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4화
점심식사 후 학생들은 저마다 오후 일정을 위해 흩어졌다.
발렌티나는 미리 약속했던 대로 타티아나와 만났다. 두 사람은 한적한 연습실을 찾아 들어갔다.
듀엣을 할 것이 아니었기에 피아노 한 대인 개인 연습실이면 충분했다.
“…….”
생각보다 무척이나 긴장되었다.
일단은 아침에 잠깐 들었던 타티아나에 대한 걱정이 문제였다. 만약 연주를 듣다가 기절하기라도 한다면 발렌티나로선 정말 난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물어보기에도 이상하고.
어쨌든 그 부분에 대해선 지금 타티아나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연주를 들어주기로 했으니 괜찮은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스스로에 대한 걱정이었다.
지금 연주하려고 하는 쇼팽의 곡들은 반년 정도 걸려 준비한 곡들이었다.
물론 그전부터 레퍼토리에 넣으면서 꾸준히 연습하곤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콩쿠르 무대에 올릴 정도로 다듬는 데엔 그 정도 시간이 들어갔다.
그 시간 동안 발렌티나는 자신의 음악과 마주하면서 스스로 꽤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남들 앞에서 작품이라 말하며 선보일 자신이 생겼고, 또 어떤 평가를 받더라도 꺾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냐고. 조금 뻔뻔하게 말 하더라도 그리 창피하진 않으리라.
그러나 그 상대가 타티아나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만약 이 애가 말을 잇지 못하고 난감해하는 표정이라도 보인다면, 발렌티나는 정말로 콩쿠르에 나갈 용기를 전부 잃어버리고 말 것 같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괜한 불안감을 떨쳐 버리며 발렌티나는 고개만 살짝 돌려 옆을 보았다.
거기엔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타티아나가 다른 딴청을 부리지 않고 온전히 이쪽에 집중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타티아나는 발렌티나의 연주를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말해 주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음악에 있어선 절대로 거짓말하는 일이 없는 그녀의 성격상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를 억지로 좋다고 해 주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연주 역시 마음에 들 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괜찮을 것이다.
연주를 기다리며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타티아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발렌티나는 천천히 건반 위로 손을 올렸다.
“…….”
모차르트와 쇼팽의 음악에선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뭇 음악가들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는 평이었다.
예전부터 발렌티나는 그 말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모차르트는 그래도 탄탄한 구조가 좀처럼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으니 고칠 것이 없다 싶지만, 쇼팽의 음악은 그에 비해 훨씬 더 허술하게 만들어진 느낌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규칙하게 등장하는 루바토나 긴 호흡의 프레이징.
도대체 어떻게 짚으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 선율의 흐름과 가끔은 나사가 몇 개 빠진 것같이 느껴지는 화성의 구조.
여러모로 쇼팽의 음악은 감각적이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지녔지만 완벽함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근래 들어 쇼팽 콩쿠르에 참가하길 결정하고 깊게 연구를 하면서 발렌티나는 쇼팽이야말로 정말로 완벽한 음악을 남겨놓았음을 체감하고 있었다.
“…….”
발렌티나의 손끝이 건반 위를 연타한다. 빠른 속도로 춤을 추는 음악이 피아노 위로 드러난다.
연습실은 발렌티나가 수놓는 음악으로 금방 물들었다.
조금 더 자신 있게 발렌티나는 피아노를 몰아붙였다.
멋대로라 생각한 리듬은 연주자의 박자감각에 맞추어 곡 전체가 따라와주는 유연함을 지니고 있었고, 그 형태는 가끔 늘어나거나 줄어들긴 해도 전체적으론 전혀 변하지 않고 탄탄하게 유지되었다.
약간 부족하게 느껴지는 화음은 그냥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음들로부터 배음을 빌려와서 칠해야 하는 것이었다.
정갈한 음악으로 의미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정말 음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금은 그 본질을 간신히 몇 방울 얻었을 뿐이다.
발렌티나는 쇼팽 콩쿠르에서 보여야 할 자신의 이야기를 정말 제대로 의미 있게 가꾸려면 몇 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단지 지금 그만두지 않고 계속 해낼 수 있는 건 적어도 늦게나마 쇼팽의 음악에서 가치를 깨닫고 이끌어 낼 수 있었던 자신이 부끄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과 숨소리는 그런 그녀의 자신감에 조금 더 힘을 실어주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할 것도 없었다. 발렌티나는 지금 타티아나가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과감한 터치로 피날레를 마무리하며 발렌티나는 지금 또 한 걸음 더 나아갔음을 확신했다.
