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1화
계단 아래에서 잠시 아나톨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바로 자신의 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 들를 예정이라 했다.
같이 가 줄까요? 란 말을 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찾아야 할 책을 함께 고르고 추천을 해 주거나 조언을 하는 건 선배로서 좋은 일이겠지만, 지금 아나톨리에게 너무 많은 간섭을 하는 건 그리 좋지 않은 일 같았다.
“좋은 하루 보내요. 아나톨리.”
“이따 스터디룸에 오실 거죠?”
아까 날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인지 아나톨리는 그런 말을 하는 것도 굉장히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오늘 내 일정은 단조로운 편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럴게요. 레슨도 없으니.”
“그럼 이따가 봐요.”
그 말을 맺자마자 아나톨리는 바이올린을 든 채 뛰어가려고 했다.
그저 그뿐이었는데도 난 순간적으로 놀라 붙잡으며 말했다.
“뛰지 말고 천천히 가세요.”
“그, 그럴게요.”
조심조심 행동하길 바란다는 게 전해졌는지 아나톨리는 멋쩍은 듯 목을 긁적이더니 이번엔 얌전한 걸음으로 도서관 쪽으로 향했다.
난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꽤 흐르면서 트라우마는 많이 옅어졌다.
그런데도 갑자기 아나톨리가 튀어나가려는 모습을 보니 이렇게 긴장하고 심장이 뛰어서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나톨리는 날 무슨 초인처럼 생각하나 본데, 정작 난 이렇게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
자꾸 의식하니까 더더욱 불안해지는 것 같다.
마음 같아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깐 앉아 있고 싶지만, 이럴수록 더더욱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다리를 움직였다. 계단을 딛는 구두소리가 들리고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
한 계단 위로 향하며 별거 아니란 생각을 반복해서 되뇌자 조금씩 나아진다.
시간이 흐르면 점점 더 괜찮아지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난 천천히 계단을 마저 올랐다.
‘누가 먼저 왔나?’
교실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난 평소에도 학교에 일찍 오는 편이었고, 때문에 반에 도착하고 나면 안에 아무도 없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오늘은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오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막 풍선을 입에 물고 있는 라리사와 눈이 마주쳤다.
볼을 잔뜩 부풀리고 있던 그녀는 당황한 눈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바르바라 역시 무언가 하다가 내 쪽을 보더니 후다닥 라리사에게 다가가선 속닥거렸다.
“저 애가 왜 벌써 와? 20분은 더 있어야 올 거라며?”
“어…… 원래 그랬었는데…….”
뭔가 계산이 틀어졌다는 듯 라리사가 중얼거렸다.
나 역시 이 상황에 어색함을 느끼며 문가에 어정쩡하게 서 있자니 라리사가 날 불렀다.
“저기, 타티아나?”
“예?”
“오늘은 평소랑 달리 일찍 온 거니?”
“글쎄요…… 도로가 조금 덜 막혔던 것 같긴 해요.”
“그래?”
라리사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걸로 대화가 뚝 끊겼다. 서로 말을 아끼자 서먹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가 아무리 바보여도 지금 어떤 상황인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저기 있는 풍선들은 분명 날 축하하기 위한 것이겠지.
이 애들은 나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일찍 와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나톨리를 따라 도서관에 갔었어야 했나? 혹시 지금이라도 안 늦었나?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며 멍하니 있자 라리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와서 앉을래? 이건…… 널 위한 거니까.”
“…….”
조심스레 그 옆에 가서 앉았다.
바르바라는 책상 위에 걸터앉아선 다 망했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도 약간 죄지은 사람처럼 꼼짝없이 어깨를 옹송그리고 있었다.
그런 날 보던 라리사는 옆에 장식해 놓았던 풍선을 하나 집어 들곤 내게 건네주었다.
“자.”
“아, 고…… 고마워요.”
“공로 예술가 훈장 받은 것 축하해.”
“……고마워요.”
둥그런 풍선을 양손으로 안으니 그것만으로도 뭔가 긴장이 풀어지고 편안한 기분이 든다.
무슨 꽃다발이라도 받은 것처럼 풍선을 안아든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라리사는 잠깐 말을 고르다가, 이윽고 쓸데없는 미사어구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대대적으로 우리 반 애들이 다 몰려가서 널 축하해 주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적어도 교실에서만큼은 네가 잔뜩 축하받았으면 좋겠더라. 그래서 준비하고 있었어.”
