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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883화 (883/1,277)

##  883화

발렌티나는 학교에 들어서기 전 모자를 벗어 눈을 털고 어깨 위도 쓸어냈다.

옆의 많은 학생들도 발렌티나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오버스럽게 외투를 벗어 팡팡 터는 아이도 있었고, 몇몇 남자애들은 신발을 턴답시고 아예 카자치каза́чий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낮은 자세로 양발을 번갈아 앞으로 뻗는 카자크 군인의 춤이다.

음악뿐만이 아니라 무용 등에도 재능과 관심이 있음을 보이는 건 좋지만, 결국엔 절도 있는 춤이 아니라 의욕적인 장난일 뿐이라서 사방으로 눈이 튀었다.

“꺄악!”

“야! 그만해! 눈 튀잖아!”

한바탕 난리가 나고 아예 몇몇은 눈을 잔뜩 퍼 와서 뿌리기 시작했다.

발렌티나는 슬슬 뒤로 뒷걸음질 치며 웃었다. 쟤들 저러다가 혼날 텐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도 않아 수위 아저씨가 달려와서 고함을 질렀다.

장난을 치던 학생들은 다람쥐처럼 빠르게 빠져나갔다. 정말 연주자가 아니라 육상 선수 지망생들이 여기 다 모여 있구나 싶다.

발렌티나는 괜히 불똥이 튀지 않도록 모른 척하고 복도로 향했다.

우르르 빠져나가는 학생들 틈바구니에 끼어가는 도중, 누군가 어깨를 톡 쳤다.

“발렌티나! 안녕!”

“아, 스테파니!”

돌아보니 붉은 머리칼이 흔들거린다. 바이올린과의 친구 스테파니였다.

발렌티나는 전교생과 두루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같은 과가 아니라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이름을 다 알고 있는 건 물론이고, 친구들도 발렌티나를 편하게 대해 주는 편이었다.

스테파니는 그중에서도 같은 10학년이라서 자주 이야기하고 놀러다니기도 한 친구였다. 발렌티나는 밝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야!”

“응! 날씨도 따뜻하고 좋네.”

따뜻한 프랑스에서 와서 그런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러시아의 추위는 못 견디겠다며 울상을 지었었는데, 이젠 눈이 펑펑 오는 영하의 날씨인데도 끄떡없다는 투였다.

러시아 사람 다 되었다고 생각하며 발렌티나는 웃었다.

그래도 스테파니는 더 따뜻한 걸 원하는지 친근하게 발렌티나의 옆에 달라붙으며 말했다.

“요즘 왜 이렇게 보기 힘들어? 보고 싶었잖아. 우리 같은 학교 다니는 것 맞아?”

“몰랐어? 난 사실 그네신에서 온 첩자거든.”

“헉. 진짜로?”

“가짜로.”

발렌티나의 농담에 스테파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깔깔거리며 웃었다.

한참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테파니는 마침 이야기할 것이 있었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합주 관련해서 내가 저번에 말했던 건 어떻게 생각해?”

“아, 그거…….”

얼마 전 스테파니가 합주 과제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던 적이 있었다.

발렌티나는 가능하면 그렇게 하자고 말했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문자라도 해 둘걸. 살짝 반성하며 발렌티나는 말했다. 빙빙 돌리지 말고 차라리 제대로 말해 주는 편이 낫다.

“진짜 미안해 스테파니. 시간을 따져 봤는데 바빠서 힘들 것 같아. 어…… 다른 애 소개해 줄까?”

“음…… 난 네가 좋은데.”

“그건 고마워. 그래도 미안.”

간결하지만 한껏 미안함을 담아 이야기하니 스테파니도 아쉽다는 표정을 지을 뿐 그 이상 서로 난처한 상황을 만들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연주자를 구하면 될 일이다. 이 학교엔 피아니스트가 발렌티나 말고도 많았으니까.

그래도 마지막으로 스테파니가 물었다.

“근데 뭐 때문에 바빠?”

“쇼팽 콩쿠르 준비해야 하거든.”

“아!”

그제야 스테파니는 미처 잊고 있었던 걸 생각해냈는지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콩쿠르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바이올리니스트라서 쇼팽 콩쿠르에 대해 잘 모르는 스테파니는 양손을 이리저리 저으며 무언가 이미지를 연상하는 것 같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연주자로서 걱정하는 부분은 역시 현실적이었다.

