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7화
이 작은 공간 안에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홀로 연습할 때와 다를 바 없지만, 만들어 내야 하는 음악은 결코 연습 같아선 안 된다.
저 마이크와 카메라 너머에 분명한 청중이 있다는 가정을 놓고, 건반을 때린다.
이 울림이 당장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신경을 느슨하게 놓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
목표를 높게 두고 최선을 다한다면 그 결과는 물론 과정까지도 상대에게 전부 전해진다. 난 그러한 믿음을 잃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연습의 과정을 모두 담아 무대에 선 것처럼, 과감함 또한 정교하게 갈무리하며 건반에 쏟아붓는다.
한 번도 리듬을 놓치거나 음을 틀리지 않고 한 곡을 연주했다.
기존에 몇 번 재었던 시간과 비교해 3초도 채 차이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부스 안의 진동은 흡음재에 닿아 금방 사라진다.
그 찰나의 순간까지도 난 이 음악의 완성도를 체크하고 앞으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계산해 냈다.
부족한 점이 여전히 느껴진다.
나아갈 곳이 더 있음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
충동을 따른다면 몇 시간이고 이 곡에 집중하고 싶다. 그러나 이곳을 무대라 가정했으니 그럴 수 없다.
정확하게 가늠한 그 길을 머릿속에 새겨 넣고, 이번엔 옆으로 휙 돌아섰다.
그곳엔 또 내가 개척하다 만 땅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마이크에 잡히지 않도록 가늘고 길게 숨을 들이쉬고, 쟁기를 집어 든다.
이전에 일구고 씨앗을 뿌려 놓았던 곳은 이미 싹을 틔우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어나는 음악의 싹은 더욱 강하게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 모든 것들을 다시 한번 피아노로 그려내었다.
‘이 정도까지…….’
상상으로만 떠돌아다니며 형언으로 불가능한 여러 가지 형태와 색채가 건반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지점까지 손을 뻗어 본다. 간신히 닿을락 말락 한 구간이 어디인지 확인하고, 바로 그 밑에 손끝으로 지문을 찍어 놓았다.
저번보다 분명히 조금 더 높아졌다. 난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번째 곡을 마무리 짓고, 세 번째, 네 번째 곡 역시 마찬가지로 연달아 연주했다.
내가 멈칫거린 것은 각 곡을 마무리하고 넘어갈 때 진동이 사라지길 빌며 숨을 고르는 순간뿐이었다.
“…….”
그렇게 4곡을 연주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리는 금방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그 전부는 분명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잘 보관해 주었을 테다.
마지막으로 남은 음악들을 내뱉듯 다시 한번 숨을 몰아쉬고 부스 밖으로 나오자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키보드도 마우스도 만지지 않고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
웃음을 흘리던 그는 손을 들어 박수를 두어 번 치고는 날 불렀다.
“타티아나.”
“예.”
“이대로 갈까요?”
“……예?”
“그냥 방금 녹화한 것 그대로 보내도 예선 통과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반쯤 농담이라는 건 알겠지만 난 요즘 다른 사람들이 칭찬을 너무 많이 해 줘서 조금 경계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 하진 말아달란 뜻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치켜세워 주지 마세요. 자만하면 저만 손해잖아요.”
“하하하하, 객관적으로 보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전 많은 콩쿠르 진출자들을 봐 왔죠. 기악 전문가는 아니지만 오랜 기간 보다 보면 어떤 사람이 예선에 통과하는지 정도는 보이더군요.”
이미 수십 년 동안 이곳에서 녹음을 해 온 그가 콩쿠르 심사위원에 버금가는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난 그를 깊게 신뢰하고 있기도 했고.
때문에 이대로 마무리해도 정말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교복을 입고 있긴 하지만 그건 딱히 규정 같은 것이 없으니까.
그래도 아직 난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이대로 끝낼 순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 생각을 이해했음이 분명한데도 킬킬 웃으며 농담을 이어 나갔다.