내가 다른 아이들을 굳이 부르지 않은 것처럼 이 아이들 역시 내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유명인사들과 기자들, 그리고 수십 개의 카메라들이 보는 앞에선 어떤 행동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상황을 내가 이해한다는 걸 알아본 라리사는 살풋 웃어 보이더니 불지 않은 풍선을 들며 물었다.
“우리 이거 계속 불어도 될까?”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그녀는 진짜로 다시 풍선을 불기 시작했다.
다만 내가 옆에서 보고 있는 건 조금 부끄러운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였다.
그런 라리사와 달리 바르바라는 이미 내가 와 버렸으니 그만해도 되지 않겠냐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라리사는 그쪽은 보지도 않고 의지를 담아 풍선을 불고 있었다.
지금 라리사가 더 부끄러울까 아니면 그녀를 보는 내가 더 부끄러울까.
그런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나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상황이었다.
난 괜히 가방을 건 위치를 확인하고, 책을 꺼내려고 하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스마트폰을 꺼내들고는 시간만 보고 다시 집어넣었다.
옆에서 날 위해 풍선을 부는 아이가 있는데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건 정말 상상도 못할 최악의 행동이었다.
한참을 두서없이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던 난 결국 뭐라도 해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라리사에게 물었다.
“같이 불어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우리가 마저 할게.”
“숨차실 텐데요…….”
“나 폐활량 좋은 편이라서.”
정말 어색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바르바라가 빵 터질 정도로.
“너희들 뭐 하는데 진짜.”
난 잘 모르겠단 생각으로 마주 웃어 보였다.
어쨌든 아침부터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덕분에 마음의 준비는 지나칠 정도로 잘 할 수 있었다.
오늘 학교에서 관심이 내게 쏠릴 것이란 것 정도는 이미 충분히 예상했다.
그게 어느 정도건 난 그리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오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야 얘들…… 오, 타티아나! 훈장 수훈 진짜로 축하해!”
“이 풍선들은 라리사랑 바르바라가 해 준 거야?”
“수훈식에 이어 축하식 할까 우리?”
하나둘 등교하기 시작한 친구들이 모두 날 보면서 인사와 축하를 건네 왔고, 서서히 내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난 그 한가운데에서 친구들의 농담이나 질문 등에 어울려 주어야만 했다.
“공로 예술가가 둘이나 있다니 우리 학년은 진짜 축복받았다니까. 나만 빼고.”
“훈장은 안 달고 왔어? 오늘 하루 정도는 달고 다녀도 되는 것 아냐?”
“거기 분위기는 어땠어? 다른 사람들하고 인사도 했어?”
답하기 쉬운 것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었다. 모두 반응하려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따금 터지는 웃음소리가 더더욱 어지럽게 했다.
그래도 친구들은 내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농담을 하더라도 과하게 하진 않는 편이었다.
높은 등급의 훈장을 받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태도가 바뀌거나 하진 않을 거란 믿음이 친구들 사이에 강하게 깔려 있다는 데에서, 난 안도와 감사를 느꼈다.
그리고 주변에 몰려든 건 비단 반 친구들뿐만이 아니었다.
“뉴스 봤어요!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멋졌어요 선배!”
“몇 년 전에 편입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오늘 피아노과는 파티 분위기네? 우리 끼어도 되나?”
소문을 듣고 하나둘 찾아온 후배들과 11학년 선배들, 그리고 심지어 다른 과 학생들까지 북적였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알 순 없었지만 최소 50명은 넘을 것 같았다. 우리 학교 전교생 숫자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였다.
가까스로 축하와 질문에 답하고 있는데, 내 앞으로 펜과 노트가 내밀어졌다. 뭔가 싶어 올려다보니 한 여학생이 부탁했다.
“혹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선배님 사인 받아도 될까요……?”
슬슬 전교생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낯이 익다. 플루트를 한다고 했었던 것 같다.
연주회를 하고도 사인회는 하지 않는 편인데, 갑자기 학교에서 이렇게 타과 학생에게 사인을 요청받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해 드려도 되나요……?”
여전히 내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하지만 여학생은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빠르게 즉답했다.
“당연하죠! 사실 오늘이 아니라 한참 예전부터 부탁드리고 싶었어요!”
“…….”
이렇게까지 말하면 할 말이 없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펜을 받아들었다가, 다시 돌려주고는 내 만년필을 꺼냈다.
기왕에 해 주는 것이라면 지금 이렇게 낸 용기를 앞으로도 기억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만년필로 사인을 해 주자 그녀는 만족을 넘어 거의 감동한 표정으로 감사를 해 왔다.
