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69화 (869/1,277)

##  869화

그날 벌어졌었던 일은 다시 떠올리며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가능한 건조하게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다친 건 에르네스트가 되었고,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는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서로 만나더라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된 거야.”

“…….”

이제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해 들은 발렌티나는 꽤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바가 있었는지 사건 자체에 대한 것보단 당사자인 세 명에게 초점을 맞추며 이해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슬픈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런 일이…….”

“……나한테 왜 계단을 헛디뎠냐고 묻고 싶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내가 널 괴롭히려고 지금 물어보는 거라 생각해?”

누군가를 탓해야 한다면 그건 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 발렌티나는 딱 잘라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지금까지 많은 어른들이 네겐 잘못이 없다며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에게만 직접 찾아가서 그 사실을 전했다. 그런데 지금, 발렌티나에게도 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늦게나마 지키는 신의이자 한 명에게라도 더 이야기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마음의 저울이 그래도 신의 쪽에 조금 더 기울어 있음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의미가 있을 거야. 내가 그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던 건 들떠 있었기 때문이니까.”

“무슨 말이야 그게?”

발렌티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아나스타샤는 천천히 말했다.

“처음으로 타티아나에게 전했었어. 좋아해도 되는 거냐고.”

“뭐!? 진짜?”

“진짜.”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는지 발렌티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나스타샤가 어떤 마음으로 혼란스러워하는지 발렌티나는 알고 있었다.

그전까진 평범하게만 지내던 친구가 왜 갑자기 혼란스러워하는지에 대해 묻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여 주고, 심지어 응원까지 했다.

그런데도 아나스타샤는 발렌티나에게 전적으로 기대지 못했다.

오랜 친구란 이유도 있었고, 스스로 확고하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발렌티나 역시 큰 기대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용기를 내었단 말에 그녀는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순수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친구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라 생각하며 아나스타샤는 이어 말했다.

“그 애는 정확하게 내 말을 알아줬고, 이해할 수 있다고 했어. 거기까지만 듣고 난 나머지는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했지.”

“……왜?”

“왜냐고 물어봐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타티아나는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차분했고, 아나스타샤의 말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이해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억이 부족해서 약간의 맹목을 보였던 때와는 달랐다.

본래 사고력이 뛰어났던 타티아나는 기억을 되찾은 후 한층 더 깊고 그 끝을 알기 어려운 눈빛을 보이곤 했다.

그녀는 정말로 아나스타샤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해하면서도 그 자리에서 모든 걸 결정지었다면, 아나스타샤로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때문에 거기에서 멈췄다. 그러나 이해받을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고, 결국 계단에서 균형을 잃었다.

보다 정확한 전말을 들은 발렌티나는 멍하니 아나스타샤를 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아까 도망치고 싶냐고 했었니? 이젠 내가 아니라고 말해도 거짓말이라는 건 알겠지? 발렌티나.”

에르네스트는 다치게 했고, 타티아나에겐 어려운 판단을 떠넘겼다.

결국 이렇게 된 상황에서, 차라리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조차도 할 수 없었다.

“걱정 마. 결국 그렇게 하진 못할 거야. 지금처럼 거슬리면서 계속 남아 있겠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

“차라리 빨리 알았어야 했다고 생각해. 그랬다면 조금 힘들더라도 난 떠났을걸. 그런데 너무 늦어버렸어 이젠.”

앉아 있기도 힘들어져서, 아나스타샤는 벽에 옆머리를 기대며 말을 맺었다.

“내가 지금 뭘 어떻게 하겠니? 아니, 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난 뭔가 하려고 하면 모든 걸 망치니까.”

“아나스타샤…… 그렇게 말하지 마.”

“그냥 너도 본심을 말해 볼래? 내가 너희를 괴롭히고 있다고.”

아니라 하진 못하겠지. 아나스타샤는 자학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발렌티나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면서 더더욱 심정은 어둡게 물들어가기만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달리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마디 더 얹으려는 찰나였다.

발렌티나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

“다른 두 애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아니?”

“너야말로 그걸 왜 모르는데!?”

난데없이 발렌티나는 소리를 빽 질렀고 아나스타샤는 깜짝 놀라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발렌티나는 너무 어려운 감정들을 한데 몰아넣고 있었다.

분노와 후회 그리고 슬픔 등 어느 하나만 감당하더라도 힘든 감정들이었다.

하지만 앞에 있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그녀는 모든 걸 차분하게 갈무리하면서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아까 타티아나랑 있으면서 아무것도 못 느꼈니? 그 애가, 자기 일에만 집중하기도 벅찬 그 애가 네 신경을 얼마나 쓰는지? 애초에 왜 우리 둘한테만 와달라고 했겠어?”

“그건…….”

“타티아나가 널 잡아주려 했다고 했었지? 그 애는 그런 애야. 왜 그걸 의심해?”

아나스타샤는 입을 다물었다. 발렌티나의 말이 옳다는 건 분명했으니까.

타티아나가 얼마나 진지하고 헌신적인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안다.

그녀는 스스로를 탓하며 책임을 짊어지려고만 했지, 절대 아나스타샤를 원인으로 지목하려 하지 않았다.

이어서 발렌티나가 빠르게 쏘아붙였다.

“에르네스트도 똑같아. 그 애가 널 원망했었니? 단 한 번이라도? 간접적으로 혹은 비아냥거리면서?”

“…….”

“안 그랬지?”

“확신하는 거야?”

“내가 그 애를 좋아했었던 이유가 그런 성격 때문이었으니까.”

그 말에 아나스타샤는 움찔했다. 발렌티나가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평소 실수로라도 발렌티나는 이런 말을 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지금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거침없이 말했다.

