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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875화 (875/1,277)

##  875화

내 축하 파티는 생각보다 꽤 준비가 철저했다.

친구들은 날 위해 케이크는 물론이고 선물까지 주었다.

상상도 못한 타이밍에 갑자기 선물 수여식이 있다길래 뭔가 싶어 어리둥절해하고 있자 갑자기 류보비가 커다랗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언니, 이거.”

“아…… 고마워요. 류보비.”

“열어 보세요.”

커다란 선물을 받아 든 나는 어떻게 해야 포장지를 찢지 않고 뜯을 수 있을까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다가 테이프를 찾아 떼어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분홍색 방석이었다. 난 그 방석을 안아 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굉장히 폭신하네요.”

류보비는 내 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곧 추워지니까요…….”

“후후, 이것만 있으면 걱정없겠어요.”

무엇이든 난 잘 쓸 자신이 있었다.

그 뒤로도 몇 개나 선물들이 전해졌다. 한승우는 영양제 세트, 아나톨리는 비누로 된 꽃 화분. 사샤는 머그컵이었다.

그리고 시상식 날부터 오늘까지 계속 함께 있었던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도 빼놓지 않고 내게 선물을 해 주었다.

작은 인형과 스마트폰 케이스였다. 이런 걸 대체 언제 준비했는지 모르겠다.

모두들 귀엽고 활용도도 높은 물건들이어서 마음에 쏙 들었다.

조금 멀찌감치 있던 리처드도 가방에서 무언가 꺼내더니 내게 주었다.

“책인가요?”

“응. 포장은 따로 못 했어. 이해해 줘.”

“그건 상관없어요.”

리처드가 준 것은 아무 포장 없는 책 한 권이었다.

평범하고 좋은 선물이었다. 난 평소 독서를 많이 하는 편이기도 하고.

별생각 없이 난 책을 받아 들고 제목을 보았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꽤 재미있어. 1964년 SF작품치고는.”

슬쩍 책의 겉날개를 살펴보았다.

저자는 아르카디와 보리스라는 이름의 스트루가츠키 형제. 소련 시대의 작가들이었다. 책 내용은 완전한 SF인 것 같고.

그러나 평소 생각이 깊은 그가 선물할 책을 고를 때 그냥 서점에 가서 재미있어 보이는 걸로 아무거나 집었을 것 같진 않았다.

이 제목이야말로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지 보여 주는 여실한 증거나 다름없다는 기분이 든다.

종종 그가 내비쳤던 관점이 보다 또렷해졌다.

사실 리처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내게 종종 하는 농담이긴 했다. 하지만 난 그런 농담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난 피아노의 신 같은 게 아니다. 그럴 능력도 없고 그렇게 될 생각도 없다.

리처드는 내가 어떤 성격인지 어느 정도 안다. 그리고 알면서도 이런 장난을 쳤다면 두 배로 나쁘다.

이게 무슨 뜻이냔 눈빛으로 바라보니 리처드는 내가 이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난 그를 흘겨보며 작게 물었다.

“왜 웃으시나요?”

“신은 무슨 신이냐고 하고 싶은 거지?”

“훈장 같은 걸 받았다고 그렇게 교만에 빠질 만큼 제가 경망스러워 보이시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자세한 건 내용을 읽어 봐.”

“예?”

“그 책의 주인공은 사람이니까.”

살짝 질책조로 말을 붙였던 난 입을 다물었다.

리처드가 책으로 무언가 전하고 싶었다는 것까지 이해했다면, 그 내용이 결코 단순한 장난이나 괴롭힘 같은 것이 아닐 것이란 것까지 믿어줘야만 했다.

심지어 지금은 선물을 받은 상황인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건 정말 실례였다. 난 황급히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읽어보고 감상을 말씀드릴게요.”

“굳이 나한테 말할 필요는 없어. 말로 하면 정리되어버리니까. 그냥 생각으로만 가지고 있는 게 나을지도?”

“……정리하는 게 좋은 것 아닌가요?”

“글쎄, 그렇지도 않더라고.”

리처드는 이번에도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스쳐지나가듯 이야기했다.

그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대체로 그 결과는 좋은 편이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책을 읽어 보고 나서 생각해도 되겠지.

내 긍정을 확인한 리처드는 빙그레 웃더니 옆의 선생님들을 돌아보았다.

