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4화
아침에 아나톨리가 스터디룸에 올 거냐고 묻기도 했고, 어렴풋이 예견하고 있던 바는 있었다.
아마 이 애들이 날 위해 무언가 준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기대까지 닿진 않았지만 만약 파티가 있다 하더라도 난 그리 놀라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직접 마주하고 나니 절대로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날 바라보며 박수를 치고 있는 친구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박수를 칠 수 없으니 현악기 주자들이 하듯 손가락만 들어 책상을 치고 있는 에르네스트.
에르네스트와 구세프 선생님이 이런 자리에까지 와서 날 축하해 주려 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부터 흐르기 시작했다.
급히 뒤돌아 손수건을 찾자 리처드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작 훈장 받을 때도 담백하게 받았으면서 이런 걸로 감동받으면 우리가 미안한데.”
그의 말대로 내 태도는 조금 이상한 면이 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난 뻔뻔하게 고개를 틀며 대꾸했다.
“그럼 어떡해요.”
“아니 꼭 어떻게 하란 건 아니고.”
리처드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고 양손을 들어 올리며 웃는다.
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핀잔을 들어가면서도 분위기를 바꾸는 데에 앞장서는 사람이었다. 결국 난 웃으며 다시 옆을 바라보았다.
발렌티나도 나랑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서 난 먼저 말을 걸었다.
“이 준비로 절 데리고 나갔던 건가요?”
“뭐…… 그냥 그러고 싶기도 했고. 어때? 마음에 들어?”
내가 교내 식당에서 금방 식사를 마치고 올라와 버리면 시간을 끌기가 애매하니 밖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렌티나가 했던 것들에 연기라 할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빙그레 웃는 그녀를 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로.”
“그렇게 보인다. 얘.”
그리고 아나스타샤도 두 손을 모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같이 돌아다니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조금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리 복잡할 건 없었다.
“기뻐해 줘서 나도 기뻐. 타티아나.”
“……고마워요.”
기뻐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있었을 뿐이고, 그렇기에 지금 우리 사이엔 다른 말이 딱히 필요 없을 정도였다. 뭘 더 바라야 하는 걸까?
다시 난 준비된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케이크는 또 어떻게 주문한 건지, 심지어 그 위에 공로 예술가 타티아나 유리예브나를 축하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기까지 했다.
이 케이크는 어쩐지 훈장만큼이나 강렬하게 내 마음에 와닿는 느낌이 있었다.
이 공간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내 기억에 새기고 싶은 마음으로 잠시간 바라보았다.
미하일 선생님이 한 발자국 다가오며 말씀하셨다.
“가 봐야 하나 몇 번이나 고민했단다. 그건 알겠지.”
“예…….”
“그래도 잘 하고 왔더구나. 축하한다. 타티아나.”
“감사합니다.”
짧고 간략한 칭찬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내가 고민 끝에 결정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이해해 주고 계셨다.
그래도 어떻게 지도 선생님이 그 중요한 자리에 오시지 않을 수 있느냐고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난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훈장을 받는 자리에 오지 않으셨던 건 그 결정에 조금이라도 영향이 되지 않겠다는 존중의 의미가 있기도 했다.
그리고 내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오지 않았던 선생님은 한 분 더 계셨다.
물끄러미 옆을 돌아보니, 구세프 선생님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앉아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엄청난 고함소리로 학교를 공포에 떨게 만드셨던 그 선생님과 얼굴을 마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구세프 선생님의 모습이 그런 무서운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빙그레 웃어 보이자 선생님은 왠지 인상을 쓰더니 심술궂게 말했다.
“내 이름도 소감인사에 끼워 넣어줄 줄은 몰랐었는데. 솔직히 대충 지나갈 줄 알았다.”
“대, 대충이라뇨?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농담이라는 거지. 정색하지 마라.”
“……지나치세요.”
나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 되묻자 선생님은 내가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다는 듯 다시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며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미하일 선생님은 껄껄 웃으며 말씀하셨다.
“이 친구도 지금 쑥스러워서 괜히 그러는 거지. 공식 석상에서 감사인사 받는 건 오랜만이지 않나? 한 10년도 더 되었을 것 같은데.”
“쳇.”
“어…… 에르네스트는요?”
난 그의 이름을 어지간해선 선생님 앞에서 내 입으로 꺼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으나 이번엔 살짝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제자인 에르네스트도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은 적이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오래 전 일은 아닐 텐데, 왜 10년이라는 시간이 나오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내 말을 듣자마자 구세프 선생님은 싸늘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에르네스트를 슬쩍 노려보더니 말했다.
“저 녀석은 그때 인사고 뭐고 자기 할 말만 하고 내려갔다.”
“예?”
“아주 자기가 혼자 다 한 줄 알아.”
당황한 난 에르네스트와 구세프 선생님 사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땐 사이가 안 좋았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에르네스트가 지도 선생님의 이름을 소감에서 뺄 정도로 경우가 없는 사람은 아닐 텐데…….
그런데 어릴 적 에르네스트라면 또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가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혼자서 무슨 일이었을까 상상하고 있자 에르네스트는 괜한 오해를 사는 건 싫다는 듯 빠르게 말했다.
“그때 바로 죄송하다고 사과드렸잖습니까…… 저도 그런 건 처음이라서 긴장했었다고요.”