그리고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리를 피해 주었다. 자연스레 어떠한 흐름을 따르듯 주변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몇몇 학생들이 주머니에서 메모지 등을 찾기 시작했고 그 행동은 마치 파도처럼 번져 나갔다.
뒤늦게 실수했음을 느꼈지만 분위기가 사인회처럼 되어 버린 상황에서 이제 와서 다 그만둘 순 없었다.
심지어 내 손엔 여전히 만년필이 쥐어져 있는 상태였다.
진짜 학교 학생들 앞에서 사인회를 해야 하나? 너무 부끄러운데.
아무리 내가 훈장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 나간 게 아닌가 고민이 드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고민할 때였다.
“야! 밖에서 싸운다!”
“뭐?”
리처드가 큰 소리로 복도에서 소리를 쳤고 그와 동시에 수십 명의 시선이 빙 돌아 그쪽으로 향했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자 리처드는 창 쪽을 손으로 가리켰고 다시 그 손짓에 따르듯 모두 창가로 향했다.
내 사인에 집중되던 흥미가 싸움이란 한마디에 밖으로 쏠렸다.
“뭔데? 누가? 왜?”
“밖에 지금 기자 몇 명 와 있는데, 수위 아저씨가 막았나 봐.”
“기자?”
“타티아나 취재하러 온 건가?”
“이 아침부터?”
리처드를 보니 그는 재미있지 않냐는 듯 웃고 있었다. 난 살짝 어지럼증을 느끼며 일어났다.
행동이 빠른 아이들 몇몇은 상황을 보기 위해 창가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도 비어 있는 곳으로 가서 밖을 보니, 정말로 남자 몇 명이 수위와 대치하고 서 있었다.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빠르게 쏘아붙이는 태도가 당장에라도 맞붙을 기세다.
옆에서 같은 광경을 보는 학생들이 흥미진진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들어 보니까 인터뷰는 수업 전에 끝낸답시고 막무가내로 군 모양인데?”
“우리 수위 아저씨 그런 거 가만두는 사람 아닌데.”
“그치. 아마 때려눕혀서라도 못 들어오게 할걸?”
그 말을 듣는 난 심경이 복잡했다.
사인회가 시작될 뻔한 상황이 자연스레 수그러든 건 다행이지만 더 심각한 일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가서 말려야 하나? 그런데 그러면 더 문제가 커지는 것 아닌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야속하게도 옆에선 한바탕 하길 바라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 학교에선 저런 이벤트가 자주 없는 편이니까.
혹시 모르니 내려가 봐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그만!!”
화난 남자들이 싸우던 소리도 한 번에 덮어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큰 소리가 학교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웅성거리던 학생들은 모두 소스라치게 놀라 바짝 얼어버렸다. 눈만 간신히 뜨고 바라보니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정문에서의 소란에 화가 난 구세프 선생님이 결국 나선 것이다.
선생님은 처음에 고함을 치고 난 뒤 한 마디도 않고 뚜벅뚜벅 걸어 기자들에게 다가갔다. 성난 곰을 마주한 것처럼 기자들은 뒷걸음질까지 쳤다.
피아노 학과 선생님이라기에 구세프 선생님은 조금 무서운 분이긴 하다.
그런데 그게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성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줄은 몰랐다.
“…….”
기자들의 코앞까지 다가간 구세프 선생님은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무어라 이야기했다.
한참 위에서 듣는 우리 귀엔 그 목소리가 당연히 들리지 않았지만 무언가 으르렁거리는 맹수가 위협하는 것 같은 느낌은 분명히 여기까지 전해져 왔다.
잠시 후 대화가 끝나고 기자들은 모두 돌아갔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진 모르겠지만 구세프 선생님이 한 번에 상황을 정리해 버린 것이다.
삐딱하게 기자들의 뒷모습을 보던 선생님은 돌연 뒤로 휙 돌더니 학교를 올려다보며 다시 고함을 질렀다.
“뭘 보나!!”
마치 창밖에서 총탄이라도 날아오는 것처럼 모두가 황급하게 창틀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
시끄럽던 상황도 정리되고 창틀 아래에서 폭풍이 지나가길 비는 사람들처럼 웅크리고 있던 우리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마치 원래부터 그러기로 했던 것처럼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고 나서야 현실적인 아이 몇 명이 몸을 일으켰다.
“선생님 뛰어올라올지도 몰라.”
“도망칠까.”
“타티아나, 우린 없었던 거다?”
우리 반에 왔었던 아이들은 저마다 제멋대로 말하고는 각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굉장히 정신없었지만, 난 막연한 긴장이나 부담 없이 오늘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단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