“선생님들 차례입니다.”

차례라 할 것까지 있나 싶었지만, 생각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미하일 선생님이 내 앞으로 나섰다.

약간 긴장되는 마음으로 바라보니 선생님이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말씀하셨다.

“와달란 말을 오늘 아침에 들어서 준비할 시간이 없었단다. 양해해 줬으면 좋겠구나.”

“아하하, 괜찮아요. 정말로요.”

“그래…… 자.”

정말 뭐든지 좋다는 생각이었는데, 선생님이 주신 건 정말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카푸스틴의 소나타 악보네요!?”

“네 연습실엔 거의 모든 악보들이 구비되어 있지만, 이건 없다고 했었지?”

“예, 그렇지 않아도 사려고 했었는데…… 감사합니다.”

“다행이구나.”

곧잘 들리는 음악인데도 의외로 악보를 구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그냥 인터넷으로 잔뜩 사버릴까 생각하던 차에 이렇게 받게 될 줄은 몰랐다.

난 신이 나서 바로 악보를 이리저리 넘겨보다가, 레이저처럼 느껴지는 시선을 발견했다. 구세프 선생님이었다.

무시하지 말란 표정을 짓고 계시니 절로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내가 바라보자 선생님은 불쑥 상자를 내밀었다.

“자.”

“선생님도 주시는 건가요?”

“…….”

장난이라도 칠 생각이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노려보시니 무서워서라도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난 얌전히 포장된 상자를 받아선 풀어보았다.

그 안에 든 건 고풍스러운 장식이 된 나무 오르골이었다.

한눈에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아 바라보니 구세프 선생님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씀하셨다.

“예전에 내가 공로 예술가 훈장을 받았을 때, 내 은사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것이지. 네게 주마.”

“그렇다면 이건…… 에르네스트가…….”

“아까 이야기했잖나. 저 녀석이 자기 할 이야기만 했었다고. 선물로 줄 타이밍을 놓쳐버려서 지금까지 그냥 가지고 있었다.”

“…….”

대체 얼마나 속상하셨던 건가요?

그러나 타이밍을 놓쳐서 못 주었다는 말은 조금 어이없게 들리면서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다만 이 물건 자체가 사소하게 보이진 않았다.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씀하셨지만, 지금까지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데 이런 것들은 대체로 중요한 것들이었다.

난 괜찮냐는 듯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웃으며 왼손을 위쪽으로 펼쳐보였다. 내가 가져도 좋다는 뜻이었다.

물론 정통성을 따지자면 구세프 선생님의 애제자이자 먼저 공로 예술가가 된 에르네스트가 이걸 가져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가 한 자리에서 동의하는 일이라면 난 그 결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난 이미 구세프 선생님의 또 한 명의 제자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이 오르골은 그 관계를 보다 확실하게 증명하는 듯했다.

이런 물건은 아무리 많더라도 좋았다.

“타티아나, 나도.”

그리고 선생님들에 이어 마지막으로 내 앞에 선 것은 에르네스트였다.

그는 스마트폰을 내게 내밀며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저번에 했었던 파일 전송 방식이었다.

난 스마트폰을 들고 그가 보내는 파일을 받았다. 다시 고개를 들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저번에 네가 줬었던 녹음 음반…… 여러 번 들어 봤어. 그러고 나서 이번에 쓴 곡이야. 너한테 줄게.”

“……너무 많이 주시는 것 아닌가요?”

“괜찮아.”

뭔가 했더니 이전에 내가 연주한 것에 대한 답변이라 할 수 있는 곡이었다.

당장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난 천천히 보기로 마음먹곤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너무 많은 것들을 받았다. 기분 좋게 웃으며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악보와 오르골을 챙겨들자 리처드가 말했다.

“그럼 선물타임도 끝났으니 먹기나 할까.”

“넌 이게 목적이었지?”

“당연한 것 아냐?”

리처드는 실없이 대답하며 포크를 들었다. 그의 농담에 다른 친구들도 웃으며 다시 모두 테이블 앞에 앉았다.

나지막한 담소가 흐르고 케이크와 간식 등을 먹는 사이, 난 방금 전 받은 선물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

생일도 아닌데 선물을 받는 기분이 묘했다.

