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9화
뭔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마카로프는 빠르게 끼어들었다.
“아, 아나스타샤.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밖에 베로니카 없었습니까?”
“안 보이시던데요.”
“어디 갔나 보군요.”
살짝 어색한 분위기를 가볍게 풀어주자 아나스타샤는 금방 그 분위기를 이해하고는 언제 놀랐냐는 듯 태연하게 대응했다.
그녀는 타티아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또 볼 줄은 몰랐네. 타티아나. 안녕.”
“후후, 그러게요.”
타티아나는 학교에서 한 번 헤어졌던 친구를 다시 만난 게 꽤나 기쁜 모습이었다.
나지막이 웃으며 타티아나는 슬쩍 옆으로 움직이기까지 했다. 자연스레 아나스타샤를 옆자리에 앉히려는 모습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움직이지 않고 문 앞에 선 채로 물었다.
“학교에선 아무 말도 없었잖아?”
“어쩌다 보니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그래서 오늘은 아닌가 보다 했는데…….”
아나스타샤의 말은 이 스튜디오를 겹치지 않게 이용하고 싶다는 뜻이었지만 언뜻 다르게 들리기도 했다.
묘한 기색을 눈치챈 건 타티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미소를 거두고 고개를 기울였다.
아나스타샤는 그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반걸음 정도 물러섰다. 다시 문손잡이를 잡으며 그녀가 말했다.
“일단은 연락도 없이 온 건 내 쪽이니까, 다음에 올게.”
“잠시, 잠시만요. 그냥 가시려고요?”
“……응. 그런데?”
이 작은 스튜디오엔 프로듀서도 한 명뿐이고 피아니스트를 위한 부스도 하나뿐이었으니 보통 한 명이 녹음을 위해 스튜디오를 빌리면 동시에 누군가 작업을 진행할 순 없었다.
오늘 저녁 시간대 방문자는 타티아나뿐이었으니 그녀에게 온전히 시간을 쏟게 하는 건 배려있는 행동이다.
당연히 그렇긴 한데…… 타티아나의 표정이 굳어 있는 만큼 마카로프조차 묘한 이상함을 느꼈다.
작년 여름, 타티아나가 녹음할 때가 떠올랐다.
한밤중에도 아나스타샤는 전화 한 통화에 이곳으로 달려왔었다. 그리곤 그냥 가만히 있더라도 곁에 있어 주었다.
그 자체에 분명 의미와 도움이 있음을 알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지극히 친구를 챙기던 아나스타샤가 오늘은 필요 이상으로 쿨한 태도였다.
어차피 이 먼 곳까지 온 김에 잠깐 앉아 있다가 가는 것 정도는 별일도 아니란 건 모두가 안다.
타티아나는 살짝 토라지기까지 한 것 같다.
그렇게 초인적인 면모를 보였던 그녀가 목을 늘어뜨린 모습은 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런 타티아나와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대로 아나스타샤를 보내면 이후 이야기에 지장이 생길 것 같단 직감이 들었다.
일단 마카로프는 막 떠나려고 하는 아나스타샤를 붙잡았다. 이곳의 오너인 그가 해야 할 말이었다.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죠.”
“두 사람 중요한 이야기 하고 있었을 텐데 방해하는 건…….”
아나스타샤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때, 타티아나가 입을 열었다. 누가 듣더라도 기분이 별로인 목소리였다.
“중요한 이야기라면 같이 들어봐 줘도 되는 것 아닌가요?”
“응?”
“제가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속아서 불공정 계약서에 사인이라도 하면 어떡해요?”
“무슨 소리니? 대체.”
난데없이 마카로프가 모함을 당했지만 아나스타샤는 당연히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지금 타티아나가 억지를 쓰고 있다는 건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그런 억지를 들어줄 정도로 아나스타샤는 무르지 않았다. 되레 친한 친구이기에 더더욱 올바르게 반응했다.
아나스타샤는 마카로프를 돌아보며 대신 사과해주었다.
“미안해요. 실례되는 이야기였네요.”
“하하, 괜찮습니다.”
마카로프는 가볍게 웃으며 흘려넘겼다.
그리고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타티아나는 지금 아나스타샤를 일단 테이블 앞에 앉혀 놓고 싶어 했다.
그것이 아무 의미 없는 고집같이 느껴지진 않았다. 마카로프 역시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으므로.
