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6화
에르네스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이렇게 타티아나와 만날 줄은 몰랐다.
병문안을 자주 오는 편이긴 하지만, 오늘은 그녀에게 중요한 일정이 있었고, 이후에도 분명 다른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야 했을 테니까.
그저 오늘 하루는 그녀 자신에게 모든 시간을 투자하고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도 여유 있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전에 잠깐 작곡 공부를 한 뒤엔 인터넷 기사로 올라오는 시상식 소식을 느긋하게 지켜보았고, 문득 읽고 싶은 것이 생겨서 산책 겸 돔 끄니기로 나왔다.
병실엔 깁스를 하고도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밖에 없었고, 에르네스트는 한 손으로 가까스로 셔츠를 입고 카디건을 한 장 걸치는 것만으로도 인내력을 거진 다 써 버렸다.
그 뒤론 귀찮아져서 실외용 슬리퍼를 신은 게 전부였다.
설마하니 밖에서 타티아나를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런 무방비한 상태로 그녀를 만나 에르네스트는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일단 만난 건 행운이지…….’
예전에도 밖에서 몇 번 만나기도 했고 이 서점에서 본 적도 있었다.
가는 곳이 아무리 뻔하다 해도 그건 정말 운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가 어차피 병문안을 갈 예정이었다며 차를 마시러 가자고 데이트 제안을 했을 때, 에르네스트는 이 행운이 혹시 불행이 아닐지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타티아나는 여전히 친구에 기준을 두고 있으니 지금 역시 친구끼리의 데이트라 하더라도, 데이트는 데이트다.
에르네스트는 슬리퍼를 신고 그 제안에 응해도 되는 건지 쉽게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모처럼 다가와 준 타티아나를 거절할 순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적당히 거리에서 쇼핑할 수 있는 타이밍이 있다면 얼른 적당히 맞춰 볼 생각이었다.
문제는 타티아나가 늘 경호원을 대동한 차량으로 이동하고, 시끌벅적한 곳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빈틈이 아예 없잖아.’
돔 끄니기에서 나와 몇 걸음 걷자마자 바로 차에 타야 했고, 그다음 내려서 또 몇 걸음 걷자마자 카페에 도착해 버렸다.
덕분에 안절부절못하다가 들켜서 지금 이 모양이다.
다행히 타티아나가 재미있어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에르네스트는 이런 상황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괜히 퉁명스레 대하면서도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데, 다 웃었는지 타티아나가 살짝 사과해왔다.
“제가 너무 급하게 가자고 했네요. 미안해요.”
“이렇게 나온 내 잘못이니까……. 그런데 나 슬리퍼 신고 있던 거 몰랐어?”
“음…… 몰랐어요. 그저 약간 떨떠름해하신다는 것 정도?”
“…….”
그냥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건가 아니면 그런 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반가웠던 건가. 모호했다.
그보다 에르네스트는 돔 끄니기에서 만나서 여기에 오기까지 계속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타이밍을 재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타티아나의 눈엔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인 모양이다.
전부 오해였다는 걸 뒤늦게나마 알아 다행이라는 듯 타티아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 이유를 이제 알았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보는 사람도 없는걸요.”
“내가 안 괜찮아…….”
네가 보고 있잖아.
차라리 모르는 사람 백 명이 보고 있어도 지금보단 나을 것 같았다.
어쨌든 상황을 설명했으니 이젠 걸릴 것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아예 뻔뻔하게 말하기로 했다.
“지금 주문한 거 나오기 전에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딜요?”
“갑자기 쇼핑이 하고 싶어져서.”
“안 돼요.”
“왜? 얼마 안 걸려. 금방 갔다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면 돼.”
“싫어요.”
안 된다는 건 알겠는데 싫다는 건 또 뭐야?
그냥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이대로 놓아두고 계속 놀리겠단 건가 싶어서 에르네스트는 짐짓 인상을 썼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태연하게 받아쳤다.
“절 혼자 두고 가신다고요? 그사이 점원이 들어오면요?”
“그…… 잠깐 나갔다고 말하면 되잖아.”
“구차한 말은 하기 싫어요.”
