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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873화 (873/1,277)

##  873화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마치고 나선 바로 학교로 향했다. 발렌티나의 레슨이 있기도 했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첫눈을 본 이후로 두 번째 눈이었다.

난 그 눈송이를 받으려고 손바닥을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입을 모아 입김을 불자 눈앞에 그 형태가 그려졌다.

잠시 그렇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살짝 다가와 물었다.

“요즘은 좀 괜찮니? 원래 추위 많이 탔었잖아.”

“작년보단 훨씬 좋아졌어요.”

작년 이맘때 난 제일 신경 쓰던 것 중 하나가 컨디션 관리. 그중에서도 감기에 걸리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그땐 그게 내게 주어진 조건이라 받아들이며 어떻게든 해냈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자면 불완전한 신체를 억지로 이끌어 피아노 앞에 앉히는 일은 정말 터무니없이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은 정말 잘 견디는 편이다. 현실적인 추위도 마음의 추위도.

물론 주현절 행사 때 맨몸으로 찬물에 뛰어들기도 하는 사람들에 비하자면 난 추위에 굉장히 약한 사람에 해당했지만, 지금 이 정도 추위는 체감상 괜찮다고 느껴졌다.

“그래도 내일은 조금 더 따뜻하게 다녀야겠어요.”

“그래, 나도 그래야겠어.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앞으로 할 일이 많은데.”

“할 일…… 그렇죠.”

연말이 다가오자 전 세계의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연주자인 우리에겐 정말 중요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너무 중요한 일들을 많이 겪어온 우리들은 막상 앞으로 또 겪어야 할 것들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다.

연주회나 콩쿠르 등에 관한 것들이 그러했다.

그 말을 꺼내는 것이 곧 연주자로서 독하게 앞만 보고 달려가겠다는 의사표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었을까.

나도 아나스타샤도 주춤거리는 시기였기에 서로 말조심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난 며칠 전 수훈에 대한 소감을 밝히며 앞으론 주춤거리지 않겠다고 말했고, 실제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아나스타샤도 지금 할 일이 많다고 말한 것을 보니 마음을 굳게 먹고 있는 것 같다.

어쩐지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쇼팽 콩쿠르였죠? 나가시기로 한 것.”

“응.”

“심사용 DVD는 준비하셨나요?”

“아직. 이제 해야지. 곡은 거의 다 완성했어.”

사고가 있기 전에 늘 하던 것처럼, 우리 대화는 콩쿠르 쪽으로 향할 수 있었다.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난 빙그레 웃으며 재차 물었다.

“어디에서 하실 건가요?”

“그냥 학교나…… 아니면 마카로프 씨한테 부탁하려고.”

“아, 정말요.”

학교의 시스템을 빌리는 건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많다.

예약 시간도 고려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 내가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하기도 어려우며 구도와 음향 등의 퀄리티에 간섭하기도 힘드니까.

스튜디오에서 하는 편이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았다. 물론 비용이 꽤 비싼 편이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사용할 만했다.

난 지금이다 싶어서 아나스타샤에게 제안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잘 해 주실 거예요. 저기, 같이 제작하실래요?”

이제야 그녀와 음악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함께 콩쿠르 준비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조금 더 빠르게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잠시 생각하더니 작게 고개를 저었다.

“우린 완전 각각 참가잖아. 같은 날 합주를 하는 것도 아니고 DVD 녹화인데 굳이 템포를 맞출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라서 한 마디도 반론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난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그것도 그렇네요.”

“응. 우리가 연주할 시간을 고를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이점이니까.”

연주자인 우리는 정해진 시간을 놓고 가능한 최선을 추구한다.

그러나 시간이 되었을 때 준비를 미흡하게 하거나 컨디션 관리에 트러블이 일어나는 경우는 정말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녹음을 할 땐 그런 것에서 조금 자유롭다.

최선의 컨디션이라 생각될 때, 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를 편안하게 그것도 필요하다면 반복해서 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난 무대 연주자로서의 강인함을 중요시 여기지만 음반이 가지는 이점을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정말 듀엣을 할 것이 아니라면 같이 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냥 함께 하는 것이 즐겁다는 것 정도? 그리 합리적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뿐이다.

그런데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던 그 이유를 발렌티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내 대신 말해 주나 싶을 정도였다.

