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0화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중앙에 있는 컴퓨터 앞으로 향했고 나와 아나스타샤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이 없어서 태블릿 컴퓨터는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프로듀서가 물었다.
“모니터링하는 의미로 들으시려고 합니까?”
“예. 생각나는 포인트들이 몇 가지 있는데, 다시 들으면서 확인하고 가면 될 것 같아요.”
“그렇게 하시죠. 그럼 처음부터 순서대로 틀까요?”
“부탁드려요.”
내 말에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이곤 파일을 재생시켰다.
거대한 스피커에서 웅웅거리는 진동이 흘러나온다. 그 약간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찰나, 높고 냉정한 피아노 소리가 공기를 뚫고 터져나왔다.
“…….”
아나스타샤는 움찔하며 놀랐지만 난 가만히 눈으로 악보를 따라 읽으며 음악에 집중했다.
역시 피아노 자체가 내는 소리의 질감과는 살짝 다르다.
복합소재와 자석이 만들어내는 진동은 쇠와 나무가 만드는 진동과 같을 수가 없다.
이 약간의 변질을 생각하며 난 태블릿 컴퓨터용 펜으로 화면 위에 기호를 그렸다. 음색을 밝은 톤으로 끌어 올리라는 의미의 기호였다.
전체적으로 채도를 끌어 올리려고 했다간 괜히 소리가 틀어질지도 모르니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만 체크한다.
보통 이런 건 문자로 된 악장지시로 하는 편이지만 난 디테일한 부분에서의 음색은 이렇게 기호로 표기하는 편을 선호했다. 에르네스트도 종종 쓰는 기호였다.
‘요즘도 쓰는 것 같던데.’
얼마 전 받았던 곡에는 심지어 더 발전한 형태의 기호들도 몇 가지 있었다.
처음 보는 것인데도 난 곡을 자연스럽게 연주하면서 그가 써 놓은 것들이 어떤 뜻인지 바로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었다.
이번엔 내가 그의 것들을 조금 빌려서 써 볼까 생각하다가, 일단은 첫 모니터링이니 그냥 평범하게 하기로 했다.
괜히 이것저것 신경 쓰다간 제대로 집중하지도 못하고 시간낭비만 하게 될지도 모른다.
“…….”
아나스타샤는 무언가 들고 메모하거나 하진 않지만 꼼짝도 하지 않고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피아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엔 지금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나스타샤의 눈엔 무언가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지금 음악에 엄청나게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 떨어져 있는 내게 느껴질 정도였다.
우린 그간 여러 음악들을 함께해 왔지만 그래도 이렇게 잘 들어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난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여기에 보답하는 건 나중에 그녀의 연주에 제대로 된 리뷰를 해주는 것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첫 번째 곡이 끝나자,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잠깐 재생을 멈추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반복할지 아니면 다음으로 넘어갈지 지시를 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당연히 난 다음으로 넘어가달란 뜻으로 손을 옆으로 살짝 펼쳤다. 프로듀서는 내 제스처를 알아듣고 바로 이어 재생했다.
‘생각대로였어.’
그렇게 4곡의 재생이 모두 끝났다.
난 펜을 내려놓고 태블릿 컴퓨터를 껐다. 더 자세히 볼 필요도 없었다.
정리를 위한 목적으로 화면 위에 계속해서 체크를 해나갔지만, 결국 모두 해놓고 보니 이미 내가 연주를 하면서 실시간으로 깨닫고 내놓은 개선점들과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어떻게 녹음되었는지에 대한 모니터링과 디테일한 포인트 몇 가지를 얻어낸 건 좋은 결과였다. 난 나름대로 흡족해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약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가,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비로소 어깨를 떨며 이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가만 보니 나쁘게 듣진 않은 것 같았다. 난 옅게 웃으며 물었다.
“어땠나요?”
“어땠냐고……?”
아나스타샤는 멀거니 되묻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듯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손가락을 들고는 저 위쪽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결선은 그냥 가지 않겠니?”
“아하하, 본선이 아니라 결선요?”
