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82화 (882/1,277)

##  882화

문제가 무엇인진 그녀도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혼란스러워하며 갈팡질팡하지 않았다. 다만 침착하게 서로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길게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을 거야.’

만약 아나스타샤가 미숙한 까닭으로 갈피를 못 잡고 테크닉에만 치중하고 있는 중이라면, 난 밤을 새더라도 그녀를 붙잡고 그 이상을 추구하도록 도와줄 수 있겠지.

어째서 알맞은 위치에 음을 끼워 넣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컴퓨터로 만드는 음악이 주류인 현대에 우리 같은 기악 연주자들은 무엇을 더 추구해야 하는지.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오래된 전통을 잇기 위해서나 원전 악기의 사운드를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교함 너머로 손을 뻗을 수 있는 건 아직까지 인간뿐이기 때문임을.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이미 그 모든 것을 머리로도 손으로도 알고 있는 완성 직전의 연주자였다.

그녀는 음악을 무기로 쓸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날카롭게 칼날을 다듬고 있었을 정도로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힘을 명확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한순간의 자신을 완성해서 무대 위에 올리는 것으로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음을 믿고 따르는 연주자였다.

때문에 지금 그녀에게 정교함만 남고 나머지가 사라져버린 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할 수 있음을 알고, 심지어 근처까지 도달했는데도 마지막에 길을 잃은 것이다.

‘어떤 마음일지…….’

그녀를 어떻게 도와야 할까.

그런 생각은 아까 첫 연주를 들었을 때부터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은 돌고 돌 때마다 점점 무거워져서 결국은 가라앉아버린다.

긴 이야기는 고사하고 난 지금 그녀에게 짧은 한마디를 하는 것도 쉽게 하기가 어려웠다.

“…….”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엔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흘려 놓은 찻물이 불규칙한 모양으로 어질러져 있다.

그녀 역시 지금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려운 것 같다.

이따금 표정 위로 떠오르는 감정들이, 아나스타샤가 지금 하고픈 말이 많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며 말할 뿐이었다.

“지금은 이래선 아무것도 안 될 것 같네.”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것처럼, 이런 건 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 말하며 아나스타샤는 기지개를 쭉 폈다.

심드렁한 고양이처럼 굴고 있지만 그녀가 지금 굉장히 예민하다는 건 슬쩍 드러나는 어깨의 긴장으로부터 알 수 있었다.

말없이 가만히 보고 있자, 아나스타샤는 실없이 웃으며 내 쪽을 돌아본다.

“무슨 걱정인진 알겠지만, 너무 신경 쓰진 마.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도는.”

“…….”

“뭐…… 앞으로 몇 주 남았으니 그사이 어떻게든 되지 않겠니.”

우리가 내년 참가할 콩쿠르 심사용 DVD는 12월 초까지 참가 신청서와 함께 제출해야 한다.

이 중요한 시기에 뜻하지 않은 슬럼프를 겪으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나스타샤는 여유를 찾고 싶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DVD는 그냥 이렇게 내고 일단 출전한 다음에 생각해도 될 일이고. 내 생각에도 DVD심사에서 떨어질 것 같진 않거든? 내가 아무리 못나도 말이지.”

낙천적으로 보자면 남은 시간은 조금 더 있었다.

지금 테크닉적으로 완벽한 그녀의 연주만으로도 예선은 거의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을 테고,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예선 라운드가 펼쳐지는 내년 4월까진 시간이 있다.

더 길게 본다면 본선이 있는 10월까지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난 그녀를 따라 긍정적인 답을 내어줄 수가 없었다.

조용히 있는 내게, 대답해 달라는 듯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아직 시간은 많아. 그렇지 않니?”

아나스타샤가 지금 보이는 낙천성은 정말로 상황을 좋게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최악의 경우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난 후에 비로소 이렇게 된 느낌이 있었다.

