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65화 (865/1,277)

##  865화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를 내려주고 나서 고개를 드니 완전히 저녁이었다.

지금까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피로감이 밀물처럼 찾아든다.

정신의 백사장을 덮치는 피로는 견고하게 쌓아올려놓았다 생각한 모래성을 다시 본연의 형태로 무너뜨린다.

아무것도 없이 평평하게 기억들이 늘어서 흩어진다.

아버지와 함께 볼쇼이 극장으로 향했던 일, 아델리나와 만나 친해진 것,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고…… 다른 예술가들과 인사하고…….

나른하게 스쳐지나가는 기억들을 보고 있자면, 아직 윤곽을 가지고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 있어 머뭇거리게 된다.

두 친구의 미소와 웃음소리는 아직도 선명하다. 난 그 아이들과 한 대화를 한 단어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기억할 수도 있었다.

‘그 애들과 있는 건 행복해.’

예쁘고 착한 아나스타샤나 귀여운 발렌티나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도 아무 생각 없이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곤 한다.

실제로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오늘도 함께 명함을 만들거나 영화를 보러 갔었던 뒤풀이 같은 일정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평범했다.

하지만 그 평범함이 내게 있어선 훈장을 받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너무나 간단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편안한 기분이 든다.

물론, 역설적이게도 이런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리라.

“…….”

난 두 사람이 정말 많은 걸 참고 견디며 또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안다.

우리 관계를 단 한 사람이라도 우습게 생각했다면 진즉에 무너졌을 관계다.

때문에 우린 이 관계를 소중하게 지키려 노력했다. 노력 없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건 없다.

거기엔 어떠한 희생들이 있는 걸까.

잠깐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이 희생하고 있는 부분은 너무나 많았다.

단지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의무감을 넘어서, 행복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우린 해답을 찾아내려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서서히 피로에 융해되는 정신 위로 두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가 아른거리며 떠오른다.

오늘 마지막으로 저녁까지 함께 했다면 좋았을 텐데.

왜 아나스타샤는 이쯤하고 돌려보내려 한 걸까.

그리고 난 그걸 왜 받아들였지.

‘왜냐면…….’

난 흐릿하게 스쳐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저 멀리 어딘가에 갇혀 복귀를 위해 힘쓰고 있을 한 사람을 떠올렸다.

늘 내 가슴 한편에 박힌 못처럼 그의 존재를 자각할 때면 난 아릿한 통증과 함께 집중력을 잃곤 했다.

속박에서 벗어나 이젠 나아가야 할 때임을 알기에 참고 버틸 수 있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까지 완전히 끊어낼 순 없었다.

사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에르네스트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진 모르겠다. 사실 이미 난 충분히 그에게 설명했으니까. 내가 그리 강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걸.

그와 함께하기로 했던 듀엣 무대를 혼자 해내어 공으로 인정받고 큰 상을 받게 된 것에 대해 결코 편한 마음이 아니라는 걸.

그걸 이해하면서 내 등을 밀어 준 에르네스트를 지금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이미 했던 이야기나 되풀이하면서 또 의도치 않게 그를 노력하고 희생하게 만들 테지.

왜냐하면 에르네스트는 분명히 잘 되었다고 하며 축하해 줄 테니까.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믿지만 아무 노력 없이 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계속 그를 귀찮게 만드는 건 반대로 배려를 강요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

가만히 있으면 내 생각은 자꾸만 어둡게 변하려 한다.

그것은 비단 내 주변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종국엔 내 스스로에게 향해 존재의 이유 자체를 퇴색시키고 무너뜨리려 든다.

만약 내가 행운의 네잎클로버가 아니라 저주의 쐐기풀 같은 이유로 이곳에 있는 것이라면, 자연상에 그저 존재할 뿐인 식물과 달리 난 그것을 그저 받아들이고만 있을 순 없을 테니까.

‘정신 차려.’

혼자서 머릿속을 빙글빙글 도는 생각이 다시 제멋대로 튀어나간다는 것을 느끼고 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정말 스스로를 가누는 것조차 힘들고 귀찮다. 똑바로 앉으려 애썼다. 앞에서 운전 중인 소로킨과 빅토르를 보니 비로소 정신이 조금 든다.