‘……역시 혼자서 할 때랑은 달라.’
다른 사람이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피아니스트는 이렇게나 강해진다.
발렌티나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무대연주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기분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피식거리며 웃었다.
심지어 그게 타티아나였으니 조금 더 잘된 기분이었다.
경애하는 피아니스트인 타티아나의 존재는 발렌티나에게 정말 큰 압력이자 지지로 다가온다.
물론 동시에 타티아나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친구이기도 했다.
“브라바! 멋져요, 발렌티나.”
연주가 끝나길 무섭게 타티아나는 밝게 웃으며 박수를 보내왔다.
그녀는 평소 얌전한 성격이지만 누군가를 칭찬할 땐 정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혼자서 치는 박수 소리는 미약하고 애처롭게까지 들린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전혀 흔들림 없이 계속 발렌티나에게 박수를 보내왔다.
그 순수한 기쁨과 칭찬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발렌티나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잔뜩 고양된 기분으로 발렌티나는 벌떡 일어났다.
혹시나 했던 기절도 없고, 기뻐해주는 것 같으니까 거리낄 건 전혀 없었다. 그녀는 기다리지 않고 물어보았다.
“괜찮았어? 응?”
“물론이에요. 발렌티나만의 쇼팽이 또렷하게 느껴져요. 잘 찾아내어 만들어가고 있네요. 축하드려요.”
“축하까지 할 정도야? 고마워.”
“후후, 정말이에요. 최근 들었던 쇼팽 중엔 최고였는걸요. 이런 음악이라면 분명 큰 무대에서도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죠.”
마치 단정 짓듯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며 타티아나는 그렇게 말했다.
발렌티나는 쑥스러워하며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문득 타티아나가 한 말을 돌이켜보았다.
최근 들었던 쇼팽 중에? 그럼 또 다른 애의 쇼팽을 들어보기라도 했던 걸까?
발렌티나가 알기로 지금 10학년과 11학년 중에 쇼팽 콩쿠르에 나가는 학생은 총 다섯 명 정도였다.
타티아나가 그중 친할 만한 사람을 떠올려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 아나스타샤 말곤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아나스타샤밖에 없는데?
아나스타샤랑 비교해도 최고였다고?
‘설마?’
거기까지 빠르게 추리해내고도 발렌티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아나스타샤는 그야말로 전성기나 다름없는 실력을 뽐내는 중이었다.
예전엔 실력이 엇비슷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아나스타샤는 그때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바뀐 건 아니었으니 발렌티나는 내색하지 않고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같은 콩쿠르에 나간다는 이유로 괜히 경쟁자라며 툭툭 시비를 걸기도 했지만, 사실 둘 사이의 상대적 격차는 꽤 있다고 봐야 했다.
특히 테크닉적인 부분에 있어선 학교 안에서 이미 상대할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라 해도 무방했다.
학교에서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인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도 그녀의 테크닉을 최고라 인정해 주었고, 심지어 학교 선생님들도 그녀의 성장에 주목하며 테크닉을 어떻게 키운 것인지 물어볼 정도였다.
요즘은 쇼팽의 곡들을 둘셋씩 조합한 고도프스키의 에튀드에 손을 댈 정도였으니, 정말 더 어려운 곡이 없어지면 뭘 어떻게 하려는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아나스타샤보다 자신의 연주가 나을 것 같진 않았다.
약간 의문을 담은 눈빛으로 발렌티나는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미소를 보였다.
의심하지 말고 받아들여도 좋다는 의미의 미소였다.
“…….”
타티아나는 음악을 논할 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을 다시 돌이키면서 발렌티나는 일단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말 아나스타샤의 음악을 들어 보고 비교한 것인진 지금 물어봤자 서로 곤란해지기만 할 테니 물어볼 수 없었지만, 어쨌든 타티아나가 자신의 음악을 인정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잔뜩 그 기쁨을 온전히 즐기고 나서, 발렌티나는 기분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감상은 그런 칭찬뿐이야?”
“……중간 부분쯤에 살짝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응! 당연하지.”
발렌티나는 긴장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가방에서 태블릿 컴퓨터를 꺼내더니 화면에 악보를 띄웠다.
그리고 천천히 짚어가며 발렌티나가 연주했던 한 부분을 따라 노래했다.
그냥 입으로 따라 부르고 있는데도 그 리듬이 완벽하게 발렌티나가 했던 것과 같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 번 들은 것만으로 타티아나는 거의 전부 파악해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연주하셨죠? 기억에 인상적으로 남는 멋진 해석이었어요. 하지만 앞뒤의 연결성을 생각한다면 조금 간결하게 치고 지나가도 좋을 것이라 생각해요. 안개가 흩어지듯 살짝만 색을 준다면, 이후 이어질 선율에 훨씬 힘이 실리지 않을까요?”
