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6화
저녁 연습을 마치고 방에서 잠시 쉬고 있자 나제즈다가 차와 쿠키를 가지고 왔다.
“아가씨, 차 드시겠어요?”
“고마워요! 마침 목이 마르던 차였어요.”
난 보고 있던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내 주변엔 각양각색의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었다.
인형과 머그컵, 오르골 등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물건들을 본 나제즈다는 그 옆에 쟁반을 두고는 내게 물었다.
“뭐 하고 계세요?”
“아…… 이것 보시겠어요? 아하하, 귀엽죠.”
마침 자랑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잘 되었다. 난 동물들이 패턴으로 그려져 있는 스마트폰 케이스를 보여 주며 말했다.
그걸 보자마자 나제즈다는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눈치챘다.
“직접 사신 것 같진 않고…… 누구에게 받으신 건가요?”
보자마자 직접 산 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니 조금 억울했다.
하지만 어차피 자랑하려고 했던 것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난 팔을 펼쳐 보였다.
“예, 친구들이.”
“축하 선물이겠네요? 어쩌죠, 전 준비한 게 없는데.”
“괜찮아요! 저랑 차 마셔요. 나제즈다.”
난 내 옆에 있는 물건들을 얼른 치워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나제즈다는 잠깐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지 날 따라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요령 있게 찻잔에 차를 따라 준다.
침대에 걸터앉아 차를 마시는 건 좋은 예의가 아니겠지만, 차도 따뜻하고 침대도 푹신하니 심적으로 안정되는 데가 있었다.
나제즈다도 자신의 찻잔을 채우고는 천천히 마셨다.
입은 찻잔에 대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꽤 흥미로워하는 기색이었다.
“악보와 오르골…… 좋은 선물들이 많네요. 이건 비누인 것 같고요.”
“와, 어떻게 바로 알아보셨어요? 전 아직도 이 꽃이 비누라는 게 믿기질 않는데.”
“보면 알죠. 습기나 열기를 가까이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정말 녹아버리니까요.”
“앗.”
난 깜짝 놀라 화분을 주전자 옆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나제즈다는 싱긋 웃더니 그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책은…… 오.”
“보신 적이 있나요?”
“예전에요. 기억에 남아 있네요.”
신이 되기는 어렵다. 라는 제목은 오만하게 들리면서도 인상적이다.
책을 집어든 나제즈다는 기억을 떠올리는 눈빛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그렇게 두어 장 넘기는 것으로 충분했는지 그녀는 다시 날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까지 보셨나요?”
“초반 부분이에요.”
먼 미래의 지구인들은 우주를 탐험하게 되고, 수많은 행성들 중 생명체가 사는 행성을 발견한다.
그중 배경이 되는 한 행성에 존재하는 나라의 이름은 아르카나르 왕국.
중세 정도의 수준을 지닌 이곳에 과학자들은 250명 정도의 정보원을 풀어서 관찰하게 되는데, 이 정보원들은 그곳에서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주인공은 그 정보원 중 한 명이고, 때문에 인간과 신 사이에서 딜레마를 느끼고 있었다.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작정하고 깊게 따져 보자면 정말 생각해 볼 부분이 많은 내용이었다.
신이 되기가 어렵다고 해서 반대로 인간이 되는 것이 쉬운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이 어렵게 느껴지는 주제에 비해 이야기는 흥미롭게 펼쳐지고 있어서, 읽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얼마 전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으며 메슥거림을 느꼈던 것에 비하면 이 소설은 정말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축에 속했다.
나제즈다는 내 감상을 더 방해하진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읽고 계신 중이니 제가 내용에 대해 이야기할 순 없겠네요. 다만…….”
잠시 주저하던 그녀는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감상 포인트를 딱 한 부분만 짚어 주겠다는 듯 손가락을 세웠다.
“이 책의 제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고, 어떠한 솔루션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걸 염두에 두고 봐 주시면 조금 더 재미있을지도 몰라요.”