혼자라는 자각이 정신을 덮치면 종종 이상한 생각들이 들곤 하지만, 난 이를 악물고 떨쳐내곤 했다.

이건 내 친구들의 노력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다들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 하고 있는데 정작 내가 스스로 힘을 잃고 만다면 모든 것이 너무 허무하다.

아나스타샤가 왜 날 더 이상 자극하지 않으려고 하는지 난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안다.

그 이유가 무색해지지 않도록 협조해 주어야 하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당분간은.

“…….”

창밖을 바라보며 가슴속에 치미는 충동도 잠재웠다.

아나스타샤는 아마 내가 지금 바로 병원으로 갈 것이라 예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녀가 날 이쯤에서 보내 준 만큼 나 역시 오늘은 이쯤 할 생각이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오늘 에르네스트를 만나는 건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이 무거운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을 때, 서로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봐도 괜찮겠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지난 2주 동안에도 그랬었으니까.

혼자 하는 생각이 들불처럼 화르륵 내 정신을 불사르고 지나가고 나면 잿더미 속에서 난 되레 조금 평온함을 느끼곤 했다.

그땐 누구와 이야기하더라도 크게 문제없이 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난 소로킨에게 부탁했다.

“소로킨. 잠깐 돔 끄니기로 가 주시겠어요?”

“책 사실 것 있습니까?”

“예. 그리고 악보도 찾아보고 싶어서요.”

“알겠습니다.”

난 다시 팔짱을 끼며 좌석에 등을 뉘었다.

책도 악보도 잔뜩 사야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건 내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곤 한다. 난 그런 것들을 대부분 종이 위에서 읽어냈다.

오늘 난 사회적으로 한 계단 발돋움했다.

훈장 받고 명함을 만든 일로 사회적 운운하는 게 스스로 생각하기에 조금 우습긴 하지만, 모종의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책임감들은 내가 보다 멀쩡하게 생활할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 중 하나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해답은 아닐지라도 일말의 힌트가 종이 위에 있을 거라 기대하며 난 조용히 앞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소로킨은 돔 끄니기에 날 데려다주었다. 아나스타샤의 집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거리였기에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

잡지가 있는 곳을 스쳐 지나가 일반 소설들이 있는 곳에서 살짝 구경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책들을 고르고 있었다.

난 그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려고 했다가, 이곳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얼굴을 보고는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

에르네스트 역시 날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냐는 것 같다.

그는 여전히 팔에 깁스를 차고 있었지만, 환자복 대신 편안한 셔츠와 카디건 차림이었다.

수술을 마치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된 이후로 그는 병원 밖으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덕분에 학교에 오기도 했었고.

이번에도 그래서 근처에 있는 돔 끄니기에 책을 사러 온 것 같았다.

우리는 가는 곳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동선이 겹쳐서 이렇게 만나는 일이 종종 있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하필 지금이 내가 병문안을 가지 않고 그냥 책만 사서 집으로 가려고 했던 타이밍이었단 점이다.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 파고든 변명은 당연히 하나뿐이었다.

“책 사서 가려고요…….”

“……어.”

당황해하는 건 에르네스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린 한동안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내 쪽이었다.

“그, 컨디션은 어떠신가요? 혼자 나와도 괜찮나요?”

“응…… 괜찮아. 그래서 잠깐 나왔어. 바람도 쐴 겸.”

“바람이 차요.”

“그래서 이렇게 뭐라도 걸쳤잖아.”

끝말잇기와도 같은 대화가 몇 번 왔다 갔다 하니 더더욱 어색해졌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 사이의 간격은 더욱 가까워져 있었다.

가만 올려다본 그의 표정엔 여러 의아함이 떠올라 있었다.

오늘 시상식은 어떻게 되었는지,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어디 가고 이 시간에 여기에 혼자 있는지, 정말로 책을 사서 병문안을 오려고 한 건지.

여러 가지 묻고 싶어 하는 얼굴로 그는 날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위엔 다른 사람들이 빽빽이 차 있었다.