애초에 훈장을 받은 건 나니까 이 파티를 주최하거나 선물을 주는 것도 내가 했어야 하는 일 같은데, 지금 이 분위기에선 모두가 이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주위를 둘러보고, 선생님들과 눈을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언제라도 날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에 대한 상을 받은 것은 그저 이유일 뿐이었다.

날 칭찬해주는 자리를 만들기에 아주 적절한 이유.

그간 내가 해온 일들에 대한 깊은 존중과 격려가 느껴진다.

‘불안해지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에르네스트의 일로 내가 스스로를 불신하고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흔들림을 느끼고 있을 때,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나보다 더 크게 흔들렸을 테지.

되도록 그런 일이 없도록 보다 강하게, 깊게 뿌리내려야만 한다. 난 그런 생각으로 포크를 케이크에 박아넣었다.

내 주위는 금세 시끌시끌해졌다.

“오랜만에 이렇게 다들 모이니까 좋네.”

“그렇지? 그러니까 가급적 좋은 일들을 만들어 보자구. 좋은 일을.”

“그게 어디 쉽겠냐.”

“쉽지 않으니 모이기에 핑계가 좋은 거 아니겠어?”

그렇게 축하 파티는 케이크를 다 나누어 먹고도 조금 더 지속되었다.

우리끼리 각자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때때론 선생님들과 질답을 교환하기도 했다.

파티라고 하기엔 너무 건전한 느낌이었다.

그 전에 건전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선생님들이 있다 보니 보다 질서 있는 장소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 공간이 스터디룸으로, 이 시간이 파티라고 규정되어 있는 이상 선생님들이 봐 줄 수 있는 것도 적당한 선이 존재했다.

“슬슬 시간이 되었군.”

구세프 선생님이 시계를 보더니 말씀하셨다. 무슨 시간인진 굳이 설명하지 않으셔도 알 수 있었다. 곧 있을 오후 레슨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레슨으로 갈 테니 알아서 놀고 있으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애초에 스터디룸은 공부를 하라고 있는 곳이다. 눈감아주는 건 점심시간까지였다.

상황을 정리하겠다는 듯 구세프 선생님이 좌중을 향해 물었다.

“레슨 있는 녀석은 손들어 봐라.”

당연히 아무도 손들지 않았지만, 난 나도 모르게 순간 발렌티나를 쳐다보았다.

그것을 날카롭게 캐치한 구세프 선생님이 발렌티나에게 말했다.

“우선 발렌티나.”

“아, 망했어! 타티아나! 날 보면 어떡해!”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발렌티나는 배신당한 사람처럼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봐줄 생각이 없었다.

“설마하니 날 속이려는 생각일랑 집어치워라. 그러다가 걸리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

다들 얼어붙은 채 오늘 오후 일정을 떠올리고 있자 구세프 선생님은 모두를 쭉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없나 보군. 그럼 발렌티나. 준비하러 가라.”

“전 조금만 더 있다가…….”

“어허, 그렇게 얼굴에 생크림 묻힌 채로 레슨 갈 테냐?”

“엑, 제 얼굴에요?”

깜짝 놀란 발렌티나가 허둥지둥 가방에서 거울을 찾으려 했다. 그런 그녀에게 선생님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네 마음의 얼굴 말이다.”

“……그게 뭐예요?”

준비가 안 된 상태로 파티에 들떠서 레슨에 가는 것을 경계하란 뜻으로 하신 말씀이겠지만, 발렌티나에겐 잔소리처럼 들린 모양이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녀는 바라보다가, 결국 어떻게 하든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레슨 하러 갈게…….”

“레슨 잘 받고 와요. 발렌티나.”

“응…….”

자기만 가야 하는 게 심히 억울하다는 발렌티나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당연히 그다음 선생님들이 말씀하시기 전에 우린 알아서 파티를 파하고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많다 보니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채 쓰레기를 정리하고 테이블 위를 정돈했다.

그 과정을 조금 지켜보던 선생님들은 알아서 잘 하길 믿는다며 스터디룸을 나가셨고, 그 후 청소가 끝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청소가 된 풍경만 본다면 방금 있었던 일이 마치 거짓말 같다.

그러나 모두가 공유하는 뜨거운 열기는 절대 환상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내겐 이 풍경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고 싶은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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