“편집할 것도 없겠습니다. 연주 사이사이 간결하고도 명료하게 여운들을 떨쳐 내고 바로 다음 곡을 시작하는 이 노련함이야말로 심사위원들이 봐 줬으면 좋겠군요. 역시 그냥 해도 상관 없…….”
“마카로프 프로듀서.”
“알겠습니다. 알았어요.”
내가 다시 한번 강하게 이야기하자 그제야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여튼…… 요즘 여기저기 내 이름이 많이 오르내리다 보니 마카로프 프로듀서까지 덩달아 약간 들떠 있는 것 같다.
이해는 가지만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게 함께 다음 일을 같이 했으면 좋겠다.
딱히 힐난하는 건 아니지만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자 프로듀서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곡에 대해선…… 당연히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타티아나는 이미 제가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가버린 지 오래니까.”
“…….”
“제가 알 수 있는 건 단지 피아노를 칠 때마다 점점 더 멀리 가고 있다는 것만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죠.”
아까 띄워 주던 것과 비슷하게 들리지만, 그 내용은 본격적인 내용이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굉장히 현실적이고 치밀한 사람이었다. 내 음악이 얼마나 통용될지 따질 줄 안다.
그런 그가 다시 반복해서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DVD 심사 통과라는 목표 자체는 거의 근접해 있는 것 같다. 다만 내 기준이 따로 있을 뿐.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그런 문제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느긋한 태도로 이어 말했다.
“그러니 선택은 타티아나가 하셔야 합니다. 몇 번이고 반복하셔도 좋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바로 지금이 최고라 생각될 때, 제게 말씀해 주시면 그 순간을 기록해 드리죠.”
“감사합니다. 프로듀서. 믿고 맡길게요.”
“저야말로 기대하겠습니다.”
그는 피식 웃더니 소파 쪽으로 손짓했다.
“그럼…… 잠깐 휴식할까요?”
“예. 저도 악보를 다시 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요.”
나 역시 조금은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바로 피아노에 가서 다음 연주를 시작해도 되겠지만, 보다 진보시킬 부분들을 조금 더 명료하게 잡고 시작하면 조금 더 좋을 것 같았다.
소파에 앉아 태블릿 컴퓨터로 악보를 잠시 보면서 머릿속 선율들을 수정하고 있는데, 내 앞에 따뜻한 차 한 잔이 놓였다.
“감사합니다.”
가볍게 감사를 전하며 찻잔을 들었다.
4곡을 연달아 연주한 것이 내 정신과 신경에 문제를 가져오진 않았지만 몸 자체에 살짝 피로가 쌓이긴 했다.
따뜻한 차는 그러한 피로를 조금 풀어주었다. 난 가볍게 스트레칭도 병행했다.
잠깐 그렇게 악보에서 눈을 떼고 스트레칭에 집중하는 사이, 말을 걸기엔 적기라 생각했는지 맞은편에서 말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로듀서가 날 불렀다.
“아, 그렇지. 타티아나. 전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
마침 생각났다는 투여서 무엇인가 싶어 바라보니 그가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문화부 음악예술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었습니다. 저번 주에.”
“……아.”
“보아하니 이미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그 말을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음악예술국에서 이곳 에우테르페 레코즈와 내 연결고리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없었다.
내 뒤를 밟든가, 아니면 나와 프로듀서가 만든 결과물을 세상에서 발견해 분석하여 그 뒤를 캐내든가.
그중 음악에술국이 해낸 건 후자의 일이었다. 난 이전에 블라디미르 부국장에게 그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프로듀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나도 모르게 변명조로 말이 나왔다.
“예…… 아, 제가 그 사람들에게 말한 건 아니에요. 제가 말하기도 전에…….”
“하하, 저도 이미 설명은 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가요.”
“예. 언젠가는 분명 드러날 일이었으니까요.”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일인 것처럼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재미있다는 듯 웃기만 했다.
그리고 저 멀리 벽에 걸린 달력을 보며 가만히 시간을 세어 보며 말했다.
“1년 만이라…… 예상보단 빨랐군요.”
“빠른 건가요?”
