
두 사람은 지켜보기만 하고 나 혼자만 명함을 만들었어도 같이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재미있긴 했겠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각자 추억을 형태로 지닐 순 없었을 것이다.
난 약간 억지를 써서라도 우리 모두가 다 같이 하자고 했던 것을 정말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발렌티나는 오늘 있었던 체험이 정말 즐거웠는지 기쁘게 웃다가, 문득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있잖아, 우리 서로 명함이나 교환하자. 애초에 그러려고 만들기로 했던 거잖아?”
“그럴까.”
나도 오늘 모르는 사람들의 명함을 열 장도 넘게 받았는데 정작 친구들의 명함을 받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받은 샘플 중에서 다시 두 장을 꺼내는데, 발렌티나가 자신의 것을 내게 내밀며 경어까지 써 가며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렌티나 페트로브나 메체티나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아, 어…… 예.”
“예, 라고 말할 게 아니라! 너도 줘야지!”
“그…… 그래요.”
백 퍼센트 장난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조금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냥 줬더니 발렌티나는 건성으로 하지 말라며 역정을 냈다.
결국 난 풀네임을 말하며 다시 정중하게 그녀에게 명함을 줘야만 했다.
그다음은 아나스타샤의 차례였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발렌티나가 뭘 하든 곧이곧대로 따라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뭘 이상한 상황극을 다 한대…… 그냥 주고받으면 되지 않니?”
“아, 재미없게!”
“에휴. 이미 사인도 다 교환했으면서 뭐.”
그리고 보니 지난봄, 세연이 왔을 때 우리는 모두 모여서 사인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니 그리 어려울 게 없다는 기분이었다.
물론 지금은 세 명뿐이었지만.
예전 일을 생각하고 있자니 아나스타샤가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자, 타티아나.”
“고마워요…….”
난 그녀와 명함을 교환하고는 바로 집어넣지 않고 잠시 내려다보았다.
이 피아노 건반들은 아나스타샤가 앞으로도 자신의 정체성을 피아노 연주자에 중점적으로 두겠단 의미로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심플하게 만든 나나 곰 캐릭터를 선택한 발렌티나가 피아노 연주자가 아니란 건 아니지만, 아나스타샤의 느낌은 조금 더 확고한 부분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나스타샤는 발렌티나를 돌아보았다.
“너도, 발렌티나.”
“흥.”
“이거 어떻게 하더라? 던지는 법이 있었는데…….”
“잠깐! 너 그거 나한테 던지려는 거야!?”
“사과에 카드 박는 영상 보면서 배웠었거든.”
“그런 걸 왜 배우는데!?”
괜히 발렌티나가 장난을 치려고 들자 아나스타샤는 명함을 든 손을 막 휘두르려는 것처럼 자세를 취했다.
그것만으로도 발렌티나는 혼비백산해서 거리를 두며 도망쳤다.
아나스타샤가 진심으로 던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겁먹은 표정이었다.
물론 아나스타샤가 아무리 온갖 기술에 능해도 이런 종이 카드로 사람을 공격할 순 없겠지만, 난 그래도 겁먹은 발렌티나가 불쌍해서 아나스타샤를 얼른 말렸다.
아나스타샤는 한 번 봐주겠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렸고, 발렌티나는 마치 맹수에게 다가오듯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그녀와 명함을 바꿔갔다.
늘 있는 일인데도 난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명함을 만드는 일도 끝났고, 눈도 그쳤다. 그리고 아직 오늘 하루는 잔뜩 남아 있었다.
***
잘 놀았다는 듯 발렌티나가 기지개를 쭉 켰다.
“영화 재미있었지? 보길 잘했어. 안 그래?”
오후 내내 돌아다니다가 약간 지쳐서 쉴 겸 들어갔던 영화관이었다.
여러 영화들이 상영 중이었지만 마치 우리 보라고 틀어놓은 것처럼 프란츠 리스트의 생애를 그린 영화가 막 개봉해서 상영 중이었다.
그걸 보고도 다른 걸 볼 수는 없어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나스타샤는 두 친구와 함께 그 영화를 봤다.
리스트의 생애를 거의 년도별로 꿰뚫고 있는 그녀에게 있어서 영화 내용은 거의 다 아는 것에 가까웠다.
다만 1800년대 당시의 연주 연출을 하는 방식과 드라마틱한 부분이 조금 자극적이어서 흥미로웠다.
그런데 자꾸 발렌티나가 재밌지 않냐고 꼬치꼬치 캐묻기에 아나스타샤는 일부러 심드렁하게 말했다.
“글쎄, 그림은 예뻤는데 정작 피아노 내용이 약간…….”
“넌 뭘 그렇게 따져? 그냥 재미있으면 됐지!”
“우리가 안 따지면 누가 따지니?”
“……그런가?”
피아니스트가 꼼꼼하게 보지 않으면 누가 보느냐는 말에 발렌티나는 또 듣고 보니 그렇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렇게 귀여워도 되나 싶다.