무언가 마음속 정리를 확실히 끝낸 것 같단 느낌이 들어서 아나스타샤는 자기도 모르게 놀란 눈으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발렌티나가 어떤 의미에서 그 누구보다 제일 어른에 가까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나스타샤.”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발렌티나가 이야기했다.

“네가 왜 그렇게 힘들어했는진 이제야 알겠어. 그리고 이해할 수도 있고…… 내가 네 상황이었더라도 정말 괴로웠을 거야. 이야기 못 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

“…….”

“그리고 그런 널 그냥 내버려 뒀던 내 자신에 대해 화가 나려고 하네.”

“네가 잘못한 건 없잖니.”

“오늘 그냥 넘어갔으면 잘못한 게 생길 뻔했어.”

갑자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더니, 발렌티나는 불쑥 눈썹을 찌푸리며 아나스타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이렇게까지 바보인 줄은 몰랐어.”

“……응?”

난데없는 비난에 아나스타샤는 당혹감을 느꼈다.

적대적인 비난을 듣는 것도 언제나 각오하고 있었지만, 발렌티나의 어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차분히 설교하듯 발렌티나가 말했다.

“거슬린다거나, 망친다거나…… 괴롭힌다거나. 만약 그런 네 생각들이 사실이라고 생각해?”

“사실이 아니면 뭔데? 그냥 있는 현상 그대로 아니야?”

“그건 네가 멋대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어져서 아나스타샤는 할 말을 잃었다. 상상도 못 해 본 생각이었다.

다시 한번 모든 일들을 이야기하며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짚어 봐야 하는 걸까?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엔 발렌티나의 말이 옳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아나스타샤가 입을 다물자 발렌티나는 다시 음악원 안내서를 손끝으로 쿡 찌르며 말했다.

“이걸 받고 네가 내렸다던 결론을 다시 볼까? 네가 계속 남아 있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뭐야? 지금 모든 문제를 껴안고 어디론가 가 버리면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가 더 슬퍼할 거라고 직감하고 있지 않아?”

“그야…… 그 애들은…….”

멍하니 입을 열려던 아나스타샤는 그 이상 이어 말하지 못했다.

거보라는 듯 발렌티나가 안내서를 찌르고 있던 손가락을 들어 올려 아나스타샤에게 향했다.

“아까 나한테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이 너도 다 알고 있는 거야. 그렇지?”

“…….”

“네가 지금 얼마나 앞뒤가 안 맞는 생각을 가지고 골몰하고 있는 건지 이제야 알겠어?”

이미 아나스타샤는 두 친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안다.

때문에 이 자리라도 지키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꼼짝도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그만큼 친구들을 믿고 확신해야만 했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타티아나에게 이끌려 무대에 올랐던 걸 마지막으로 그저 빙글빙글 배회하고만 있었을 뿐이다.

그것도 이해한다는 듯 발렌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 그런 건 그리 중요하지 않겠지. 머리로 안다고 해도 그 애들을 보면 네 가슴 속을 무언가가 콱 틀어막을 테니까. 태연하게 웃고 떠들기 어려운 게 당연하지. 사람인 이상 그런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발렌티나가 내어 준 건 그저 이해뿐만이 아니었다.

보다 차분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그녀가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건 내가 도와줄게. 아나스타샤. 우리 같이 다 괜찮아지려고 노력해 보자.”

“……노력?”

“노력이지 그럼 뭐겠어?”

“네가 왜…….”

“친구니까.”

짧은 한 마디일 뿐이지만 아나스타샤는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그냥 친구라고 하기에 아나스타샤는 너무나 복잡하고 어렵고, 귀찮은 사람이다.

심지어 기분 나쁘게 느낀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다.

나 같으면 나 같은 애랑 친구 안 해.

단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아나스타샤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바닥을 치는 자존감도 발렌티나는 조심스레 북돋아 주었다.

“에르네스트가 잘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타티아나에게 한 이야기도 그 애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들어 보자. 지금은 정신이 없겠지만 시간이 좀 걸려도 괜찮을 거야 아마.”

“……그다음엔?”

“모르지? 하지만 뭐가 어떻게 되든 우리가 친구란 사실에 변함은 없겠지.”

지금까지 예리한 면모를 보이던 발렌티나는 순진한 미소를 띠었다.

아나스타샤는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묻지 않았다. 똑같은 말을 타티아나에게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땐 약간의 보험과도 같은 느낌으로 건넸던 말이지만, 지금 발렌티나는 정말 순수하게 믿어 의심치 않는 말을 건네오고 있었다.

발렌티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실제로 에르네스트와 지금 친구로 잘 지내고 있는 건 그녀뿐이었으니까.

이미 모든 걸 앞서 해 본 사람으로서 발렌티나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너무나 늦게 그걸 깨달은 아나스타샤는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발렌티나.”

“응?”

“솔직히 난 너한테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했어. 상담?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했지.”

온몸에서 힘이 빠진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이 탈력감은 아까 전 느꼈던 무기력함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보다 편안하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그런데 웃기는 건 나였네.”

“이제 알았니? 너 진짜 웃기는 애야.”

“……응.”

“쓸데없이 머리는 좋아서 혼자 잘난 척 다 하지만, 사실 이렇게 바보같을 수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말이지.”

“응.”

“이제야 인정하는구나? 내가 너보단 훨씬 낫지? 그러니까 앞으론 내 말에 토 달지 말고 알아서 잘해. 알겠어? 할 말 없지?”

“노력할게. 그런데 여기 내 방이라는 건 아니? 적당히 안 하면 내보내 주고 싶지 않아질 것 같아.”

“……어?”

그제야 발렌티나는 흠칫하며 놀랐다. 그 모습을 본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발렌티나는 갑자기 웃는 아나스타샤가 무섭다는 듯 움찔거렸지만, 이윽고 같이 웃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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