“그럼 무슨 재미야? 정해진 날짜에 딱 맞춰서 실력발휘를 해 줘야 진정한 피아니스트지.”

“……또 쓸데없는 곳에서 에너지 낭비하려 하네? 발렌티나.”

“왜 그게 쓸데없니? 우리 콩쿠르는 벌써 시작한 거야.”

시크하게 자르는 아나스타샤에게 밀리지 않고 발렌티나는 멋지게 이어 말했다.

“쇼팽 콩쿠르 예선의 예선의 예선인 거라구.”

예선의 예선이 DVD심사고…… 그 DVD를 만드는 과정 자체도 경쟁이라 치면 그녀의 말이 맞나?

예선이란 말이 여러 번 들리자 조금 헷갈렸지만 대충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사실 정확히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난 발렌티나의 의견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딱히 무어라 말을 보태진 않았지만 분명 내가 발렌티나와 의견을 비슷하게 하리란 걸 눈치챘는지 아나스타샤는 슬쩍 날 보더니 이 이상 논쟁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상황판단이 빠른 그녀는 이야기를 비틀며 발렌티나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뭔가 자신 있나 본데…… 그럼 나랑 곡도 맞출래?”

“응?”

“네 곡을 다 맞추긴 조금 그러니까. 두 곡만. 어떠니? 공정하게 각각 한 곡씩.”

“어…… 지금부터? 또 준비하라고?”

“왜? 문제 있니?”

갑자기 이야기가 대결 양상으로 치닫자 발렌티나는 조금 당황했는지 주저했다.

서로 교집합에 없는 곡을 새로 준비하라는 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른 방법을 제시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애초에 경쟁심을 보인 건 발렌티나 쪽이었고, 아나스타샤가 그 부분을 확 낚아챈 순간 발렌티나는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당하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발렌티나는 고개를 더 빳빳하게 들더니 대꾸했다.

“그, 그…… 그래! 문제없지! 하자구! 네가 그러면 내가 뭐 겁낼 줄 아니? 하자!”

“네 레퍼토리부터 말해 봐.”

“뭐더라……?”

“……장난하니 지금?”

아나스타샤가 눈을 흘겼고 발렌티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그때 내가 슬쩍 끼어들며 이야기했다.

“진정하세요. 아나스타샤.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은 활용하자고 하시지 않았나요? 갑자기 대결을 하면 어떡해요?”

“쟤가 먼저 말했잖아…….”

“발렌티나에게 넘어가 주지 마세요.”

애초에 발렌티나의 편을 살짝 들어 주기 위해 나선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말실수가 나와 버렸다.

내 말을 듣자마자 발렌티나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항의했다.

“넘어가 주지 말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나 섭섭해!”

“앗, 미안해요…….”

“앞으로 안 넘어가 주기만 해 봐. 가만 안 있을 거야.”

“……대체 뭘 하시려고 그래요?”

이제부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알면서도 넘어가 줘야 하나……? 난 덫에 걸린 기분이었지만 결국 발렌티나를 달래기 위해 알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이나 다름없는 대답을 얻어낸 발렌티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앞서나갔다. 난 별수 없이 웃으며 따라갔다.

학교에 도착하자 발렌티나가 내게 물었다.

“스터디룸으로 바로 갈 거야?”

“예.”

“나도 가.”

“레슨은요?”

“갔다가 가려고.”

아직 점심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스터디룸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가는 것도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보통은 레슨 전에 시간이 있다면 연습실에 가서 연습을 하는 편이다.

특히 발렌티나는 벼락치기 연습에 능한 편이었는데 시간을 달리 쓸 이유가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스터디룸 앞에 다다랐을 때 알 수 있었다.

***

류보비는 이 스터디룸에 들락날락하면서 그간 축하 파티도 여러 번 함께 기획해 본 적이 있었다.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파티룸을 빌려서 하는 본격적인 파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자주 보는 친구들이 모여서 간소하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그건 이 모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타티아나가 그런 성격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녀를 위한 파티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다른 공간을 구할 것 없이 스터디룸에서 준비되었고, 너무 화려하게 준비하지도 않았다.

케이크와 간식들 그리고 선물들이 준비되었을 뿐이다.

