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81화 (881/1,277)

##  881화

아나스타샤의 실력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난 그녀가 슬럼프를 막 이겨 내고 다시 연습을 시작한 무렵부터 쭉 옆에서 지켜보며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는지 직접 본 증인이었다.

벌써 2년이 흘렀다.

그녀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거의 완성되기 직전에 다다라 있었다.

테크닉적인 부분은 그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곡들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원숙해졌고, 음악성 역시 깊고 또렷해졌다.

한 시기를 고정시켜 그것을 언젠가 깨뜨려야 할 기준으로 삼더라도 괜찮을 정도로 그녀가 가진 음악에도 특징성과 개성이 확고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아나스타샤가 연주하는 쇼팽은 너무나 공허하게만 들렸다.

“…….”

양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로 난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주하는 테크닉 자체엔 전혀 문제가 없다.

여전히 빠르고 정교한 아나스타샤의 기술은 정말로 세계 무대에 올려놓더라도 그 상대가 몇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연주자의 기술은 음악을 보다 세상에 편하고 자유롭게 펼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일 뿐이다.

비로소 자유로워진 연주자는 기술 너머의 가치를 끌어내어야만 한다.

그걸 해내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유리벽 너머의 아나스타샤는 조금 인상을 쓰면서 어깨를 들어 올려 무게로 건반을 찍었다.

무시무시한 음량이 마이크를 강타했다. 모니터 화면의 그래프가 상단을 부숴 버릴 것처럼 치솟았다가 간신히 가라앉는다.

그러나 그 엄청난 소리에도 내 심장은 뛰지 않았다.

“…….”

완성되기 직전이었던 열여섯 살의 아나스타샤는 지금 가야 할 방향을 잃고 어둠 속에 던져져 있었다. 난 그녀가 길을 잃은 이유를 너무나 잘 안다.

선명한 공격성을 지니고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나가고 있던 한때, 아나스타샤에겐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같은 나이의 친구이지만 연주자로선 상대적 차이를 꽤 벌리고 있었던 에르네스트에 대한 의식.

굉장히 큰 장애물이었을 에르네스트에 대해 아나스타샤의 의지는 일관적이었다.

망치를 들고 닿는 곳까지 당당히 나아가 휘둘러보는 것. 그것이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는 당당하게 음악을 도구로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반드시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지 않고서야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전혀 겁먹거나 기죽지 않고 스스로의 음악을 쥐고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가 나아가던 길 앞에서 내려와 버렸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망치는 대상을 잃고 흩어졌다.

‘저도 꺾였었죠…….’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되어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있기도 했다.

그 늪에서 세연과 에르네스트의 말에 힘을 얻고 책임감을 느껴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아나스타샤도 그땐 무대에서 제대로 된 연주를 해냈다.

어째서 무대에 서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한 이유와 의미가 있었고 또 곁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쇼팽 콩쿠르라는 의미 있는 무대에서 에르네스트와 정당하게 맞붙어 승부를 낸다는 목적은 불가능해졌다.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길을 잃어버렸다.

그 목적은 그녀에게 그저 큰 동기 중 하나가 아니었다. 사실상 거의 모든 이유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결정적인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

그래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아나스타샤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또 그곳에 있을 다른 천재들과 음악을 견주어 보는 것이 앞으로 어떠한 큰 도움이 될지.

그리고 에르네스트도 분명히 그녀가 신경 쓰지 않고 콩쿠르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길 바란다는 것도.

지금 그녀를 당장 붙잡고 끌어내려선 얼굴을 마주하고 분명하게 말해 주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하지만 그러한 심정이 발칵 뛰쳐나가려고 해도 진득한 무언가가 엉겨 붙으면서 꼼짝하지 못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난 아나스타샤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음악도 콩쿠르도 모두 도구로 여긴다고 하여 비난하기엔 일단 나부터가 똑같은 이유로 구세프 선생님에게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선생님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잘난 척하며 이야기할 정도로 떳떳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연주자 동료로서 진지한 조언을 하려고 해도, 아나스타샤가 지금 슬럼프를 겪는 깊은 이유까지 파고들려면 나 역시 매듭지어야 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며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 우린 지금 여러 가지 거짓과 외면으로 간신히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진솔한 이야기를 한다 한들 설득력이 있을까.

