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72화 (872/1,277)

##  872화

오전 교과는 수학과 시창청음, 국어 세 과목이었다.

선생님들은 짧은 축하 인사 정도만 건네시고는 수업을 시작하셨다.

내가 훈장을 받게 된 것은 학생들의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 정도로만 활용하고, 수업 외적인 이야기를 길게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시는 것 같았다.

당연히 나는 거기에 협조했다.

내가 정말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은 선생님들의 눈빛에서도 잘 느껴졌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수업에 제대로 임해야 한다는 건 변함없어야 했다.

반듯한 자세로 수업을 들으려 했고, 내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아침부터 조금 어수선했던 분위기도 금방 정돈되었다.

그렇게 수업에 집중하며 오전 교과들을 보내고 나자 평범한 하루와 크게 다를 것 없단 기분이 들 정도였다.

“…….”

교과서를 정리해 넣으면서 난 옆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도 자신의 자리를 치우고 나서 잠깐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침에 본 그녀는 묘하게 밝아 보였다.

발렌티나와 함께 등교해선 아침부터 난리법석인 상황을 묻더니 이럴 줄 알았다며 깔깔거리며 웃기도 했다.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그녀를 보며 나 역시 즐거웠지만, 문득 며칠 전의 기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번 주에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본 아나스타샤는 약간 피곤한 모습이었다.

저녁식사는 가족들끼리 하라고 했던 것도 어떠한 종류의 피로와 관계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날 온종일 나와 어울려 주었으니 피곤할 만도 했지만, 난 그녀가 계속 무언가 견디고 있음을 느끼고 조금 걱정스러웠다.

내가 계단을 두려워하고 존재 의의에 의문을 품고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단상에 올라 훈장을 받는 결정을 내린 것처럼, 아나스타샤 역시 괴롭고 어려운 생각과 결정들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느끼는 죄책감은 어쩌면 나보다 클지도 모른다.

게다가 부자연스럽게 굳어져 버린 우리 관계에 대해서도 답답함을 느낄 테고.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대하고 웃고 이야기하는 건 너무 이상하고 기이한 일이었다.

분명 누군가 참고 있다면 그건 나보단 아나스타샤 쪽이겠지.

‘그런데 오늘은 기분 좋아 보여.’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평소 같으면 나도 가르쳐 달라고 살짝 물어보겠지만, 어쩐지 그녀가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말을 붙이기가 조금 어려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내 시선을 눈치챈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었다.

“왜?”

“아니에요, 그냥.”

대충 얼버무리자 실없는 소리는 상관없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밥 먹으러 갈까?”

“그럴까요.”

난 짧게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렌티나도 같이 가자며 따라붙었고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계단을 내려갔다.

식당에 가기 전까지가 승부수라 생각하는지 발렌티나가 은근히 내 쪽으로 바짝 달라붙으며 말했다.

“오늘은 나가서 먹을래? 좋은 날이잖아.”

“그건 엊그제였잖아요? 오늘은 월요일이에요. 기분 내는 것도 좋지만 학생이라면…….”

“으아, 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그렇게 고지식하니? 내가 미쳐.”

여러 축하를 받았으니 기념적인 날이긴 하지만 오늘도 그 기분에 취하면 일주일 내내 그러지 말란 법이 없고, 난 그렇게 무언가에 취하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이었다.

공로 예술가가 아니라 그 이상이 되더라도 결국에 난 학생으로서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곳을 택한 건 내 선택이었으므로 충실하게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급식을 함부로 거르지 않으려 하는 내 원칙엔 그러한 길고 긴 이유들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한마디만 해도 진저리치는 발렌티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봐야 그녀가 좋아할 것 같진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가볍게 미소를 지으니 발렌티나는 결국 얌전히 날 따라왔다

그녀는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인데도 고집을 잘 부리지 않고 배려심이 강했다.

학교 밖에선 내가 그녀의 말을 잘 들어 주는 것도 그런 그녀에게 보답이 필요하다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

그런데 식당에 가까워지고, 점심시간을 맞이해 이곳을 찾은 학생들이 많이 보이면 보일수록 점점 난 오늘만큼은 발렌티나의 의견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모여 있던 학생들이 저기 보라는 듯 내 쪽을 손짓하는 건 예사고 속닥거리면서 점점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이 인파를 뚫고 식당에 들어가서 앉기가 겁난다.