“긴장했다면 대본이라도 준비해 갔어야지. 그런 것도 없이 자신만만하게 오르더니…… 주구장창 당찬 포부만 늘어놓고…… 쯧.”
“대본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머릿속으로 준비도 별로 못 하고 가서…….”
“그게 자랑이냐 지금!”
“요즘은 잘 하잖아요 그래서.”
“잘 하긴 뭘 잘 해! 이 녀석아!”
구세프 선생님은 그렇지 않아도 요즘 마음고생이 심한데 에르네스트가 대들자 화가 났는지 벌컥 소리를 질렀고, 에르네스트는 그 나름대로 한참 지난 이야기로 또 혼낸다고 느꼈는지 삐쳐선 입을 다물었다.
난 중간에서 약간 어색한 미소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말릴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사이 테이블 한편에 서 있던 사샤가 말했다.
“소감 진짜 멋졌어요.”
“그랬나요?”
“네. 저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후후, 다행이네요.”
난 언젠가 사샤에게 날 닮지 말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샤는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단하다고 봐 준다면 그것도 괜찮다.
난 이 아이들이 의문을 가지지 않도록 행동하는 데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새삼 다짐하며 웃어 보였다.
그때 옆에 있던 류보비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언니 훈장 보여 주세요! 구경하고 싶어요!”
“앗…….”
난 뜻밖의 요청에 당황했다.
류보비가 설마 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그러나 그렇게 본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집에 놓고 왔어요…….”
“……언니.”
어떻게 그걸 두고 올 수 있냐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학교에 훈장을 가져오는 건 너무 자랑하려는 것 같아서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시 오늘 아침으로 시간을 돌린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했겠지만, 선생님들을 보니 그래도 가지고 왔어야 했나 생각이 들었다.
“죄송해요. 선생님들께도 보여 드렸어야 했는데.”
“하하, 받았으면 되었지.”
“봐서 뭐 하나. 우리 집에도 있어.”
이렇게 쿨하게 답하실 줄은 몰랐는데…….
정말 보고 싶지 않으신 건 아닐 텐데. 약간 머뭇거리고 있자 에르네스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감사인사 들었다고 너무 좋아하시네…….”
괜히 중얼거리는 게 마치 들으라는 것 같기도 했다. 다시 한번 구세프 선생님은 눈을 부라렸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길 잠시. 곧 내게만 집중되어 있던 시선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며 왁자지껄하게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각자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기사 같은 걸 찾아보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난 에르네스트를 살짝 불렀다.
“에르네스트.”
“응.”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이미 당일에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직접 와서 친구들과 어울려 날 축하해 주려 한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제대로 표현해야겠단 생각이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자신의 일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 아무런 인내도 없이 이 자리에 올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특히 연주자라면.
난 절대로 연민 등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봐선 안 된다.
그건 그를 하여금 또 신경 쓰이게 할 테니까. 때문에 단지 순수한 감사만을 담아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더니 농담조로 대꾸했다.
“어떻게 들리긴? 진짜로 고마워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
“그리고 나야말로 네게 고마운 게 많아.”
“예……?”
그다음으로 내게 향한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그는 왼손을 들더니 내 앞에 보이도록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이야기했다.
“봐 봐. 난 네 덕에 작곡도 시작했고, 긴장을 놓지 못하고 빨리 복귀하고 싶은 마음도 느끼고 있어.”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그는 손을 모두 접어 내리고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아마 네가 없이 혼자 다쳤다면 지금이랑은 전혀 다른 생각이었을걸.”
“……혼자?”
“작곡도 복귀도 비관적으로 생각했을걸. 예전의 나라면 분명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어.”
“그럴 리가요…….”
“하지만 지금은 봐.”
사고에 대한 비관이나 어두운 생각들은 이미 멀리 치워버린 지 오래라는 듯, 그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보였다.
“의사가 이렇게 빠르게 회복하는 경우는 처음 본다고 놀랄 정도로 좋아지고 있고, 선생님도 마음 놓고 이젠 내가 복귀하는 날만 기다리고 있잖아.”
“복귀할 때 각오하고 있어라 에르네스트. 진짜 집중레슨이 뭔지 보여 주마.”
“……좀 말려 줘. 나 죽겠어.”
가만히 듣고만 있던 구세프 선생님이 끼어들었고 에르네스트가 앓는 소리를 내자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이제 우리 정말로 슬퍼하거나 어쩔 줄 몰라 하지 않고 앞을 바라볼 수 있었다.
거기엔 정말 많은 노력과 배려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에르네스트는 비단 요즈음 몇 주뿐만이 아니라 먼 옛날까지 떠올리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윽고 내 확신 또한 믿고 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예전부터 네 말 듣길 잘 했어. 그리고 너도 내 말 듣길 잘 했지?”
에르네스트를 내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하겠단 생각은 없었다.
난 그저 그의 미래에 좋은 방향이 될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돕길 바랐을 뿐이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 테고.
우린 정말 많은 영향을 교류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것이 결과적으로 정말 좋은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네요.”
“그럼 됐어.”
그는 쿨하게 웃더니 왼손으로 접시를 들었다.
“자, 케이크나 나눠 먹자. 식사는 하고 온 거지?”
“예.”
“그럼 조금만 먹어도 괜찮아.”
“아, 제가 잘라 드릴게요.”
“고마워.”
요령이 나쁘지 않은 그는 한 손으로도 알아서 할 수 있었겠지만, 난 꼭 지금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