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0화
잔뜩 무거운 이야기들을 나누었지만 그 끝은 장난처럼 흐물거린다.
지금까지 한 것은 진지한 토론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두 사람이 친구란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서로의 생각을 들춰볼 수 없는 이상 의심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부분들을 다시 믿음으로 채운다.
그리고 그것이 일방적이지 않고 서로에게 똑같이 향한다는 걸 느끼게 되면, 그 전까지의 어려움 등을 갑자기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피하지 않고 학교에 가는 것 정도뿐이겠지만…….’
긍정적인 기분과 현실을 바라보는 냉정한 시각이 충돌하면서 만들어 낸 결론은 겉으로만 보면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대신 학교에서 조금은 여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지난 2주 동안 자신이 얼마나 막다른 길에 몰린 사람처럼 굴었는지 떠올리며 반성했다.
옆에서 보는 친구들도 얼마나 불안해했을지. 그건 발렌티나가 전부 대신 알려 주고 있었다.
“…….”
아나스타샤는 학교에서 취해야 할 태도의 경계를 어디에 그어야 할지 분명히 파악했다.
일단 다른 친구들과 평범하게 이야기하는 것 정도라면 지금이라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타티아나와 나누어야 할 깊은 이야기들은 아직 꽉 틀어쥐고 있어야 했다.
여전히 아나스타샤에겐 죄책감이 트라우마처럼 깊숙하게 박혀 있었고, 지금은 타티아나도 온 신경을 에르네스트에게 향하는 중이었다.
감정을 다시 알아 달라 이야기한들 결과가 뻔해도 너무 뻔했다.
아나스타샤는 앞으로 친구로나마 지낼 수 있을 미래까지 완벽하게 부숴 놓는 경솔한 짓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타티아나 역시 자신이 지금 어떤 대답을 할지 뻔히 알기에 아나스타샤에겐 그 이상의 아무런 말도 해 오지 않았다.
서로 암묵적인 타협점은 그렇게 생겨났다.
아나스타샤는 그것이 최소한 친구로서 서로를 소중히 여기기에 가능한 지점이라 생각했다.
“…….”
그리고 에르네스트를 대할 때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로 잘 돌이켜 봐야 했다.
아나스타샤는 첫 병문안 이후로 개인적인 병문안을 간 적이 없었다.
항상 친구들과 함께 가선 구석에 서 있거나, 에르네스트가 학교에 왔을 때만 걱정스레 살폈을 뿐이다.
사실 혼자서 병문안을 가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보단 타티아나를 더 반길 터였고, 아나스타샤가 가면 일부러 강하게 보이려 하면서 자기 아픈 건 내버려두고 아나스타샤의 일만 파고들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럴수록 아나스타샤의 마음은 무거워지기만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들었던 이야기는 여전히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건 안 돼. 그렇게 알아 둬.’
‘그러면 네가 냈던 용기가 아깝잖아?’
도망치지 않겠다고 한다면 에르네스트는 적어도 아나스타샤를 걱정하는 눈빛을 거두게 될 것이다.
연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려하는, 그런 태도만 없어진다면 아나스타샤는 지금보다 훨씬 더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이기적인 이유에서라도 천천히 에르네스트와의 관계는 확실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믿고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한 명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나스타샤는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해진 상태로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돈된 생각들은 다시금 아나스타샤를 차분하게 만들고, 순환하며 그녀를 정련한다.
“…….”
“무슨 생각 해?”
“너 가고 나면 저녁에 뭘 먹을까 생각.”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발렌티나가 강하게 항의했지만 아나스타샤는 괜한 장난을 더 치며 웃었다.
머릿속에서 차례로 쌓이는 생각들 중엔 진짜로 저녁 식사에 대한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아나스타샤는 스스로 조금 안도감을 느꼈다.
이전까진 그저 입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을 때에 맞춰 넣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이나마 의욕을 내서 먹을 생각이 든다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밥 먹고 갈래?”
“아니. 아줌마도 오늘 내가 올 줄 몰랐다고 하셨으니까 그건 너무 민폐야. 그냥 갈래.”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냔 말은 뭐였니?”
“그건 그냥 한 말이고! 순서라는 게 있잖아 순서라는 게? 네가 먹고 가라고 하면 난 완곡하게 거절하는 거!”
“이상한 기대를 하네.”
“내가 이상한 거야?”
아나스타샤는 키득거리며 발렌티나를 데리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 소파엔 아젤라이다와 일리야가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두 가족의 시선이 아나스타샤에게 향했다.
그 순간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지금까지 엄청나게 걱정을 끼치고 있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걸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조금 침착해지고 나서 다시 이렇게 보니 갑자기 미안함이 확 몰려들었다.
아젤라이다는 딸과 발렌티나의 얼굴을 빠르게 살피더니 태연하게 물었다.
“이야기는 다 끝났니?”
“네.”
“무슨 이야기 했니? 물어봐도 돼?”