“우승할 것 같다고 말하지 않은 건 내가 괜히 그런 말 했다가 부정 탈까 싶어서야.”
이미 말씀하신 거 아닌가요.
어쨌든 우승 후보로 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은 친구들끼리 할 수 있는 호들갑스러운 칭찬에 가깝게 이해해도 될 것 같았다.
난 분명하게 우승을 노리고 있고 그에 맞는 실력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세계를 우습게 보고 있진 않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난 천재들이 모두 최고를 노리고 덤벼들 것이다.
나이 제한에 턱걸이로 참가하는 내가 그 틈바구니에서 얼마나 할 수 있을진 해보지 않고선 알 수 없다.
아무튼 칭찬을 해 준 건 고맙다는 의미로 웃어보이자 아나스타샤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물었다.
“이거 언제부터 준비했던 거야?”
“후보로 두었던 곡들을 추려 결정짓고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한 건 얼마 안 되었어요.”
“……말도 안 돼.”
난 그녀가 왜 당혹스러워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콩쿠르 참가를 준비하는 연주자들로서 우린 몇 달 전부터 충분히 이 심사용 DVD 녹화를 염두에 두고 연습을 해 왔다.
하지만 그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여파로 꽤나 휘청거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러한 일들이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내가 준비를 할 시간도 역시 부족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말대로 시간이 부족하긴 했다.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몸도 바쁘고, 심적인 여유도 별로 없었다.
단지 난 피아노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으로서의 이유를 다시금 자각하곤 보다 빠르게 복귀하려고 애썼을 뿐이다.
지금도 복귀하기 위해 치료에 힘쓰고 있을 에르네스트를 생각한다면, 내 이런 집중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해내야 할 것들을 해냈을 뿐이다.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요. 그리고 겨우 예선 곡일 뿐인데.
물끄러미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자 그녀는 지금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중얼거리며 물었다.
“잠깐만…… 그리고 이건 예선 곡이잖아? 그럼 본선 곡은? 또 얼마나 준비한 건데?”
“크게 다르지 않아요. 비슷해요.”
“예선이 이 정도면…… 이걸 무대에서 피아노로 연주하면 심사위원들은 말 그대로 놀라서 기절할 걸?”
“아하하, 고마워요.”
칭찬은 듣기에 좋았다. 그것도 일반적으로 감상만을 목적으로 하는 청중들이 아니라, 뛰어난 연주자이기도 한 아나스타샤의 칭찬이라면 더더욱 의미가 깊다.
그리고 난 그런 그녀를 인정하기에 뒤이어 요청했다.
“그래도 듣기에 부족했던 점 말씀해 주세요.”
“이런 연주를 내가 어떻게 평가하니?”
“이제 와서 왜 그러시나요? 저흰 항상 그렇게 해 왔었잖아요.”
“그랬었지만…….”
그동안 아나스타샤와 서로의 음악을 평하거나 연구할 때 우린 그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씩 의견을 내곤 했다.
개인적이고 독단적인 의견이라도 상관없었다.
음악이 모두에게 똑같이 들리는 건 아니었으므로 그 어떤 것이라도 참고하고, 만약 보다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음악에 녹여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이건 아나스타샤뿐만이 아니라 에르네스트나 발렌티나, 다른 친구들과 관련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방식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아나스타샤를 놓아줄 생각 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킥킥 웃었다.
“그냥 잘했다는 평가로는 만족하지 못하시는군요. 타티아나.”
“보통은 만족해요. 그러한 평가는 제가 가능한 최선을 보여 주었단 증명이 될 테니까.”
멀리서 청중들이 보내오는 열렬한 환호와 박수는 내게 크나큰 에너지로 다가온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친구들은 칭찬만으론 부족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아니잖아요?”
내 음악가 친구들은 조금 특별하다.
우린 가까이에서 함께 공부하고 놀러다니며 맛있는 것도 먹는 등의 일반적인 어울림을 즐기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맞서고 경쟁하는 라이벌이기도 했다.