“피아노과 애들은 쇼팽 콩쿠르 시즌이구나. 바로 나이 되자마자 참가하는 건 사실 별로인 것 같은데…….”

“내 생각도 그래. 본선만 가도 성공이지.”

“뭐 그래도 발렌티나는 잘 하니까. 좋은 결과 있을 거야.”

“스테파니, 넌 올해 어때?”

“우리 선생님은 콩쿠르고 뭐고 관심 없고 기본기로 끝장을 보시려나 봐. 미치겠어 진짜.”

마침 잘 말했다는 듯 스테파니는 발렌티나를 멈춰 세우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내년이면 열일곱 살이니 이런저런 콩쿠르에 나갈까 보고 있는데, 지도 선생님이 앞으로 1년간은 연습에 더 치중하라고 해서 답답해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학생이 강력하게 이야기한다면 그걸 끝까지 말릴 순 없겠지만, 스테파니로서도 지도 선생님이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가르치진 않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도 이상으로 막나가진 못하는 것이다.

다른 과 학생이라도 해도 역시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는 발렌티나는 스테파니에게 올해만 어떻게 잘 넘기고 내년에 다시 한번 선생님을 설득해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 수 있지 않겠냐며 적절하게 위로해주었다.

스테파니는 그런 말만으로도 고맙다는 듯 웃었다.

“아, 괜히 하소연했네.”

“괜찮아. 다음엔 내 이야기도 들어줘.”

“응? 넌 그런 거 잘 안하잖아.”

“할지도 모르니까?”

“음…… 그런 건 있지? 같은 과 애들한텐 못 하는 이야기 같은 것도 타과인 애들하고는 조금 쉽게 할 수 있는 거.”

같은 부분에서 이해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끼리 서로 이야기하면 통하는 것이 더 많을 것 같지만, 사실 어떠한 현실적이거나 실리적인 부분을 따질 땐 서로의 조건과 입장이 다르기에 말이 안 통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땐 정말 아예 큰 범위에서만 겹치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실제로 도움이 될 때도 있고.

발렌티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피아노과 친구들에겐 할 수 없는 이야기, 물론 다른 과라도 마찬가지다.

아마 어쩌면 죽을 때까지 발렌티나는 이 이야기를 가지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발렌티나도 문득 가슴이 조금 답답해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보다 훨씬 더 답답할 두 친구를 생각하면 그녀는 힘든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건 그만큼 신임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에 스테파니를 쉽게 위로해 줄 수 있었던 것처럼, 그 애들에게도 쉽게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발렌티나는 옅게 웃었다.

계단을 오른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스테파니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 어려운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발렌티나.”

“알았어. 아, 다 왔네.”

“다음에 봐!”

빠른 걸음으로 바이올린과 학생들 사이로 사라지는 스테파니를 잠시 보다가, 발렌티나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향했다.

반의 앞문을 열고 들어서자 일찍 와 있던 몇몇 친구들이 손을 흔들었다. 발렌티나는 모두가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 안녕, 안녕. 일찍들 왔네?”

“눈 와서 차 막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안 막히더라고.”

“차가 막혔으면 좋겠단 말이야?”

“적당히 말이지.”

“뭐야 그게.”

뭔가 억울하다는 듯 말하는 안드레이에게 핀잔을 주며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발렌티나는 마치 늘 있던 자리에 있는 사람처럼 존재하는 타티아나를 발견했다.

마침 타티아나도 책을 보다가 인사하는 목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들고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은 아침.”

“어서 오세요. 발렌티나.”

타티아나는 보던 책을 덮었다. 건성으로 인사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발렌티나에게 집중해주겠단 의미였다.

늘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그녀에겐 배려가 담겨 있었다.

가방을 휙 던져놓은 발렌티나도 그녀와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일단 어제 일로 화두를 던져보기로 했다.

“어제 보니까 일찍 가던데, 뭐 했었어?”

“어제요? 아…… 스튜디오에.”

“스튜디오?”

“예. DVD 만들어야 하잖아요? 저희.”

“아, 그렇지.”

