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78화 (878/1,277)

##  878화

타티아나는 한창 콩쿠르 관련하여 집중해야 할 때에 무슨 소리냐는 듯한 눈빛으로 마카로프를 바라보았지만, 의문은 단지 눈빛에서 그쳤을 뿐이었다.

입으로 말하지 않고 타티아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 머릿속으론 지금 마카로프가 자신에 대해,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해 어디까지 파악하고 말을 꺼냈을지에 대해 가늠하고 있으리라.

타티아나는 결코 어리숙하지 않다.

잠시 그녀 스스로 생각하여 결론을 내리도록 시간을 준 다음, 마카로프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의 결론과 아마 비슷한 설명이 되리라 생각하며.

“제가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지금 열여섯 살의 타티아나를 기록해도 될 것 같단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 연주가 그것을 증명했죠.”

아무리 겸손한 성격이라 하더라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잇달아 연주했던 4곡을 녹음하면서 마카로프의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음악을 단지 콩쿠르 심사용으로 제출하고 말 것이 아니라 음반으로 기록하여 남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피아노의 음색과 음량을 거의 자유자재로 다루는 듯하던 실력은 보다 원숙하고 깊어졌다.

심지어 그것은 마이크를 통해 디지털화된 파일에서도 분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음향 전문가의 입장에서 건조하게 보자면 그것은 피아노 테크닉의 향상이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카로프가 음악가로서 보는 이 음악은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무언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끄러미 마카로프를 바라보던 타티아나는 이윽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작년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는 자각은 있어요.”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손을 내려다보면서 살짝 들어 움직여본다.

마치 무언가 확인하듯 손을 까딱여보고 찻잔 끄트머리에 대 보던 타티아나는 다시 마카로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적응기였으니 자신 있게 이곳에 오기엔 부적절했고…… 지금은…….”

“어떻죠?”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기량은 최고조라고 해도 무방해요.”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상태는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안다. 타티아나는 늘어뜨린 손목을 들어 올렸다.

“제 몸은 여전히 약하지만, 날마다 감각이 예민해진다는 걸 느껴요. 갈수록 좋아지고, 더 좋아질 방법이 보이죠. 적어도 피아노에 있어선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예요.”

타티아나는 연주를 마치고 기절을 하더라도 곡을 마무리할 정도로 치열하고 집착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1년간 자신의 에너지를 꾸준히 집중하여 이루어낸 일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했다.

특히 요 근래 있었던 몇몇 일들을 생각한다면, 그녀는 해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해내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피아니스트로서의 기량을 보다 더 극한으로 끌어내는 일뿐이었을 터.

그렇게 극한으로 갈고 닦은 결과물이 눈앞에 있었다. 마카로프는 소름 끼치는 기분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피아노에 있어 최고조라 말하며 적어도, 라는 말을 덧붙였다.

달리 해석하면 피아노가 아닌 무언가는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카로프는 그것을 어렴풋이 느끼고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말로 한다면 지금 타티아나가 인간적인 감정을 내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마카로프가 고맙다는 듯 타티아나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이어 말했다. 협조적인 어투였다.

“그러니 지금의 절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은 저 또한 있어요. 하지만 올해가 가기 전엔 시간이 촉박할 것 같네요.”

“그렇습니까?”

“적어도 다음 달 신청서 접수일 전까진 콩쿠르에 보낼 곡들에 집중해야 할 테고…… 이후에 음반 준비를 한다고 해도 올해 안엔 어렵지 않을까요.”

가급적 협조해주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타티아나는 이타적이지만 그런 부분에 있어선 타협의 여지가 없는 사람이었다.

“할 것이라면 심혈을 기울여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작년에 했던 준비보다 못한다면 후회할 거예요.”

합리적인 거절이었지만 마카로프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이 말을 꺼냈을 때 당연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타티아나는 더 할 말이 있다면 들어주겠다는 듯 대화의 바턴을 마카로프에게 넘겼다.

그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물론 DVD 녹화를 마친 다음부터 새롭게 바닥부터 준비해서 음반 한 장을 채우려고 든다면 시간이 없겠죠. 타티아나는 정말 레퍼토리가 차고 넘치지만, 그중에서 열여섯 살을 대표할 만한 곡들을 고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일 테니까.”