그녀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타티아나가 말한 상황을 떠올려 보고 나서야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왜 구차하냐고 물어보려던 입을 가까스로 다물었다.
이전까지 타티아나는 상당히 명료하게 선을 그어 주는 타입이었다.
연주자 동료라는 큰 틀이 기반에 깔려 있었고, 때문에 둘 사이엔 친구간의 데이트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는지 갑자기 재기 어려웠다.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곧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상황이 우스워서 짓궂게 구는 거겠지.’
갑자기 생각이 복잡해졌지만 냉정하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일단 보이는 대로 판단하기로 했다.
장난엔 장난으로. 친구로서 할 수 있는 평범한 반응이다.
“내가 점원한테 말하고 갈게. 슬리퍼 보여 주면 바로 납득할걸.”
하지만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가 무슨 말을 하든 놓아줄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싱긋 웃더니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계세요. 뭘 신든 에르네스트는 에르네스트이니깐요.”
“…….”
“그런데 혹시 필요하시다면 다음에 외출용 슬리퍼를 사드릴…….”
“그만하면 안 될까??”
역시 전부 장난이었잖아.
에르네스트가 괜히 더 짜증을 내며 타티아나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그제야 에르네스트는 왜 자꾸 그녀 앞에서 해선 안 될 퉁명스러운 말이 나오는지 깨달았다.
지금 그녀를 웃기기 위해선 더 우스운 짓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하더라도 그에겐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최소한의 자존심 같은 것이.
타티아나의 웃음소리를 비집고 들어가 에르네스트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내 이야기는 그만하고…… 네 이야기 좀 해 봐.”
“저요?”
“그래. 오늘 중요한 날 아니었어?”
분명 오후까지만 하더라도 온갖 매체에서 타티아나의 공로 예술가 훈장 수훈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그녀는 피아니스트다운 검은 드레스를 입고 참석했고, 깔끔한 소감과 내년 콩쿠르 참가에 대한 결의로 굉장한 박수를 받아냈다고 했다.
상을 받는 예술가가 많아서 그녀의 소감 전문을 알 순 없었지만, 오늘 타티아나가 굉장한 각오를 하고 그 자리에 갔었단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여기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물어보았다.
“청바지 입고 시상대에 올라갔다 온 거야 설마?”
“아하핫, 그럴 리가요. 그랬다간 지금 에르네스트보다 더 창피했을 텐데요.”
“제발 그만해.”
“알았어요. 후후.”
타티아나는 이젠 정말로 안 하겠다는 듯 짧게 웃더니 에르네스트의 머리 위쪽 어딘가를 응시하듯 보며 기억을 되살려 이야기해 주었다.
“볼쇼이 극장에 갔을 땐 당연히 드레스를 입고 갔었죠. 그리고 거기에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차분히 설명하는 타티아나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옆자리라서 친해진 아델리나라는 이름의 디자이너는 타티아나의 마음에 든 것 같았고, 그 후에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 역시 점잖게 타티아나를 대우해 주었던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몇 년 전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았을 때 자신 역시 비슷한 대우를 받았던 것을 떠올리며 타티아나가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을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무척이나 명예롭고 기쁜 하루였을 것이다.
“그 후엔 아나스타샤, 발렌티나와 함께 있었어요. 지금 이 옷도 다 같이 산 것이에요.”
“그래? 계속?”
“예…… 아, 그리고 오늘 저 명함 만들었어요.”
“다른 사람들과 인사하려니 필요하지?”
“예. 그리고 언제든 서로 필요로 할지 모르는 분들이다 보니…….”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예전 일들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연주자로서 느낄 수 있는 공감대는 이전부터 많았지만, 이젠 사회적으로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아진다는 것이 즐거웠다.
때마침 주문했던 것들이 왔다. 두 사람은 각자 차로 입을 축이며 가볍게 대화를 나누었다.
에르네스트는 예전에 만나 친구가 되어 나중에까지 도움을 받거나 줄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도 했고, 타티아나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들었다.
자신에게도 비슷한 경험들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던 중, 타티아나가 잊고 있었다는 듯 자신의 가방에서 무언가 꺼내 내밀었다.
“조금 늦었지만, 교환할까요?”
에르네스트는 이전 연주회 미팅 자리에서 타티아나에게 명함을 준 적이 있었다.