“듣고 보니 선생님도 똑같은 말씀 했었어. 고쳤어야 했는데…….”
“아하하하, 발렌티나의 해석을 계속 지속하다보면 놓치기 쉬운 부분이긴 해요.”
타티아나는 급하지 않게 발렌티나를 존중하면서 그렇게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그녀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하지만 현재 레퍼런스로 인정받고 있는 해석을 이 부분만큼은 가지고 가시는 것이 유리하실 거예요.”
바로 발렌티나가 이 곡을 콩쿠르 무대에 올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굉장히 현실적인 이유다.
콩쿠르는 그저 연주하고 박수받고 끝나는 곳이 아니다. 철저하게 점수가 매겨진다.
그러니 개성적인 해석을 지녔음을 잔뜩 어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그 기반에 심도 있는 연구가 두텁게 자리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 또한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 타티아나가 짚어주고 있는 부분은 그 심도 있는 연구의 핵심이라고 해도 될 만한 부분이었다.
이 부분만 잘 챙겨가도 공부 잘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타협이 그리 어렵지도 않았고.
연주를 하고 나서 보니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중요한 것을 한 번만 듣고도 날카롭게 캐치할 수 있는 건지, 그 능력이 정말 부럽다.
발렌티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알았어. 꼭 염두에 둘게.”
“후후, 아니면 압도적인 완성도로 심사위원분들을 강제로 납득시켜 버려도 되고요.”
합리적인 조언으로 발렌티나를 설득한 타티아나는 이렇게 과격하게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정말 현실적인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가끔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막 나가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 말대로 사실 레퍼런스 따위 신경 쓰지 않고 홀로 해석을 만들어 내놓더라도 그것이 완전하다면 상관없었다.
발렌티나는 그게 정말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타티아나는 종종 음악을 그렇게 다루곤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타티아나는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해주고 있긴 하지만, 발렌티나는 일단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언젠가 현실로 이룰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아무튼, 다른 건?”
“지금은 딱히. 그리고 조금 신경 쓰시는 것만으로도 또 오늘과는 완전히 다른 연주가 될 것이란 확신이 드네요.”
타티아나는 따뜻하게 웃더니 태블릿 컴퓨터를 집어넣고는 일어섰다.
“안심했어요. 발렌티나라면 역시 이렇게 잘 하실 줄 알고 있긴 했지만요.”
“……응? 뭐야. 가게?”
“예, 레슨이 있어서.”
몇 곡 더 같이 연습하나 싶었는데, 타티아나는 이만 가야 한다는 듯 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아쉬웠지만 발렌티나는 그녀의 말에서 또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지금 그녀가 연습을 보자고 한 건 단순히 도와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무언가 확인하고 안심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무슨 이유인지도 잘 모르겠고,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레슨이 있다는 애를 무작정 잡아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닌지라 발렌티나는 어쩔 수 없이 타티아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내일 뵈어요. 발렌티나.”
“응. 내일 봐.”
마지막으로 생긋 웃으며 타티아나는 밖으로 나갔다.
발렌티나는 혼자 남아 오늘 아침부터 그녀가 보였던 묘한 행동들을 다시 처음부터 돌이켜 보았다.
하지만 결국 제일 중요한 건 그녀의 쇼팽이 꽤 좋게 받아들여졌다는 것뿐이었다.
그 생각만 자꾸 나서 발렌티나는 더 복잡한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마른 목을 조금 축이면 나아지리라 생각하며 발렌티나는 연습실을 나와 휴게실로 향했다.
자판기가 있는 휴게실엔 몇몇 학생들이 나와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한 학생 한 명이 혼자서 구석에 앉아 멍한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며 한 손으론 음료수 캔을 흔들거리고 있었다.
저거 탄산인데 저렇게 흔들어도 되는 거야?
모른 척하기에도 좀 그렇고, 괜히 걱정이 되어서 발렌티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나스타샤. 뭐 해?”
“어? 응. 그냥.”
묘하게 기운이 없어 보이는 아나스타샤는 마치 비 맞은 고양이처럼 움직임이 무거워 보였다.
발렌티나는 일단 그녀 옆에 앉으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음…….”
말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것처럼 아나스타샤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 발렌티나에겐 이미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 와서 더 숨길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지 천천히 이야기했다.
“오늘 레슨하는데 엄청 혼났거든.”
“……응?”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모범생 같은 이유라서 발렌티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