“……저번에도 그랬었죠. 지금은 더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하하하, 생각나는 것이 많나 보군요.”

“조금요.”

작년만 해도 정말 괴물같이 방대한 레퍼토리 안을 파악하고 곡들을 추려내는 데에 몇 달이나 걸렸다.

1년도 더 지난 지금 그녀는 한층 더 넓은 음악들을 섭렵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것들을 들어보고 싶은 생각 또한 간절했으나, 마카로프는 현실적인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선 그 역시 현실성을 갖춰야 함을 안다.

“하지만 타티아나, 그건 너무 재미없는 방식이죠. 우리 조금만 더 아이디어를 내 볼까요?”

“아이디어요?”

“우리가 함께 작업했던 음반이 과연 평범한 음반이었습니까?”

안 그래도 시간이 없는데 무슨 아이디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타티아나는 이어진 말을 듣고서야 지금 마카로프가 또다시 묘한 것을 기획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듯 보였다.

어쩔 수 없는 흥미가 그녀의 눈에 깃든다. 마카로프는 그 흥미의 빛을 낚아채며 절묘하게 이야기했다.

“정말로 타티아나가 지금 작년보다 발전했음을 스스로, 그리고 제가 확신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건 어찌 보면 간단합니다.”

그리고 마카로프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타티아나가 깜짝 놀랐다.

괜히 놀라게 했나 싶었지만 이왕 잘 되었다 생각하며 그가 말했다.

“작년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반복합시다.”

“……예?”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4번,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1번. 곡도 순서도 그대로 똑같이 하는 겁니다.”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타티아나에게 마카로프는 마지막으로 제안했다.

“대신 이번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의 첫 음반이 되는 거죠.”

“……!”

테이블 위에 마카로프가 얼기설기 늘어놓았던 퍼즐들이 이윽고 그 모양을 갖춘다.

머리회전이 빠른 타티아나는 순식간에 그 그림을 읽어내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파악하고 있었다.

마치 카드패를 만지작거리듯 손끝을 문지르던 타티아나가 중얼거렸다.

“잠시만요……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알게 되겠죠. 작년에 세간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무명의 음반이 누구의 것인지.”

아마 다른 곡을 내더라도 알아볼 사람은 알아볼 터였다.

하지만 아예 같은 프로그램을 내버린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알아보게 될 것이다.

이만큼 완벽한 힌트를 더 없을 테니까.

물론 처음엔 혼란이 있겠지. 타티아나가 1년 전 무명 음반을 낸 연주자에게 도전장을 낸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하지만 그 근간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그녀의 음악성이 다만 발전을 이루어 보다 완벽해졌을 뿐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세상은 다시 한번 발칵 뒤집힐 것이다.

“…….”

타티아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미 문화부의 몇몇 전문가들은 그녀의 음악을 상당히 깊게 알아보고는 음반의 여부까지 밝혀냈다.

그들이 계속 침묵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젠 슬슬 다른 사람들도 타티아나의 음악을 특정할 수 있을 시기였다. 그만큼 그녀의 음악은 특출났다.

때문에 먼저 이렇게 나서는 편이 낫다. 이만큼 기량이 올라왔으니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어차피 끌어모을 주목이라면 작년에 받았어야 할 것까지 모두 합쳐서 한 번에 받고, 깔끔하게 음반시장에 데뷔하는 편이 어떤 면으로 보더라도 유리했다.

때문에 음반 제작가로서 마카로프는 바로 지금 타티아나에게 첫 정식 음반을 제안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생각하던 타티아나는 앞머리를 쓸어내렸다.

비즈니스적으로는 지금이 적기라는 것을 그녀도 이해하고 있다. 마카로프가 낸 아이디어가 괜찮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타티아나는 고지식한 음악가였다.

단지 타이밍이 좋아 보인다는 이유만으론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얻게 될 실리가 무엇이죠? 그저 이목만 끄는 것은 바라지 않아요.”

타티아나는 음악가인 자신의 기준에 맞는 실속을 챙기길 바란다.

이슈가 되어 음반을 많이 팔고 유명세를 얻는 건 그녀에게 있어선 부수적인 이득일 뿐이었다.