그땐 기념으로 가지고 싶다 하여 준 것이었지만, 분명 언젠가 이렇게 될 것이라 예상하긴 했다.
조금 빠르긴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웃으며 그녀의 명함을 받아 들었다. 심플한 디자인이 타티아나답다는 느낌이었다.
“고마워. 잘 간직할게.”
“어차피 저희는 개인 번호로 연락하니 거기에 있는 번호는 큰 의미가 없겠지만요.”
“그것도 그런가.”
에르네스트의 명함엔 에이전시 담당자의 번호가, 그리고 타티아나의 것엔 그녀의 보안 담당인 빅토르가 쓰는 전용 단말기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개인 번호를 그냥 쓰는 사람들도 많은데, 두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서 곧장 전화를 받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이런 것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었다. 타티아나 역시 빙그레 웃어보였다.
“명함을 만들고 나선…… 영화를 봤네요. 프란츠 리스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였어요.”
다음 일정은 에르네스트의 예상대로였다.
함께 축하해 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오늘을 기념하는 것이다.
에르네스트 땐 파티까지 했었지만, 타티아나는 파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니 아마 식사만 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그 자리엔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분명 참석할 터였다.
아마 저녁 식사까지 함께 있으면서 세 사람이 하루를 마무리하겠거니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애초에 거기에 낄 생각조차 안 했다.
단적으로 말해 환자가 낄 장소가 아니라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어디에서 차이가 생겼는지 타티아나는 여기에 있었다.
‘아나스타샤, 지금 어디서 뭐 하는 건데.’
멀리 어딘가에 있을 친구를 떠올리며 에르네스트는 샌드위치를 물었다.
타티아나도 그를 따라하듯 포크로 케이크를 쪼개다가, 눈만 들어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에르네스트를 만났으니 집으로 가봐야겠네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에르네스트는 약한 죄책감마저 느꼈다.
지금 자신에게 얽힌 문제와 아나스타샤의 묘한 태도, 그 외의 복잡한 여러 상황들 때문에 타티아나는 밤새도록 축하받아도 모자랄 오늘도 이렇게 마무리하려 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 타티아나는 억울해하거나 후회하지 않을 테니 에르네스트가 딱히 해 줄 말이나 할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마디쯤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집에 가면 뭐 해?”
“글쎄요……? 가족들과 식사하고…….”
타티아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잠시 생각해 보더니 짧게 대답했다.
“자야죠.”
“자?”
“그럼 뭐 다른 거 할까요?”
가만히 쳐다보는 눈빛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언가 다른 대답을 요구당하는 기분을 느끼는 게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리라.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오늘 우연히 에르네스트를 만난 일로 꽤 즉흥적으로 되었음을 직감했다.
아마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거나 더 놀자고 해도 타티아나는 가뿐히 그리하자 하겠지. 너무 쉽고 편한 제안들이 몇 가지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더 즐겁게 해 줄 자신이 없었다.
팔에 굳어 있는 이 석고 덩어리는 현실의 무거운 짐일 뿐만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마음의 짐이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되도록 타티아나가 빠르게 즐거운 기억만 가지고 돌아가길 바랐다. 오래 있다 보면 점점 이 팔을 의식하게 될 테니까.
지금도 타티아나가 무거운 죄책감과 연민을 느끼고 있음을 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지금 그런 것에 영향을 받으면서 곁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각자 스스로에게 에너지를 쏟는 편이 낫다고 하는 건 너무 매정하게 들린다.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진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찰나였다. 타티아나가 옅게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자야죠. 피곤하네요.”
“……그렇겠네.”
“에르네스트는 괜찮나요? 오늘 제가 이렇게 데리고 나와서…….”
“괜찮아.”
“시간은요?”
“식사 시간 전까지 들어가면 되니까…… 30분 정도는 여유가 있네.”
시계를 보며 대답하자 타티아나가 웃었다.
“충분하네요.”
앞으로 30분이란 제한에 묶이자 되레 타티아나는 차분해졌다.
그 대답에서, 흔들리던 그녀의 기준이 숫자로 된 시간을 놓고 비로소 정해졌음을 에르네스트는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