형식적인 관심을 표한다는 듯한 평이한 말투였지만 아나스타샤는 지금 그녀의 어머니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연주회 전부터 쭉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 온 아나스타샤가 간만에 발렌티나를 데리고 와선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그 내용이 심각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할 수도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대충 얼버무리며 그 걱정을 무마시키려는 찰나, 발렌티나가 먼저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발랄하게 이야기했다.
“앞으로의 이야기들이죠. 이제 11월이니까요.”
“11월…… 바쁘니?”
“네. 바빠지겠죠? 내년에 국제 콩쿠르도 나가야 하니까 진짜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해요. 신청도 다음 달까지 해야 하고요.”
“아, 콩쿠르.”
딸이 피아니스트인데도 생각지 못했다는 듯 중얼거리던 아젤라이다는 다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나갈 거니? 아나스타샤.”
“……응.”
아나스타샤는 콩쿠르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았다. 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결단코 나갈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각오를 다시 한번 본 아젤라이다는 그녀의 생각이 그렇다면 존중하겠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단지 의사만을 밝혔을 뿐인데도 그 미소에선 대견해한다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아나스타샤는 더 길게 이야기하기 어려워서 괜히 시선을 피했다.
아젤라이다는 텔레비전을 끄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발렌티나에게 말했다.
“그럼…… 아니, 이렇게 서 있을 게 아니라 가서 앉을래? 밥 먹고 가야지. 발렌티나.”
“아뇨! 아뇨, 정말 차만 마시고 가려고 했던 거예요. 저 갈게요.”
“가긴 어딜 가니? 밥 먹고 가.”
“으아, 다음에요!”
발렌티나는 호들갑스럽게 사양하더니 마치 갈매기처럼 파닥거리며 진짜로 현관 쪽으로 향했다.
어지간하면 몇 번이라도 그녀를 붙잡아선 거의 강제로 식탁 앞에 앉히고 밥을 먹였겠지만, 오늘 종일 붙어 다닌 두 사람이 이쯤에서 시간을 매듭짓고 싶어 한다는 걸 이해했는지 아젤라이다는 그 이상 붙잡지 않고 미안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따라왔다.
어머니가 뒤에 따라붙기 전에, 아나스타샤는 빠르게 발렌티나에게 다가가선 속삭였다.
“진짜 그냥 가니?”
“난 말이 많아서 안 돼. 같이 식사하면 아마 나 혼자 떠들걸?”
발렌티나는 이미 이 가족들을 오래 봐 왔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훤히 알고 있었다.
손님인 발렌티나에게 관심이 쏠릴 테고 자연스레 아나스타샤는 맞장구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발렌티나는 그 자리에서 빠져주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만약 필요하다면 억지로라도 끼어들었을 친구다.
그러니 지금 간다는 건 그만큼 아나스타샤를 믿는다는 신뢰의 표시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가 말없이 바라보자 발렌티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아줌마랑…… 일리야 오빠랑, 같이 밥 먹으면서 이야기 잘 해드려. 알았지?”
신신당부하는 태도였다.
평소 발렌티나가 이렇게 아나스타샤를 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아나스타샤는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딱히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그럼 학교에서 봐.”
학교에선 반드시 볼 수 있을 거란 강한 믿음을 마지막으로 건네고 발렌티나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아젤라이다와 일리야도 이쪽으로 따라왔다.
슬슬 대화 소리가 들리기 전에 아나스타샤도 마지막으로 그녀를 불렀다.
“발렌티나.”
또 왜 그러냐는 듯 발렌티나가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솔직한 마음으로 말했다.
“오늘 고마웠어.”
그 한마디에 발렌티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녀는 지금까지 모든 마음고생과 걱정을 한꺼번에 보상받은 것처럼 너무나 기뻐했다.
그러나 그것도 담백하게, 발렌티나는 웃으며 답했다.
“별말씀을.”
신발을 다 신은 발렌티나는 정말로 자기 짐을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 뒤로 이즈마일로프 가족들이 그녀를 배웅했고, 발렌티나는 몇 번이나 다음에 또 들르겠다고 약속하며 떠났다.
“……아쉽네, 식사를 못하고 가서.”
아젤라이다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비슷한 심정인 건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것도 발렌티나가 다 생각이 있어 한 것이란 걸 아는 지금은 그녀가 신경 써 준 것을 허투로 하지 않아야겠단 생각을 할 뿐이었다.
***
주말이 지나 월요일.
차량에 오르자 빅토르가 문득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아가씨, 긴장되지 않으십니까?”
“예?”
영문을 몰라 룸미러 너머 빅토르의 얼굴을 마주하자 그가 자기 옷깃을 툭툭 치며 말했다.
“훈장 받으시지 않으셨습니까? 학교에서 평소보다 훨씬 더 관심 받으실 것 같은데. 사인 연습이라도 조금 더 해 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
관심이니 사인이니 무슨 연예인 취급받는 건 조금 별로였지만 빅토르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에게 냉정하게 말하는 것도 조금 미안했다.