필사적으로 최선을 다하면서도 누군가 먼저 앞서나간다면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런 경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난 축복이라 생각한다.
음악가로서의 본질을 확고히 하며 경쟁을 곧 연료로 스스로를 발견시켜 나갈 수 있는 관계. 이런 관계는 다른 그 누구에게도 얻을 수 없는 자산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주고받으면서 음악가 동료로서 성장해나갈 수 있는지, 아나스타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럼 짧게 할게.”
그리고 첫 번째 곡부터 그녀의 리뷰가 시작되었다.
늘 우리가 하던 방식대로라서 그리 길진 않았다.
어떤 부분을 짚어내는지 난 바로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녀가 느끼고 이해한 것들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4곡 전부 리뷰하는 데엔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메모도 하나 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부분들을 확실하게 말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 착실하게 정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난 그녀가 말해 준 부분들을 내가 체크한 부분과 맞춰 보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내 음악에서 바라는 부분은 내가 생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비슷했다.
난 겹치는 부분이 있을 때마다 기분 좋은 확신을 얻을 수 있었고, 가끔 겹치지 않는 아나스타샤만의 평에서는 내가 놓친 부분들이 분명히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것까지 모두 생각하며 다시 한번 악보를 떠올리고, 난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제가 미처 짚어내지 못했던 맹점들이 있었네요.”
“얼마나 더 잘하려고 그러니?”
“후후, 제가 할 수 있는 곳까진 해 봐야죠.”
난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얼마나 더 할 수 있느냔 질문은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알 수 없었으니까.
황무지를 개척하는 사람처럼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중요한 건 빙글빙글 돌지 않는 것뿐. 곧게 앞으로 향하면 무언가 있으리란 믿음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가다가 어느 날 불현듯 뒤를 돌아보면 걸어온 발자국뿐만이 아니라 산과 숲이 마법처럼 펼쳐져 있는 풍경을 가끔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하여금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게 만들어 주었다.
그 기분은 아나스타샤 역시 알 터, 난 그녀에게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자, 다음은 아나스타샤 차례예요.”
“지금? 나 아직 준비가…….”
“이곳에 오신 시점에서 이미 녹음할 준비는 되어 있으신 것 아닌가요?”
“…….”
전화도 않고 스튜디오에 찾아온 아나스타샤가 녹음 생각을 안 했을 리가 없었다.
내 말에 그녀는 반박하지 못하고 한숨을 쉬더니 알았다며 피아노 부스로 향했다.
“…….”
난 준비하는 그녀를 유리벽 너머로 바라보며 기대했다.
저번 여름, 아나스타샤는 이곳에 와서 따로 자신의 음악을 음반에 기록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상캉과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연주했었다.
그 연주를 들으며 난 이미 그녀가 한계를 뛰어넘은 연주자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우린 친구이지만 동시에 라이벌로써 기능한다. 아나스타샤는 특히 그 라이벌이란 관계에 집중하면서 에르네스트에게 칼날을 세웠다.
그때의 날카로움은 아나스타샤의 기량을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로 끌어올려 놓았다.
난 아나스타샤가 그렇게 공격성을 극대화시켰던 이유를 당시에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보다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때 음반을 만들지 않았던 건 잘한 것이었을까.’
마지막까지 난 아나스타샤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한다고 말했지만, 결국 내가 옆에 있었던 탓인지 냉정해진 그녀는 음반은 나중에 하겠다며 포기했다.
그 후로도 아마 하지 않았을 테고, 따라서 녹음은 그때 이후로 지금이 처음이겠지.
어떤 연주를 할지 궁금하다.
아나스타샤의 연주를 듣고 나면 나 역시 해 주어야 할 말들이 많겠지만, 지금은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녀의 음악이 듣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쇼팽의 녹턴과 에튀드, 마주르카를 연주했다. 쇼팽 콩쿠르를 준비 중이니 당연한 선곡이었다.
“…….”
컨트롤룸에서 그녀의 연주를 듣던 나와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프로듀서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난 스스로 거울을 볼 순 없었지만 그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