난 그녀가 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대답이 나올지 몰랐기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

결국 난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있다고 서로 생각할 수 있다면 적어도 나아질 방법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내 확인을 받은 아나스타샤는 약간 더 편안해진 미소와 함께 찻잔을 만지작거리더니, 이쯤하면 되었다는 듯 말했다.

“난 이만 가 볼게. 그게 낫겠어.”

“아나스타샤.”

“보니까 네 녹음은 당장 해도 될 정도로 잘 되고 있는 것 같고…… 마카로프도 확실히 도와주시는데, 내가 딱히 여기서 할 일이 뭐가 있겠니?”

아까 오자마자 나가려고 했던 걸 붙잡았던 것과 달리 이번엔 그녀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냥 친구와 함께 있고 싶다는 이유 말고는 적당한 이유도 없었을뿐더러, 난 그녀가 방금 보여 주었던 연주에서 받은 충격으로 인해 지금 너무 복잡한 상황이었다.

아나스타샤와 계속 같이 있더라도 분위기가 그리 좋을 것 같진 않았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보내는 것이 맞나?

슬럼프에 빠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아나스타샤에게 이렇다 할 도움이 되어 주지도 못하고 혼자서 이겨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과연 올바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심지어 이번엔 어떤 이유에서 슬럼프가 왔는지 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예전에 봤던 그 날카로운 공격성이 왜 사라졌는지, 그 이유는 분명 에르네스트와 관련된 것일 테니까.

하지만 되레 그렇게 정확하게 이유를 알 것 같았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나스타샤를 에르네스트에게 데리고 가서 이야기를 듣는다 하더라도 그녀가 나처럼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턱대고 그랬다간 더 안 좋게 될 것 같다는 직감만 든다.

여러모로 고민하고 있는 사이,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찾아온 것도 사실 연주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 준비가 많이 부족했지…… 그러니까 다음엔 조금 더 제대로 준비해서 올게요? 마카로프.”

“알겠습니다. 아나스타샤.”

“그땐 전화 먼저 할게요.”

“언제든지 괜찮습니다.”

순식간에 작별인사를 마친 두 사람을 날 바라보았다. 무언가 기다리는 눈빛이다.

내 의사에 많은 것이 달려 있음을 느꼈다.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를 따질 순 없었지만 난 약간 화가 났다.

아나스타샤에게 도로 앉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뒤에 할 말이 없더라도.

그러나 난 이미 한 번 그렇게 억지를 써서 그녀를 피아노 앞에 앉게 만들었다. 또다시 그럴 순 없었다.

멍하니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보지 말라는 듯 환하게 웃었다.

“학교에서 보자. 타티아나.”

“……그래요.”

“안녕.”

언제나처럼 내일을 약속하는 인사. 그 말에서 난 늘 힘을 얻어왔지만, 지금은 그 말이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내일 다시 보게 될 때까지 아나스타샤가 혼자서 무엇을 견디고 이겨내려 노력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았기에.

그리고 잘 알면서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무력감을 떨쳐낼 수 없었기에.

마지막까지 손을 흔들며 가벼운 태도로 아나스타샤는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착잡한 심정으로 찻잔을 기울이고 있자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가만 바라보니 그는 힘없이 목을 늘어뜨린 채 물었다.

“전혀 몰랐었던 것 같군요.”

“예…… 전혀.”

중얼거리며 대답하자 프로듀서는 테이블 가장자리로 시선을 보내더니 천천히 말했다.

“친한 친구에게 갑자기 이변이 생기면 충격을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 타티아나는 이뿐만 아니라…….”

그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에르네스트가 겪은 사고로 내가 꽤 힘겨워했던 건 그 역시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겪는 것들은 모두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부적으로 정확하게는 몰라도 멀리서 보면서 우리 관계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일어나선 티슈를 가지고 왔다.

흘려놓은 찻물을 닦으며 그가 말했다.