“……참고할게요.”
어제 처음 제목을 보자마자 내가 이 소설에서 읽어내고자 했던 부분은 인격신에 대한 내용이었다.
인격신이란 어떤 생각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고찰이 이 책의 메인 주제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었고.
애초에 리처드가 아무 의미 없이 주진 않았으리란 전제에서 시작했으므로, 내 관심사는 사상적 관점 등이 아니라 약간 신학적인 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어차피 신의 생각이란 알 수 없는 것이고 이 이야기도 어디까지나 인간이 지어낸 소설에 불과하지만, 늘 현실에 존재할 인과를 따지며 이유를 찾고 있는 내겐 필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어렴풋이 느끼긴 했다.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건 단지 어려움을 우리가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을.
내가 다시 책을 집어 들자 나제즈다는 어느새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고는 일어났다.
“차는 다 마시면 그냥 두세요. 이따가 치우러 올게요.”
“…….”
이 소설을 다 읽지 않은 이상 지금은 나제즈다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
언젠가 다 읽고 나면 감상을 나눌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리처드가 말한 대로 굳이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서만 정리되지 않은 단어들의 진흙으로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고.
결국 내가 끝에서 판단할 일이다.
나제즈다가 방문을 닫고 나갔고, 난 다시 책을 펼쳤다.
막 다시 펼쳐지는 이야기에선 뻣뻣한 원리원칙주의자인 주인공의 선배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
11월도 중순에 접어들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날씨는 조금 더 매서워졌고 나무들은 앙상해졌다. 가끔 내리는 눈은 점점 더 굵어져 오래 쌓여 있는 일이 많았다.
“…….”
내 생활에도 이러저런 변화들이 있었다.
몇몇 신문사에서 취재를 부탁해 와서 받아주었다.
이전까진 연주회 관련한 부분에 주목도가 너무 쏠려 있어서 모두 반려했지만, 이번엔 콩쿠르 활동 등 향후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난 이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나가겠다고 공식적으로 말해 놓은 차였다.
때문에 다른 연주자들이 아닌 내게 보다 구체적인 관심이 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기자들은 다른 음악가들에게서도 문의를 했는지 꽤 예리한 질문들을 건넸다.
쇼팽에 대한 자신감 부족이나 비르투오시즘에 대한 믿음 등. 내가 어떤 연주자인지 보다 확고하게 정의하는 것 같은 질문이었다.
그 모든 것에 난 정성스레 답했다.
쇼팽은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더 완성될 때까지 미루고 있었고, 테크닉은 당연히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게 전부라 여기진 않는다고.
나름대로 잘 대답했더니 취재를 나온 기자들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그다음엔 방송국에서도 사람들이 나왔지만, 그건 다시 한번 정중히 거절했다. 여러 번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는 건 불필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많아졌네.”
다시 한번 거절했던 사안들을 스마트폰으로 확인하고 스케줄을 정리했다.
그사이 적극적으로 연락 오는 에이전시나 오케스트라, 콘서트 디렉터가 정말 많았다.
모두 빅토르를 통해 거절하기엔 너무나 거물들이어서 하나하나 다 내가 받았다.
그중엔 콩쿠르 준비를 하는 내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제발 한 번만 만나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여러모로 곤란했다.
문득 에이전시 라파의 베르너 위넬이 생각났다. 차라리 이참에 그와 계약을 맺고 내 스케줄을 일임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직은 아니지.”
묘한 충동을 느끼며 연락처를 내려다보던 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 그와 몇 번 일도 같이 했었지만 에이전시에 들어가는 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에 이름을 올리는 것과 달리 이건 정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난 책임감 있는 연주자로서 활동하는 것을 명예롭게 여기고 있다.
적어도 콩쿠르가 끝나고 그 결과를 본 다음에도 늦지 않다.
당분간은 조금 정신없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난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오늘은 연주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의 한 걸음을 내딛는 날이었다.