“…….”

복잡한 기분으로 아나스타샤의 연주를 모두 지켜보았다.

음악이 끝날 때까지 내 감상은 바뀌지 않았다.

테크닉은 완벽하지만 쇼팽의 음악에서 이끌어내야 할 중요한 요소들은 너무나 부족했다.

어지간해선 단지 리듬에 맞추어 건반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심혈을 기울여야 하니 그 사람의 개성이 나오기 마련인데, 아나스타샤는 실력이 너무나 뛰어난 나머지 그리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더더욱 느껴지는 것들이 희미했다.

연주를 마친 아나스타샤가 다시 돌아왔다.

난 어떻게 그녀를 봐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다가,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박수를 치길래 일단 따라서 쳤다.

아나스타샤는 작게 묵례하더니 물었다.

“틀린 건 없는 것 같은데. 어땠어요?”

“잘했습니다.”

무언가 필요한 단어가 하나씩 빠져 있는 대화였다.

이어서 아나스타샤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한다. 난 준비된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할까? 만약 그녀도 스스로 문제를 자각하고 있다면 그렇게 짚어 주어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무표정으로 있는 아나스타샤의 얼굴에선 무언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정말 내게 솔직한 이야기를 바라는 건지 약간의 힌트라도 느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금 아나스타샤가 보이는 눈빛은 조금 무서웠다.

그렇다고 무작정 잘했다고 칭찬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정말로 화를 낼지도 모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난 너무 오래 말을 않고 있으면 결국 솔직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깨닫곤 급히 수습하듯 말을 꺼냈다.

“테크닉이 더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혹시 기억하시나요? 발라드를 연주했을 때, 약간 어려워하셨던 것.”

“그랬었나?”

“예, 하지만 지금은 발라드도 문제없을 것 같네요. 준비는 하셨죠?”

“응. 상위 라운드로 가면 연주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렇죠. 반드시 발라드는 한 곡 넣어야 해요.”

난 혼란스러운 머리로 그녀의 말을 파악하려고 애쓰며 간신히 말을 이어 나갔다.

음악만 보면 목적성을 잃고 의욕도 없는 것 같은데, 지금 말로는 상위 라운드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올라가고자 하는 생각은 있는 것 같다.

애초에 콩쿠르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곳에 올 이유조차 없었다.

그럼 이미 이 상황에서 그녀는 잘해 보고자 하는 건가? 음악을 공허하게 연주하는 것에 대해선 그녀 스스로 자각이 없는 건가?

내가 혼자 착각 중인가 생각하기엔, 마카로프 프로듀서 역시 나와 똑같이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역시 아나스타샤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중간에 잠깐 눈을 마주했을 때 그가 보인 난처함과 의심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친구로서, 그리고 동료로서 솔직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다. 무대에 같이 서자고 권했을 때처럼 다시 나서서 말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단지 연주자 입장뿐만이 아니라 에르네스트를 목적으로 하던 그녀가 지금 왜 슬럼프에 빠졌는지 알면서도 독하게 대해야 한다는 건 내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콱 졸리는 기분이 든다.

“일단 차 한 잔 더 하실까요.”

그때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컴퓨터 앞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전 같았으면 바로 화면을 보여주며 어떻게 녹음했는지 알려주었을 그는 지금 일단 음악에서 시선을 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도 딱히 거부하지 않고 그를 따라 테이블로 향했다.

“여기, 드시죠.”

“고마워요.”

프로듀서가 차를 내주었고 잠시 말없이 차로 목을 축이는 시간이 이어졌다.

난 찻잔을 입가에 대면서도 계속해서 그녀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 아나스타샤가 요구했다.