그렇게 발렌티나와 아옹다옹하는 사이, 타티아나는 말없이 다시 영화 포스터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에 봤던 것과, 다 보고 나서 보는 건 또 감상의 시점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발렌티나를 조용히 시킨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그녀의 양어깨는 자연스럽게 축 늘어져 있었다.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편안해한다는 증거였다.
타티아나가 조금이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아나스타샤는 오늘 하루에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후, 포스터에서 눈을 뗀 타티아나가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영화 보길 잘했어요.”
“그치?”
“예.”
그리고 타티아나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살짝 고민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이윽고 타티아나가 예상하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곧 해가 지겠네요. 저기, 두 분…… 오늘 약속 없으시다면 제가 초대해도 될까요? 저녁 식사 함께 했으면 해요.”
오늘 하루 쭉 책임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주말이기도 하니 그게 자연스럽게 내일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되더라도 괜찮았다. 딱히 안 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야 괜…….”
“오늘 특별히 파티 같은 걸 계획해뒀던 건 아니지? 다른 사람들을 부를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바로 대답하는 발렌티나의 말을 끊으며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에게 조금 더 깊게 물어보았다.
타티아나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냥…… 저희 가족들만…….”
“그럼 오늘은 가족들이랑 좋은 시간 보내. 할 이야기도 많잖니?”
“그래도…….”
“우리도 마음 같아선 오늘 하루 종일 축하해 주고 싶긴 한데, 네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좋겠어.”
사실 상황만 놓고 보자면 타티아나는 며칠이고 축하를 받아도 모자랄 상황이다.
공로 예술가 훈장이라는 건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타티아나가 훈장 수훈 자체를 놓고도 안 받겠다고 말했었던 걸 아나스타샤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타티아나가 지금 저녁에도 뭇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으며 그녀 스스로를 위할 생각이 없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지금 타티아나가 진짜 바라고 있는 건 뭘까.
아나스타샤의 생각은 거기까지 닿았고, 때문에 이쯤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놓아주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던 타티아나는 미안하다는 듯 작게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요.”
“그래, 그러자.”
그렇게 이야기가 결정될 때까지 발렌티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눈치가 워낙에 빠른 아이라서 지금 왜 저녁 초대를 거절하는 쪽이 나은 상황인 건지 어느 정도 이해한 모양이었다.
타티아나는 빅토르에게 부탁하여 두 사람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 했다. 그것까지 거절할 순 없어서 아나스타샤는 순순히 차에 올랐다.
그리고 집 앞까지 다다랐을 때, 발렌티나도 같이 내렸다.
“우리 집까지 가려면 더 돌아가야 하잖아? 그러지 말고 가. 가서 푹 쉬어.”
“……알겠어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응. 다음 주에 봐.”
“다음 주에 뵈어요.”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타티아나를 태운 검은 벤츠는 다시 출발해서 시야에서 사라졌다.
차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 종이백 몇 개와 가방을 든 두 사람만이 길가에 남았다.
먼저 말을 건 것은 발렌티나였다.
“왜 그랬어?”
“응?”
“저 애는 우리가 같이 있어 주길 바랐을 텐데.”
모처럼 초대받은 저녁식사를 아나스타샤가 거절해서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발렌티나는 순수하게 지금 이 상황이 정말 옳은 것인지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나스타샤는 거기에 확신을 가지고 답할 수 없었다.
왜냐고 묻는다 한들 잘 모르겠단 뜻으로 힘없이 웃어 보이자 발렌티나가 이전까지의 장난기 많던 표정을 싹 지우고는 진지하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뭔진 모르겠지만 그러지 마, 아나스타샤.”
“타티아나도 배려해야지. 저 애가 파티 같은 걸 할 기분이었다면 정말 제대로 했을 거야. 그런데 아니라잖니?”
“그게 아니라, 네 기분은 어떤데?”
처음에 훈장을 거절하려고까지 했던 타티아나의 기분을 배려하는 것으로 넘기려던 아나스타샤는 순간적으로 파고드는 발렌티나의 예리한 지적에 움찔했다.
말없이 바라봐도 발렌티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이 애가 왜 이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이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사고를 겪은 직후, 이상증세를 보였던 건 타티아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도 며칠이나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그것을 두고 발렌티나가 직접적으로 캐물어 본 적은 없었지만, 아나스타샤가 심각하게 문제를 느낄 어떠한 일이 있었다는 것쯤은 꿰뚫어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못할짓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나스타샤는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난 괜찮은데?”
“진짜로?”
“그래. 진짜.”
“……알아서 해. 난 몰라.”
발렌티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정말 피곤하고 못 살겠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괜히 그녀의 팔을 잡으며 장난스레 흔들었다.
살짝 짜증을 내며 발렌티나는 떨쳐내려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결국은 져 준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흔드는 대로 팔을 내버려 두었다.
아나스타샤가 살짝 제안했다.
“잠깐 올라가서 차라도 마시고 갈래?”
“아줌마 계셔?”
“응. 아마도?”
“그럼 인사하러 갈래.”
어쨌거나 착한 애라니까.
아나스타샤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