다만 평소와 조금 다를 것이 있다면 바로 선생님들을 두 분이나 모셔 왔다는 점이었다.

타티아나가 정말로 기뻐할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친구들은 정말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구세프는 공부를 위해 써야 할 공간에서 파티를 한다는 걸 찬성하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그렇다고 반대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류보비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 엄한 선생님도 타티아나를 위한 일이라면 교칙을 살짝 눈감아 줄 정도로 그녀를 아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학교에 온 에르네스트가 있기도 했고.

“야, 한승우. 거기 살짝 틀어졌잖아. 정면으로 똑바로 놓으라고.”

“……니가 하든가.”

“이 팔로?”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반깁스를 하고 있었지만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는지 농담도 하고 있었다.

되레 받아 줘야 할 쪽에서 당황할 정도였다.

어떻게 보면 에르네스트가 이기적으로 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잘 보면 절대로 선을 넘는 농담을 하지 않는다.

에르네스트는 단지 친구들이 편하게 자신을 대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걸 제일 빠르게 받아들인 건 리처드였다.

“멀쩡한 손으로 하라고. 넌 대체 여기 왜 왔냐?”

“놀러 왔지. 그리고 난 오른손잡이라서 왼손으론 글씨도 잘 못 써. 삐딱해진다고.”

에르네스트는 또 아슬아슬한 농담을 했고 모두가 서늘함을 느낄 때였다. 리처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꾸했다.

“재활을 양손 다 해야겠네.”

“뭐 이 자식아?”

“그렇게 삐딱하면 팔도 삐딱하게 붙으니까 도울 거면 좀 제대로 도우라고.”

“너 진짜 깁스로 맞아 볼래?”

두 사람이 나누는 무시무시한 대화는 천하의 구세프 선생님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심하게 다쳤으면서도 저런 농담을 주고받는 것에 대해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 같다.

하지만 리처드와 다투는 에르네스트가 즐겁다는 듯 웃고 있다는 건 모두가 볼 수 있었다.

류보비는 전혀 긴장하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세 명의 10학년 남학생들이 투닥거리며 큰 틀을 짜고, 나머지 류보비, 아나톨리, 사샤는 자잘한 디테일들을 챙겼다.

선생님들이 보면서 마지막으로 허락하는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장난에만 집중하는 것 같던 에르네스트는 세세한 것도 모두 보고 있었다.

“그건 뭐야, 폭죽?”

“서프라이즈니까. 들어오면 터뜨리려고.”

타티아나가 곧 도착할 것이란 첩보를 입수하고, 문을 가운데에 두고 양옆으로 선 리처드와 한승우는 각자 손에 작은 폭죽을 들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리처드는 폭죽의 각도를 높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자체를 반대했다.

“그건 안 하는 게 좋겠어.”

“왜?”

“……오늘 우리 진짜 목적이 뭐야? 공로 예술가 훈장 받은 거 축하하는 자리잖아? 놀라게 하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에르네스트가 말했고 리처드 역시 그 말을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생각해 보다가 폭죽을 거두었다.

에르네스트가 중간중간 내는 제안은 정말 이 파티 자체의 퀄리티보다는 주인공인 타티아나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초점이 가 있었다.

그만큼 그녀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에르네스트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류보비는 살짝 부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곧 문 건너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바짝 긴장하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노크가 두어 번 들리고, 타티아나가 조심스레 문을 열며 들어섰다.

안쪽을 본 타티아나의 눈이 커졌다. 폭죽은 없었으므로 그 대신 류보비가 소리쳤다.

“공로 예술가 되신 것 축하해요 타티아나 언니!”

류보비의 시작을 필두로 양옆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런 일이었는지 머뭇거리던 타티아나의 시선은 방 안을 살피다가 두 명의 선생님 그리고 에르네스트까지 발견하고는 더더욱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흔들렸다.

그녀는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온다고 했었잖아.”

에르네스트는 당연한 일인 것처럼 이야기했고, 타티아나는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한참 지나서야 타티아나는 앞으로 두어 걸음 나왔다. 양옆에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를 두고 가운데에 선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다들…….”

타티아나의 목소리에선 약간의 물기가 느껴졌다.

류보비는 그녀가 공로 예술가이기 이전에 여전히 타티아나 그대로라는 것을 느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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