코트를 입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학교 밖으로 나와 빅토르를 부르니 그는 내가 어디로 갈지 바로 알고 있었다.
“스튜디오로 모시겠습니다.”
“예, 부탁드려요.”
내년 있을 콩쿠르의 예선 프로그램은 완성 단계에 다다라 있었다.
예선을 뚫고 올라가 본선, 그리고 결선에 올라서도 어떤 음악들을 꺼내야 할지 연구하고 준비 중이었다.
협주곡에 약점이 있었던 난 특히 그 부분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모로 공부했다.
덕분에 지금은 상당히 좋은 음악을 손에 쥐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준비를 무대에서 선보이려면 일단 12월까지 제출해야 하는 예선 DVD를 잘 만들어서 통과해야만 한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서 잘 하고 싶기도 했고, 교내의 녹음실은 예약도 길고 시간도 많이 주지 않아서 난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부탁을 했다.
그는 내 전화를 받자마자 언제쯤 연락이 올지 기다리고 있었다며 흔쾌히 도와주기로 했다. 그에겐 정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익숙한 계단을 올라 스튜디오 문을 열자 베로니카가 반갑게 웃으며 맞이해 주었다.
“오랜만이네요 타티아나. 아, 공로 예술가 되신 것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이전에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하하, 괜찮아요. 한창 바쁠 때라는 건 저희가 잘 아니까. 그래도 오늘 찾아주셔서 좋네요.”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메인 컨트롤룸으로 향했다.
거대한 모니터와 스피커 그리고 온갖 전자장비들의 중심에 있는 하나의 의자.
그곳에 앉아 있던 깡마른 남자가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깊게 가라앉아 있던 날카로운 눈에 환한 빛이 올라온다.
“어서 오시죠,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마카로프 프로듀서.”
정말 꽤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었다. 난 스스럼없이 다가가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프로듀서도 내 악수를 받아주며 웃었다.
“유명인사가 되셨던데, 요즘 어떻습니까?”
“자중하고 있어요.”
“푸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내가 우스운 소리라도 했는지 프로듀서는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일어나선 옆에 있는 소파로 향했다.
나도 그를 따라가선 맞은편에 앉았다.
곧 그는 따뜻한 차를 내어주었고, 난 찻물로 입술을 살짝 적시고는 그간 있었던 이야기들을 간략하게나마 들려주었다.
연주회부터 훈장을 받기까지,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겪어야 했던 불행도.
당연히 몇 번이나 대서특필된 내용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주면서 그는 담담히 고개만 끄덕였다.
무작정 위로하거나 작곡을 할 줄 아니까 괜찮을 것이라는 둥 쉽게 말하지 않고 묵묵하게 있는 그 모습이 내겐 꽤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이야기로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이윽고 지금 여기까지 다다랐다.
“이젠 내년으로 향하는 첫 발을 뗄 때로군요.”
“예.”
조용히 대답하자 그는 피식 웃더니 이쯤하면 되었다는 듯 찻잔을 다 비워 버리곤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질문을 듣자마자 난 바로 물었다.
“지금 바로 해 봐도 되나요?”
“물론이죠.”
“그럼 할게요.”
혹시나 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가 올 시간에 맞추어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내 한 마디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표정에서 분명하게 느껴져 왔다.
우리는 말 한 마디 없이 움직였다. 그는 다시 컴퓨터 앞으로 갔고, 난 싱글 부스로 향했다.
싱글 부스 안에는 피아노와 마이크가 공간과 함께 세팅되어 있었다. 이 공간은 숨소리마저 잡아먹으며 날 피아노 연주자로서 존재하게 만든다.
“…….”
조용히 피아노를 한 바퀴 돌면서 상태를 확인하며 스스로를 준비시켜 나갔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발소리와 숨소리는 물론 심장소리마저 서서히 잦아들며 이윽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차분해진 상태로 피아노 앞에 앉아 유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마음껏 해 보라는 듯 신호했고, 난 첫 발을 건반 위로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