다시 한번 역할이 돌아왔음을 느끼며 마카로프는 일부러 도발적인 언행을 던졌다.
“그리고 조심해야 하는 건 맞죠. 전 정말로 타티아나를 또 다른 도전에 밀어 넣으려고만 하는 사람이니까”
“……그게 어떤 의미죠?”
“말 그대로입니다.”
“…….”
혹시나 흥미를 보일까 싶어 해 본 말인데, 아나스타샤는 생각보다 강하게 반응했다.
태도에서 드러나진 않지만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진 눈빛이 마카로프를 꿰뚫어볼 듯이 번뜩였다.
방금 전 타티아나가 했었던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그냥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착하게 다시 물었다.
“두 사람 지금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 신청에 쓸 심사용 DVD 만들고 있었던 것 아닌가요?”
“그건 아까 전에 이야기했었죠.”
“그럼 뭐 하려고요?”
하지만 그 침착함도 점점 흥분의 기색을 띠어간다.
아나스타샤는 이성적인 말과 행동을 견지하는 사람이었지만 때때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충동을 비추기도 했다.
이렇게 쉽게 넘어오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적어도 타티아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렇게 반응하는 건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하지만 마카로프는 그녀를 더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아나스타샤가 더 과격하게 나오지 않도록 적절하게 소파 쪽으로 손짓하며 제안했다.
“앉죠.”
일단 들어 주겠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타티아나와 마주 보는 자리였다.
이래서야 마카로프가 앉을 곳이 없었다. 일단 차를 끓이고 의자라도 가져와야 하나 생각할 때였다.
앉아 있던 타티아나가 어느새 일어나선 소리 없이 옆에 다가와 있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
“?”
기껏 아나스타샤를 앉혀 놓곤 왜 일어났나 싶어 내려다보자 타티아나는 손을 모아 입에 가까이하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까 했던 말은…… 억지로 한 농담 같은 것이었어요. 마음에 담지 않으셨으면 해요. 죄송해요.”
마카로프는 하마터면 크게 웃어버릴 뻔했다. 아무래도 지금 마음이 안 좋은 건 마카로프가 아니라 타티아나 쪽인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한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마카로프가 말했다.
“알고 있었습니다. 타티아나.”
“기분 나쁘지 않으셨나요?”
“전혀요. 괜찮습니다.”
“……죄송해요.”
말 한마디 가지고도 이렇게까지 미안해하니 마카로프가 되레 더 미안할 정도였다.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하며 다시 그녀를 소파로 돌려보내고, 마카로프는 마저 세 명분의 차를 끓여선 테이블로 가지고 갔다.
찻잔을 놓고 나도 분위기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으나, 그녀의 태도에선 빨리 무슨 일인지 설명해보란 강한 압력이 느껴졌다.
마카로프는 천천히 풀어가 보기로 했다.
“아나스타샤는…… 작년에 이곳에 처음 왔었죠? 그땐 음반 작업을 하는 타티아나를 따라서.”
벌써 1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죠.”
“제가 오랫동안 이곳에서 일하면서도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었습니다. 친구를 위해 밤을 새워 함께 있어 주고, 마지막엔 우리가 놓친 퍼즐조각이었던 드레스를 준비해서 타티아나가 최선을 다 할 수 있게 돕기도 했고요.”
시간이 지났어도 그때 마카로프가 느꼈던 고양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물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을 마무리 짓고 쓰러지는 바람에 그 뒤로는 정말 난리였지만, 그날은 마카로프의 인생 전체를 두고 보더라도 손꼽을 정도로 인상적인 날이었다.
아나스타샤도 그때를 떠올리면 이것저것 생각나는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옛날이야기는 왜 꺼내냐는 눈빛을 했다.
혹시라도 이야기의 흐름을 선수 쳐서 멋대로 흔들려는 속셈이라면 속아주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마카로프는 낮게 웃으며 본론을 말했다.
“올해도 음반 작업을 해볼까 합니다. 아직 정해진 건 아니지만.”
“……올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아나스타샤는 의문을 표했다.
보통 학생 연주자들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듣자마자 일단 기뻐하거나 긴장해야 마땅한 일인데, 바로 의아해하는 모습이 정말 영민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마카로프가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아나스타샤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요?”
“바로 현실적인 의문부터 던지는 건 타티아나와 똑같군요. 하하하. 그 부분에 대해서 지금까지 이야기했었죠.”