이 분위기를 예민하게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도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으며 말했다.

“당분간은 이럴 것 같은데?”

“…….”

관심을 즐길 수 있는 성격이라면 좋은 일이겠지만, 난 약간 부담스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발렌티나는 자신이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오늘만 넘겨도 내일은 이 정도는 아닐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나가자. 어때?”

“……그래야겠네요.”

이렇게까지 말해 주는데도 무조건 급식을 먹겠다고 하는 건 그야말로 고집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

별수 없이 나는 발렌티나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이끌었다.

아르바트 거리 쪽으로 조금 걷다 보면 있는 레스토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차량 없이 걸어서 이동해도 몇 분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발렌티나의 추천에 따라 파스타를 주문하고, 난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친구를 바라보았다.

“…….”

만약 나 혼자였다면 이렇게 나올 생각도 못 했겠지. 오늘 하루 내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식사도 그냥 식당에서 했을 것이다.

그 관심은 물론 휘발성이 짙지만, 그 말인즉슨 그만큼 폭발력도 강하다는 의미다.

모든 걸 감당하고 나면 아마 오늘 정말 많이 피곤했겠지.

그러나 지금 친구들 덕분에 난 밖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기분도 좋았고 어떤 이야기를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저번에 마지막으로 무슨 이야기를 했었더라?

모종의 의무감을 느낀 난 해야 할 이야기 등을 떠올리며 물끄러미 발렌티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문득 눈을 마주친 발렌티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

왜?

난 그녀의 몸짓에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무엇을 할 필요 없다는 뜻이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있어도 된다는 건지, 아니면 아예 말을 하지 말라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지금 발렌티나가 내게 딱히 바라는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약간 놀라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부채감을 지니며 두 아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알아차릴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발렌티나가 이렇게 괜찮다는 표시를 할 정도면 난 정말로 드러날 정도로 많이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머릿속에 어렴풋이 박혀 있는 부채감은 잊히지 않고 종종 날 몰아세웠다.

명함을 만들거나 영화를 보면서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 곧 이 아이들에게 인내를 강요하는 불성실한 일이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발렌티나의 표정을 보면서 난 생각을 조금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무척이나 서로에게 성실하기에 우리는 지금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따뜻한 애정과 바람이 이쪽으로 향한다.

물론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난 발렌티나에게 따라주기로 했다.

“밥 먹고…… 바로 들어가야겠네. 나 레

슨 있어서.”

“난 이따 4시에.”

두 사람 다 월요일 레슨이구나.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 없어요. 개인 연습을 해야겠네요.”

“바로?”

“음…… 그 전에 잠깐 스터디룸에 들르려고 해요.”

“그러니? 그럼 나도 같이 가야지.”

“정말요?”

난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4시에 레슨이라면 그녀와 같이 스터디룸에서 공부를 하며 이야기도 많이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어중간한 형태로 충격을 받아 굳어져 버린 우리 관계에 대한 이야기까지 할 순 없겠지만, 발렌티나가 바라는 대로 그저 친구로서 함께 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시간이라면 그걸 쌓아나가는 건 오늘부터라도 괜찮겠지.

잠시 후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고 우린 간간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식사하기 시작했다.

***

아나톨리는 이만큼 무서웠던 적이 있었나 떠올렸다.

합주 시간에 혼자 틀려서 지적당했을 때, 몇 년 전 타티아나를 처음 보고 유령인 줄 알았을 때.

그리고 바로 지금.

“아나톨리라고 했지. 바이올린과 4학년.”

“네…….”

“목소리가 작군. 점심은 먹었나?”

“먹었습니다…….”

목소리를 크게 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아침에 봤던 그 모습이 좀처럼 사라지질 않아서 움츠러들 뿐이었다.

구세프는 팔짱을 끼고 앉아선 무언가 탐탁지 않은 듯 목을 건들거렸다.

“…….”

이 무서운 피아노과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처럼 내려져오고 있어서 아나톨리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도 다르고 학년도 낮아서 전혀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상상도 못한 스터디룸에서 이렇게 보고 있자니 식은땀이 절로 났다.