“푸하하, 타티아나. 1년이 아니라 평생을 가더라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음악가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르십니까?”
“…….”
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무명으로 음반을 내더라도 그냥 잊히면 그만이고, 만약 조금 관심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알아봐준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연주자란 어떤 의미에선 기악 기술자와도 같지만 단지 악기를 연주하는 실력이 좋다 하여 명성을 얻을 수 있단 보장은 없었다.
음악성이란 단지 손가락을 잘 움직이는 것에만 달려 있지 않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경쾌하게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타티아나의 음악성이 1년 만에 뭇 전문가들 사이에서 특정될 정도로 인상 깊게 음악계에 새겨졌다는 건 정말 괄목할 만한 성과입니다.”
“그렇……네요.”
“왜 그러십니까?”
분명 기쁜 일인데 난 갑자기 머릿속에 든 생각에 잠시 말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의아해하는 눈빛을 받으며 난 조심스레 그 생각을 이야기했다.
“문득 궁금해져서요. 제 음악성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갑자기요?”
“갑자기는 아니에요. 전 피아노를 다시 잡으면서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다시 쌓아 올린 음악은 너무 많은 것들이 얽혀 있어서 무어라 이야기하기 어려웠다.
현대 음악가들이라면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다양한 곳에서 영향을 받아 섞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난 조금 더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섞여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것이 세상에 좋게 보이고 있다는 건 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날 특정할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한 감각을 지닌 타인이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조금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가 스스로 느끼고 정의하기엔 어려운 것 같아요.”
“그건 그렇죠. 다른 사람의 음악을 섬세하다, 단단하다, 파워풀하다 등등으로 이야기하는 건 쉽지만 자기 자신의 것을 그렇게 말하는 건 비단 음악이 아니라 다른 어떤 분야라도 다 그러니.”
“…….”
“그래도 말씀해 보시죠. 타티아나가 느끼기엔 어떻습니까?”
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떠오르는 건 또다시 다른 사람들의 평이었다. 선생님들이나 언론 등에서 몇 번 보였던 평가들.
내 음악이론은 독일식에 러시아의 것을 혼합시켰고 음색은 프랑스의 인상주의적인 색채감에 러시아적 질감이 많이 섞여 있단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리고 리듬감은 아마 폴란드와 한국의 것이 융합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의미가 있는 정의인 건가?
가만히 생각 중인 내게 프로듀서가 다시 물었다.
“혹은 어떻게 보였으면 합니까?”
“글쎄요. 전…….”
여러 가지 대답들을 짜맞추어 보던 내 입에서 결국 나온 건 흔하디흔한 말이었다.
“그저 제 음악이었으면 좋겠어요. 어떠한 형용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해놓고도 클래식 연주자가 아니라 락스타가 할 만한 말이란 생각이 들어서 어처구니없어하고 있는데,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나지막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까탈스럽군요.”
“……제가 조금 그렇나요?”
“하하하, 그래도 그 바람대로 보이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는 기분 좋게 웃더니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타티아나는 사사하는 분의 특징이나 국가, 문화적 틀을 깨고 고유한 음악성을 그려놓았다고. 그 덕분에 타티아나의 활동을 조금 본 것만으로도 찾아낼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
그 말을 듣자마자 난 큰 안도감을 느꼈다.
나도 스스로 잘 몰랐던, 내가 원했던 말은 바로 저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잘못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난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그런 내게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이 이야기를 지금 꺼낸 이유를 설명했다.
“그래서 말인데, 두 번째 음반을 만들지 않겠습니까? 올해가 가기 전에.”
“지금요?”
“콩쿠르 준비를 마치고 나서 말이죠. 아직 시간이 있으니.”
바로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난 올해 해놓은 것들이 많아서 연말에 있을 많은 연주회 등엔 응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갈 생각이었다.
내년부터 콩쿠르를 위시하여 집중적으로 활동하는 편이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그런 내 계획을 모두 꿰뚫어보고도 이런 제안을 하고 있었다.
난 조금 더 신중하게 그의 제안을 검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