“그럼 이번엔…… 듣기에 불편했던 점 말해 줘.”

“……예?”

“아까 너도 그랬었잖니?”

멀거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녀가 모두 받아 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정당한 재판을 기다리듯 흔들림 없이 담담한 눈빛이 날 응시했다.

난 결코 다른 누군가를 재판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지금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면 신중하게 잘 해야 했다.

조용히 말을 고르고 있는데, 그때 먼저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끼어들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연주로는 결선에서 떨어집니다.”

“!”

나도 아나스타샤도 고개를 휙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프로듀서는 찻잔을 홀짝이더니 반쯤 남은 찻잔을 손가락에 걸고 비스듬하게 앞으로 향했다.

“피아니스트로서 흠결은 찾기 힘드니 스코어보드에 점수를 매기는 심사위원들은 당연히 당신을 계속 올려 보내겠죠.”

많은 연주자들이 실력을 겨루는 콩쿠르에서, 객관적인 지표라 할 수 있는 테크닉에 매겨지는 점수는 가히 절대적이다.

아나스타샤 정도의 실력이라면 쭉 만점을 받아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선까지입니다. 지금 아나스타샤에겐 제일 중요한 음악성이 부족합니다.”

”…….“

”그 위에 모인 연주자들을 상대하면서 테크닉으로 점수를 따긴 어렵습니다. 특히 쇼팽이라는 한 작곡가에 국한된 심도 깊은 연구를 표현하는 무대라면 더더욱.”

쇼팽이 요구하는 테크닉은 굉장히 높은 편이지만, 콩쿠르에 나오는 연주자들은 대부분 그 경지에 발을 딛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양손으로 자신의 음악들을 표출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무대에서 테크닉 점수는 비슷하게 주어진다.

나머진 심사위원의 주관이 들어가는 상대평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그 상대평가에서 과연 아나스타샤는 매력적인 연주자로 보일까?

지금은 잘 모르겠다는 생각만 든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들고 있던 찻잔을 움직였다. 고급스러운 찻잔의 형태가 우리 눈앞에서 흔들린다.

“콩쿠르가 매끄러운 만듦새만으로 겨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심사위원들도 사람입니다. 중요한 건 내용물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죠.”

그리고 그는 찻잔을 살짝 기울여 안에 든 찻물을 테이블 위로 흘렸다.

불규칙하게 떨어진 물방울은 테이블에 닿아 튀어올랐다가, 그림을 그린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나스타샤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선이면 그래도 많이 봐주셨네요.”

“완벽한 테크닉이니까요.”

“그나마 그 정도 했으니 결선이라는 건가요…….”

중얼거리던 아나스타샤는 이어 내게 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타티아나.”

“…….”

“말 안 해도 알겠어.”

가만히 회피해도 된다. 그녀가 지금 내 대답을 바라는 건 다분히 이중적인 마음에 기인해 있었다.

그냥 모른 채 넘어가는 편이 차라리 현명한 일이다.

하지만 난 아나스타샤의 친구로서 이대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그녀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받아쳐 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난 조심스레, 하지만 분명하게 물어보았다.

“콩쿠르에 나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진 않아.”

아나스타샤는 그건 정말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도 잘하고 싶어. 네가 공로 예술가까지 되었으니 나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중얼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피식 웃으며 말을 삼갔다.

“아니야,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줘. 방금 연주했던 것도 모두.”

그렇게 말은 하지만, 내가 음악을 잊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그녀도 잘 안다. 아나스타샤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나도 오늘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은 몰라서…… 발렌티나에게 미안하네. 그 애가 같이 잘 해 보자고 했었는데.”

발렌티나 역시 쇼팽 콩쿠르에 아나스타샤와 함께 참가하기로 했었다.

에르네스트라는 목적이 사라져버린 지금 아나스타샤가 쇼팽 콩쿠르에 나가려 하는 목적은 발렌티나에 대한 의리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난 어렴풋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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