그런데도 무척이나 조용해서 사담을 나누기에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긴 프라이버시가 보호되는 공간이 아니니까 누군가 알아볼지도 모르고, 여러모로 그와 함께 오래 있어서 좋을 것 같진 않았다.

에르네스트도 자리를 옮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난 살며시 제안했다.

“저기…… 바로 병실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니라면……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시겠어요?”

“지금?”

“예.”

“어…… 그럴까?”

“나가죠.”

뭔가 주저하는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소로킨은 에르네스트를 보더니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별말 하진 않고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는 빅토르도 불러들였다.

잠시 후 난 소로킨에게 부탁했다.

“조용한 카페로 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 저녁 시간에 조용한 카페를 찾으려면 평범한 곳으로는 안 된다.

그 점을 잘 아는 소로킨은 내가 요구한 곳을 정확하게 찾아내어 데려다주었다.

몇 분 안 걸려 도착한 카페는 3층이나 되는 큰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안의 1층은 사람들이 공개된 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2층부터는 달랐다.

저번에 문화부에서 나온 사람들과 만났던 파인 다이닝처럼 프라이빗룸이 보장되는 카페였다.

홀 안을 돌아다니던 웨이터가 우릴 보더니 안내해 주겠다며 다가왔다.

난 옆의 에르네스트를 힐긋 보고는 마치 무슨 비즈니스를 하러 온 사람인 것처럼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방이 있나요?”

“두 분이신가요?”

“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딱히 예약을 하진 않았지만 다행히 자리가 있는 듯했다.

2층으로 올라간 우리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정말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세팅된 아담한 방이었다.

측면을 두른 창문에도 블라인드가 쳐져 있어서 원한다면 언제든지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난 에르네스트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웨이터가 내려놓은 메뉴판을 잠깐 보고는 디카페인 차와 작은 케이크를 하나 시켰다.

저녁은 집에서 먹어야겠지만, 그렇다고 정말 차만 마시고 갈 생각은 없었다.

에르네스트도 덩달아 홍차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나가고 방문이 닫히자 온전히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옆에 사람도 없으니 더더욱 침묵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일부러 그 침묵을 쫓아내듯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차 마시러 온 것 치고는 좀 먼데?”

“아, 당연히 데려다 드리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런 곳에 올 줄은 몰라서…….”

그는 묘하게 자신 없는 어투로 말했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처음 돔 끄니기에서 만난 건 조금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여유를 찾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는 여전히 편하게 있질 못했다.

난 덜컥 불안해졌다. 괜히 차 마시러 오자고 한 걸까. 막상 오니까 이렇게 불편해할 줄은 몰랐다.

또 물어보면 괜찮다고 하리라 예상하면서도 난 어쩔 수 없이 묻고 말았다.

“……불편하신가요?”

“그렇게 보여?”

“예.”

“……아, 미치겠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괜찮다 하지 않고 솔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신경 쓰이는 것이 많아 보여서 난 나지막이 물어보았다.

“왜 그러시나요? 말씀해 주셨으면 해요.”

무엇이 불편한지 모르겠지만, 만약 필요하다면 난 정말 무엇이든 해결해 줄 생각이 있었다.

여력도 의지도 충분한 상태로 진지하게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나 슬리퍼 신고 왔어.”

“……예?”

멍하니 되묻다가 나도 모르게 테이블 밑으로 고개를 숙였다. 에르네스트가 기겁하며 짜증을 냈다.

“뭘 또 확인하려고 그래?”

“보면 안 되나요?”

말하다 말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에르네스트는 더더욱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계속 신경도 안 쓰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슬리퍼가 문제라서 신발을 사오더라도 그걸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의 복장은 너무나 가벼워서 지금 이 카페의 분위기에도 잘 맞지 않을 정도였다.

차를 마시러 가자고 하니 얼결에 따라오긴 했지만, 이런 곳에서 마주앉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나 보다.

나랑 차 마시는데 가벼운 차림인 건 상관없다. 이런 날씨에 그가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난 일부러 물어보았다.

“오늘 눈 왔던 건 아세요?”

“뭐 어때.”

뭔가 삐친 것처럼 대꾸하는 그를 보며 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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