그래서 조금 들어 주다가 살짝 타이밍을 봐서 이야기했다.
“아마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거예요. 학교 다니면서 공로 예술가 훈장 받은 사람이 저 혼자인 것도 아니고요.”
“그렇습니까? 음…… 전 살면서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후후, 빅토르가 자랑스러워해 주는 건 고마워요.”
“그……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먼저 장난을 걸어 왔으면서 끝까지 장난으로 받아 주지 않고 갑자기 부끄러워해 버리면 내 쪽도 심히 난감하다.
난 답잖게 말이 없어진 빅토르를 괜히 몇 번 더 부끄럽게 만들어 볼까 하다가, 그래 봐야 결국은 내게 업보가 모두 돌아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꾹 참기로 했다.
그렇게 추워진 날씨에 대한 이야기와 지구온난화는 대체 어디로 갔냐는 둥 빅토르의 농담을 들으며 학교에 도착했다.
“다녀오십시오.”
“예, 고마워요.”
나처럼 아침 일찍 등교하는 학생은 드물다. 난 느긋하게 교정을 거닐다가 정문으로 들어섰다.
수위 아저씨와도 인사를 나누고, 조심스레 계단을 오르려던 찰나였다.
앞서 걷던 한 남자아이가 이쪽을 바라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나 역시 그 아이를 보고는 반가움에 작게 손을 흔들었다.
훌쩍 큰 아나톨리는 날 보고도 그냥 갈 수는 없었는지 도로 계단을 내려왔다.
난 그 모습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다가, 나란히 서고 나서야 웃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나톨리.”
“아…… 그, 안녕하세요.”
인사하려고 내려왔던 거 아닌가? 왜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머뭇거리는지 모르겠다.
“뉴스 기사 봤어요. 훈장 받으신 거…… 정말 축하드려요.”
“아, 보셨나요? 감사해요.”
“대단한 일이라 생각해요.”
아나톨리는 계속 내 눈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약간 흐릿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난 지금까지 봐 온 이 아이가 축하를 전할 땐 진지하게 할 줄 아는 아이라는 걸 안다.
때문에 지금은 아무리 봐도 이상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생각해 본 결과 유추해 낼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 정도였다.
“혹시 섭섭했나요? 아나톨리.”
“예!? 서, 섭섭요? 제가요?”
“그게…… 제가 그 자리에 불러 주지 않아서요. 음, 그건 어쩔 수 없었어요. 저도 마음 같아선 모두를 부르고 싶었지만…….”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아나톨리는 격하게 부정하더니 그제야 내 눈을 바라보고는 걱정하는 눈빛을 읽어낸 듯했다.
그 나이대답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쉰 아나톨리는 이윽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전 그냥…… 저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타티아나 누나랑 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예?”
나도 모르게 되물었더니 아나톨리의 고개가 더더욱 기울어졌다.
아나톨리는 나와 합주를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실력 차이가 있다는 것 또한 확실하게 자각하는 연주자였다.
내가 맞춰 주면 못 할 건 전혀 없었지만, 이제 그런 건 하기 싫은 거겠지.
이해는 가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정말 귀엽게 느껴진다.
마음 같아선 껴안고 토닥거리고 싶지만 그러면 더더욱 아이 취급한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난 천천히 이야기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나요?”
“……맞지 않아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아나톨리. 지금 메고 계신 그 바이올린을.”
내가 손가락을 뻗어 아나톨리의 바이올린 가방을 가리키자 그제야 그는 깜짝 놀랐다.
그걸 깨닫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막연했던 긴장감이 풀려 간다. 다시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전 아나톨리가 풀 사이즈 바이올린을 다룰 수 있게 되자마자 그걸 드렸죠. 과연 제가 단기간에 성과를 기대했을까요?”
“……아뇨.”
“수백 년 된 악기와 음악을 완벽하게 다루려면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해요.”
“수백 년…….”
“아하하하, 당연히 수백 년이 꼬박 걸리진 않아요. 전 그 시간을 아나톨리가 충분히 줄일 수 있다고 믿기에 그 바이올린을 드린 것이랍니다.”
난 이 바이올린의 주인으로 그가 적격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몇 년 걸릴까? 길어 봐야 5년? 길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천재들에게나 가능한 시간이다.
그리고 아나톨리는 충분히 기대이상으로 빠르게 크고 있었다. 실력도 키도, 향상심도.
“그러니 조급해하진 마세요. 멀게 보일진 모르겠지만, 조금 후면 훨씬 큰 걸음으로 성큼 다가올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어떤 기대와 참을성으로 그에게 바이올린을 맡겼는지 조금은 알아주려나.
얼마 있으면 나보다 훨씬 커질 아나톨리에게 긍정적인 미소를 보내자 그는 비로소 편안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아나톨리를 달래 놓고도 난 오늘 다른 아이들도 혹시 내게 거리감을 느끼면 어쩌나 약간 걱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