“제가 깊게 참견할 일은 아니겠지만, 어지간하면 아나스타샤와 함께 가라고 했을 겁니다. 피아노건 음악이건 모두 잊고 기분 전환 삼아 놀다 보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도 했었다.

이미 아나스타샤에게 억지를 써 본 것도 한두 번 일이 아니니 이번에도 무작정 그녀를 끌고 나가서 돌아다니면 뭔가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마 내가 그렇게 하면 아나스타샤도 못 이기는 척 따라와 주겠지.

하지만 이미 얼마 전 우리는 함께 느낀 바 있었다. 그렇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것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듯 나지막이 웃었다.

“하지만 그럴 상황은 아닌 것 같군요.”

“아니죠.”

“그렇다고 녹음을 계속할 기분도 아니실 것 같고.”

“…….”

이전에 녹음했던 4곡에 대한 연구는 머릿속에 잘 정리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아나스타샤가 연주했던 쇼팽이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다.

애써 무시하고 진행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것 같진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될까요.”

“좋습니다. 음반 관련해 해야 할 이야기도 했고, 녹음한 것도 있으니…… 혹시라도 이걸로 제작은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난 그 말에 초점을 기울였다.

말을 해 놓고도 내 눈치를 살피던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내가 그냥 넘어갈 생각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약간 당황스러워했다.

구태여 몰아세울 생각은 없어서 일부러 조금 장난스럽게 물어보았다.

“저도 문제가 있을 것 같나요?”

“아, 그건…….”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되어요.”

방금 아나스타샤가 완성 직전에 갑자기 색을 잃어버린 것처럼, 나도 그녀에게 영향을 받아 연주에 문제가 생기지 말란 법은 없었다.

심지어 벌써부터 난 분명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녹음을 계속해서 진행하고픈 마음이 싹 사라진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언제나 그렇듯 연주자들이 하는 일은 현실의 악기로 기술을 펼치는 일이지만, 정신적 요소에도 정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멘탈 케어가 육체의 컨디션 관리만큼이나 중요한 까닭이다.

다시 한번, 약하게 보이진 않겠다고 생각하며 프로듀서를 바라보자 그는 진지한 어조로 내게 이야기했다.

“……타티아나. 지금 열심히 잘 하고 있습니다. 혹여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당신에겐 강한 리질리언스resilience가 잠재되어 있으니 분명히 이겨내겠죠.”

칭찬을 바랐던 건 아닌데, 갑자기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잠시 당황한 내게 그가 덧붙였다.

“전 타티아나가 반드시 피아니스트로서 존재할 것이란 믿음 같은 것을 느낍니다.”

“…….”

내가 그에게 그런 믿음을 주었다는 건 기쁜 일이다.

그런 믿음들을 받고 난 책임감을 음악으로 돌려주고자 한다. 음악이 그 믿음에 대한 보답이 될 테니까.

이번에도 같다.

마카로프 프로듀서가 내 음악에 감동을 느끼고 모든 걸 기록하며 그 이후의 것들도 듣고 싶어 한다면, 난 얼마든지 그에게 협조할 생각이 있었다.

반드시 피아노 연주자로서 존재하며 보답할 터였다.

그러나 프로듀서는 내 얼굴을 보더니 힘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때문에 전 가끔 잊곤 하죠.”

“무엇을요?”

“타티아나가,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이제 막 국제 콩쿠르의 제한선에 발을 디뎠을 뿐이란 걸.”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윽고 그가 말하는 것이 내가 어려 보인단 뜻임을 깨달았다.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지금까지 항상 날 그저 연주자로서 대우해주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가 날 어린애 취급한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갑자기 어린애처럼 보인 걸까.

아나스타샤가 슬럼프에 빠진 것과, 거기에 내가 분명히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인 게.

그렇게 보여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난 도전적으로 대답했다.

“계속 잊고 계셔도 괜찮아요. 제가 보여드릴 테니까”

말해 놓고 보니 정말 어린애나 할 법한 소리였다.

약간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피하자 마카로프 프로듀서는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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