타티아나와 이야기한 것이라면 상당히 가능성이 높고, 특히 음악에 대해선 정말 어떻게든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아나스타샤 역시 알고 있었다.
정말 어렵게만 생각되는 일들을 타티아나는 기어이 해내고 만다. 그것도 완벽에 가까운 형태로.
단지 그 기어이 해낸다는 표현만으론 타티아나의 노력과 집념을 다 드러내지 못할 정도로, 그녀가 쏟아붓는 정신력은 대단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반드시 나타난다. 심하면 혼절까지 할 정도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아나스타샤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올해는 적당히 한다고 하지 않았니? 타티아나.”
이제야 제대로 표정을 가지고 자신을 봐 주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타티아나는 옅은 미소를 보였다.
살짝 생각이 복잡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많이 괜찮아진 모습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네요.”
“나한테 설명해 줄 수 있어?”
“그럴까요.”
그러면서 타티아나의 손은 찻잔으로 향했고, 약속이라도 한 듯 세 사람은 찻잔을 들었다.
***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나누었던 이야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작년에 만들었던 무명의 음반.
그것이 무명으로 있을 수 있었던 건 내가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하지 않아 내 음악을 들은 전문가들의 숫자가 적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젠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연주회에도 몇 번이나 나갔고, 여러 무대에서 모습을 보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내 소리를 기억하게 되었다.
“작년에 처음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음반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을 때, 그 마무리에 대해선 합의했던 것이 없었죠.”
그런데 이제 그 마무리를 하기에 알맞은 시기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화려한 아이디어를 내 주었다.
그 음반의 연주자가 누군지 밝혀지기 전에, 내가 스스로 그것을 딛고 일어난다면 비로소 작년부터 지속된 긴 프로젝트의 완전한 엔딩이 될 것 같았다.
물론 이후로도 마카로프 프로듀서와 할 일은 많을 것이다. 내 이름으로 음반을 낸다 하더라도 디스코그래피의 첫 단추를 채우게 되는 것일 뿐이니까.
그러나 첫 단추를 그렇게 잘 채운다면 앞으로도 프로듀서와 많은 일을 하면서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난 프로듀서와 이야기를 하면서 이해한 일이나, 예상되는 일 등을 가급적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서 아나스타샤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가만히 듣던 아나스타샤는 내 말이 끝나고 나니 찻잔을 한 번에 들이켜고는 다시 날 바라보았다.
“그게 불공정 계약이니?”
“아뇨, 그건 그냥…….”
“마카로프 프로듀서도요. 그게 조심해야 할…… 또 다른 도전에 밀어 넣……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어떡해요? 오해하잖아요?”
“푸하하, 미안합니다.”
마카로프는 껄껄 웃으며 사과했지만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완전히 당했다는 듯한 표정이다.
난 그녀를 속여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 애초에 그냥 날 보자마자 가버리려고 했던 그녀 탓이다.
같이 앉아서 잠깐 이야기 하고 가려고 했다면 자연스레 했을 이야기였는데.
아무튼 아나스타샤는 비로소 다 이해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 또 뭔가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일 하나 했어…….”
“이상한 일이 뭔데요……? 전 이상한 일을 하는 사람인 건가요?”
“나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거겠지 뭐.”
지금까지 그녀가 보기에 이상한 일들을 여럿 하긴 했었다.
편입을 오자마자 우리 학교 최고 유망주인 에르네스트를 대결로 눌러놓기도 했고, 밤새워 음반을 녹음하다가 혼절하는가 하면 파리에선 피아노 현을 끊기도 했었지.
내가 그녀 입장이었다 하더라도 날 못 믿겠구나 싶어서 배시시 웃자 아나스타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따라 웃었다.
이때다 싶어 난 그녀에게 살짝 제안했다.
“이왕 이렇게 오신 김에 그러면 제 다음 음반 이야기에 의견도 내 주시고…… 방금 한 녹음도 들어봐 주세요. 저도 아나스타샤의 것을 들어 드릴게요.”
“녹음도 했어?”
“예. 아까.”
“벌써!?”
아나스타샤는 벌써 이상한 걸 봤다는 듯한 표정으로 깜짝 놀랐다. 난 일어나 그녀를 컨트롤룸 쪽으로 이끌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도 조용히 우리 뒤를 따라와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