그리고 마카로프는 그녀가 제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과거의 자신과 경쟁해서 이기는 겁니다.”

그 한마디에 타티아나의 눈빛이 바뀌었다.

타티아나가 언제나 원하던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과거와 끊임없이 싸워 이길 수 있는 강함.

그렇다고 무조건 과거를 깡그리 파괴하고 쇄신하는 건 옳지 않다.

클래식 음악가의 경쟁은 그 방향성을 딛고 초월하여 더 발전된 곳에 다다르는 데에 있었다.

그 부분에 있어서 타티아나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마카로프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영생한다면 바닷가재이고 싶다고 했었죠. 타티아나.”

“예, 그랬었죠.”

“전 사실 타티아나가 왜 인어 같은 환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바닷가재를 바랐는지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이해합니다.”

작년 음반을 만들기도 전에, 영생을 논하는 마카로프에게 타티아나는 그렇다면 해파리가 아닌 바닷가재가 되고 싶다고 답했었다.

처음엔 그것이 그저 물렁함과 단단함의 차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타티아나의 바람엔 훨씬 더 깊이 있는 이유가 존재했다.

스스로 탈피했다고 생각한다면 타티아나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마카로프가 물었다.

“그리고 바닷가재라면 이렇게 해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타티아나는 이런 말로 설득해 올 줄은 미처 몰랐는지 가만히 있었다.

마카로프는 그녀에게 해야 할 이유와 근거 그리고 방법까지 모두 제시했다.

올해 안에 해낼 수 있고, 가능성이 정말 높은 방법으로.

이걸 듣고도 거부하려면 그녀만의 명확한 이유가 있거나 아니면 생떼를 써야 했다.

그러나 이미 타티아나에겐 반박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혹시나 싶어 마카로프는 덧붙였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열다섯 살의 타티아나가 부정되거나 비난받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나이의 기록은 그대로 영원히 남겠죠. 지금의, 그리고 미래의 타티아나가 그릴 선형적 흐름의 맨 처음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마카로프가 말했던 영생 계획은 단발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또한 타티아나를 음악계에 영생케 만들 계획의 일환이다. 마카로프는 책임감 있게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생각이 많은 듯 보였다.

무대에 서는 피아니스트란 업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녀는 불필요한 주목을 받는 것을 정말로 싫어했다.

아마 원래 성격이 그렇기도 할 테고, 베르체노프라는 가문의 무게가 그녀를 그리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 상황이 타티아나를 세상으로 밀어내고 있음을 영원히 외면할 순 없었다.

만약 필요하다면 피해서 능사가 아니라 마주하고 적절히 타개해 나가야 한다는 걸 그녀도 잘 안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고지식한 면이 있긴 하지만 내성적인 건 아니니 공포증을 느끼거나 하진 않겠지.

마카로프는 그녀가 어떤 일이든 현명하게 자신의 힘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평소 영특한 모습과 다르게 묘하게 엉뚱한 면이 있기도 했다.

“전 평생 그 세 곡만 연주해야 하는 건가요?”

“푸하하, 물론 아니죠. 이번엔 이름을 밝힐 테니 다음부턴 원하시는 걸 해도 괜찮을 겁니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피아니스트 타티아나의 음악을 아니까.”

크게 웃자 타티아나는 괜한 소리를 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고민이 있는 것 같지만 이미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진 알 수 있었다.

마카로프는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어떻게 할진 타티아나의 자유입니다.”

“그럼 시기는 다음 달…… 조금 이따가 해도 되겠죠?”

“그리하시죠.”

정식 음반에 대한 이야기를 일단 마무리 짓고 나자 타티아나는 약간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천천히 여유있게 생각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마카로프는 웃으며 그녀를 위한 차를 한 잔 더 끓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조용히 닫혀 있던 문에 노크소리가 들린 것은.

“혹시 계세요? 아, 마카로프. 전화도 안 하고 찾아와서 죄송하…….”

막 문을 열고 들어오던 아나스타샤는 마카로프와 눈을 마주치고는 사과를 하다가, 소파에 앉아 있는 타티아나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 섰다.

타티아나는 반갑다는 듯 미소를 지었지만 아나스타샤의 표정은 그렇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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