남의 일처럼 이야기할 것이 아니었다. 아까 스테파니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처럼 발렌티나도 콩쿠르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신청서와 함께 폴란드로 보내야 하는 심사용 DVD는 그녀의 최우선 과제였다.

다만 아직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다.

타티아나는 이참에 잘되었다는 듯 약간 더 몸을 가까이하며 물었다.

“발렌티나는 어떻게 하시나요?”

“슬슬 시작해야지?”

“곡은 정하셨고요?”

“당연하지. 이제 시간도 별로 안 남았는데 아직도 안 정했으면 어떡해?”

“그건 그래요.”

“연습은 꽤 했는데…… 이렇게 해도 될는지 잘 모르겠네.”

그간 청소년 콩쿠르의 심사에 몇 번 DVD를 보내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정말 큰 국제 콩쿠르는 처음이었다.

어차피 쇼팽의 곡들만 딱 정해져 있으니 레퍼토리가 딱히 특별할 것도 없고 그냥 연습하던 곡을 반복해서 잘된 걸 보내면 된다는 건 안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자신이 어떤 피아니스트인지 알리는 첫 목적으로 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물론 선생님은 그냥 평범하게 해도 된다고 했었지만.

약간 자신 없는 투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타티아나가 넌지시 물었다.

“오늘 이따가 제가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응?”

“큰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혹시 다른 사람의 감상을 필요로 하신다면 제가 필요하진 않으실까 싶어서요.”

발렌티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타티아나와 눈을 마주했다.

각자 나갈 콩쿠르를 정하고 집중해서 연습하면서도 두 사람은 가끔 같이 연습하곤 했지만, 콩쿠르 곡에 대해선 딱히 깊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음악적 이해에 아주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일단 발렌티나는 타티아나가 어련히 잘 하리라 믿었고, 또 온갖 곡들이 나올 수 있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곡에 괜한 의견을 내기 싫었다.

그리고 타티아나에게서 쇼팽의 곡에 대한 의견을 듣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올해 봄 그녀가 쇼팽의 소나타를 연주하고, 그다음 한승우의 연주를 듣고 나선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진 일이 있었다.

그 후로도 타티아나는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원래 조금 병약한 애였으니까 위클리 준비에 집중하다가 결국 그렇게 되어 버렸나 싶어서 그냥 넘겼지만, 사실 발렌티나는 은연중에 타티아나가 음악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느꼈다.

이 섬세한 친구에게 혹여나 이상한 영향을 끼칠까봐 발렌티나는 정말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하지만 피아니스트로서 타티아나의 감상을 듣는다는 건 정말 큰 의미가 있었다.

발렌티나는 상충되는 마음으로 머뭇거리며 말했다.

“원래 내가 그렇게 부탁하려다가 안 한 건데.”

“정말요? 잘 되었네요.”

“그럼…… 점심 먹고 나서? 긴장된다, 벌써.”

“아하핫, 그러지 마세요. 그냥 가벼운 리허설 한다는 마음으로 보여 주셨으면 해요.”

웃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괜찮으니까 이렇게 적극적으로 제안한 게 아닌가 싶었다.

발렌티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어깨를 늘어뜨렸지만, 사실 심사위원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과 타티아나 앞에서 연주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발렌티나는 이어 말하려 했다.

“그리고…….”

막 말하려는 찰나 뒤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나스타샤가 막 들어오자마자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좋은 아침이야. 타티아나, 발렌티나.”

아나스타샤의 경쾌한 인사에 타티아나도 반갑다는 듯 그녀를 마주했다.

아나스타샤는 괜히 부산하게 팔을 쓸며 옆자리에 앉았다.

“눈이 그치질 않네.”

“그렇네요”

“그거 봤니? 요 앞에 눈사람 만들어 놓은 거.”

“아, 봤어요.”

두 사람은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눈사람 이야기로 시작한 주제는 곧 눈사람을 꾸미는 장식을 거쳐 크리스마스로 흘러갔다.

그런데 이야기가 올해를 간단히 넘겨버리는 것을 보면서 발렌티나는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타티아나가 분명 발렌티나에겐 적극적으로 물어보았던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를 아나스타샤에겐 전혀 하지 않는 것이었다.

“……?”

이따가 하려나?

발렌티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두 사람이 웃는 모습을 보며 같이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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