심지어 여기에 있는 선생님은 구세프 한 명뿐만이 아니었다.

“자네가 무섭게 구니까 그런 것 아닌가?”

“내가? 뭘?”

“것참…….”

미하일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 피아노과의 두 선생님은 리처드가 모셔 온 것이었다.

평소 스터디룸에서 자주 모이는 친구들은 오늘 타티아나의 축하를 한 번 더 하자면서 준비했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점심시간에 잠시 타티아나를 데리고 시간을 끌기로 하고, 그사이 리처드와 한승우, 아나톨리, 류보비, 그리고 사샤가 먹을거리와 선물 등을 준비했다.

그러면서 조금 더 특별하게 선생님들까지 모시는 건 좋았는데, 막상 이렇게 아나톨리에게 맡겨 놓고는 다들 어디로 가 버렸는지 모르겠다.

리처드를 원망하며 아나톨리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미하일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이 친구가 원래 좀 이러니 이해해 줬으면 좋겠구나.”

구세프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보고 있는데, 이해한다고 대답해도 말실수고 괜찮다고 해도 혼날 것 같다.

아나톨리는 말없이 눈치만 살폈다. 미하일은 한층 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타티아나에게 이야기 들었단다. 눈여겨보고 있는 바이올린과 후배가 있다고.”

“그…… 그런가요?”

“그래. 바이올린을 받았다고 했지? 타티아나가 언젠가 말했었는데.”

“맞아요. 이 바이올린이에요.”

“흠, 내가 봐도 될까.”

미하일의 요청에 아나톨리는 조심스레 자신의 바이올린을 건네주었다.

지도 선생님인 타마라가 평소 신신당부하길 다른 사람에게 바이올린을 절대 함부로 보여 주지 말라고 했지만, 타과 선생님에게 보여 주는 건 당연히 괜찮을 것이다.

잠시 바이올린을 살펴보던 미하일의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옆에서 곁눈질로 흥미를 보이던 구세프는 어느 순간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잠깐만, 과다니니야 그거?”

“그런 것 같군. 여기 증명서도…….”

“맙소사. 이런 걸 4학년한테 줬다고?”

그 목소리는 아나톨리가 아니라 분명 타티아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언뜻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아나톨리는 당혹스러워하며 어떻게든 타티아나를 변호하려 했다.

이렇게 귀중한 바이올린을 받은 일로 타티아나가 구세프에게 혼이라도 난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러나 그 사이를 빠르게 파고든 건 미하일이었다.

“4학년이 과다니니를 쓰면 안 되나? 우리도 그 반절 되는 나이서부터 스타인웨이를 만져 오며 익숙해졌는데.”

“…….”

어려서부터 재능을 보여 최고의 악기로 연주자의 길을 걸어온 건 구세프도 미하일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구세프는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었지만, 같은 최상급의 악기라 하더라도 가격차이가 무시무시하게 난다는 걸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는 듯했다.

그러나 한참을 골몰하던 구세프는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녀석다운 선택이군.”

“그렇게 생각하나?”

“그래. 당장 자신에게 오는 건 사탕 하나라도 신중해하면서 남한테 무언가 줄 땐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주저하지 않지. 대범하다고 해야 하나.”

그간 봐 온 무언가를 근거로 해서 이해했는지 구세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처음으로 웃으며 아나톨리를 바라보았다.

“괜히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건 멋없는 짓이겠군. 알겠다.”

“…….”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나톨리는 구세프의 눈에 들었다는 걸 느꼈다. 그만큼 타티아나의 실력과 신뢰는 높았던 것이다.

아나톨리는 아침에 봤던 그녀를 다시금 떠올리며 다시 한번 떨어져 있는 거리가 얼마 정도인지 가늠해 보았다.

그저 아득하다.

하지만 그렇게 먼 곳에서도 타티아나는 모두를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아나톨리는 그 부름에 보다 더 열심히 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렇게 선생님 둘과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저희 왔어요. 좀 늦었죠.”

“케이크도 사 왔어요.”

나가 있던 다른 멤버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거기엔 오늘 올 줄 몰랐던 한 사람이 더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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