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85화 (885/1,277)

##  885화

선생님한테 혼나서 풀이 죽은 아나스타샤의 모습을 보며 발렌티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감상하다가 이윽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뭐가 그렇게 웃기니?”

“그야 웃기지! 레슨하다가 혼난 것 정도로 네가 침울해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을 들었길래 그래?”

아나스타샤는 굉장히 강한 아이였다.

때문에 선생님에게 혼이 난다 하더라도 타당한 지적이라면 열심히 고치려고 하고, 타당하지 않다면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인정을 받아 낼 때까지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때문에 트러블도 몇 번 있었고, 지도 선생님이 두 번이나 바뀌기도 했다. 한창 슬럼프일 땐 몇 달이나 레슨을 안 한 적도 있었고.

그런데 그때도 아나스타샤는 겉으로 침울한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한 자신의 한계까지도 쿨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나스타샤의 장점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런 아나스타샤를 살살 약 올려서 발끈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발렌티나가 평소 즐기던 장난이었는데, 지금 그녀는 계속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할 거면 차라리 당분간 쉬래.”

“……오, 좀 심하네.”

“그런데 문제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야.”

“그렇게가 뭔데?”

“쉴까 싶어.”

차라리 기분이 상해서 그냥 그만두겠다고 했다 하더라도 발렌티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을 것 같다.

당연히 피아노를 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생각이 들곤 하고, 같은 길을 가는 친구가 좋은 건 그럴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아나스타샤의 쉬겠단 말엔 기분에 따른 즉흥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굉장히 깊은 고민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말 그대로 존중하여 그냥 쉬라고 하면 친구 된 도리를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발렌티나는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을 꺼냈다.

“요즘 괜찮지 않았어? 아나스타샤. 얼마 전 연주회에서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타티아나만 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 너도…… 아, 그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입학하란 제의를 받기까지 했었잖아?”

그것 때문에 도망칠 생각이냐며 화를 내기까지 했으면서 이번엔 칭찬의 재료로 삼는다는 게 조금 웃기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발렌티나는 당장 끌어올 수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끌어와야 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때랑은 달라.”

낮게 중얼거리며 아나스타샤는 손에 들린 캔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충분히 길게 생각하고 어느 정도 정리를 한 목소리였다.

“지금은…… 모르겠어. 내가 원하는 소리가 안 난다고 생각하다 보면 문득 내가 뭘 원했는질 잘 모르겠거든.”

“…….”

아나스타샤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해 준다는 것에 대해 발렌티나는 기쁘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한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그래도 그녀와 많은 것을 공유하면서, 앞으로도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있으니 진지하게 생각하고 대해 줘야 할 때였다.

발렌티나는 지금 상황에 대한 앞뒤 일들을 다 따져보고 신중하게 생각하여 물어보았다.

“그거 혹시 에르네스트 때문이야?”

“응?”

“아, 아니. 네가 저번에 그랬었잖아…… 그 애가 그렇게 된 것이 네 탓이라…… 물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혹시 아직 마음에 두고 있나 해서.”

이 정도까진 물어봐도 되는 적정선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고 보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의 이름은 아나스타샤가 어렵게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발렌티나에게도 어려웠다. 여전히 그는 병원에 있다.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울적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한참 동안 그 눈을 마주하던 발렌티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두고 있으니까 그런 말을 했겠지만.”

“……어떻게 안 그렇겠니?”

결국 지금 그녀가 겪는 마음 속 문제의 대부분은 에르네스트나 타티아나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서 아나스타샤는 이미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몇 번이고 깊게 생각을 해 본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의 일은 어쩔 수 없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타티아나는 강하게 이겨내고 나아가려 한다. 아나스타샤라고 해서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나도 몇 번이고 스스로를 돌아봤어. 저번 무대를 마지막으로 소리가 잘 안 나기 시작한 게 그런 내 나약한 마인드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진단에 다다랐지. 당연히.”

“자기객관적이네.”

“난 슬럼프 유경험자잖니?”

냉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아마 그녀 주변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 구세프 선생님조차 그런 이야기를 했을 테니까.

아나스타샤가 문제없이 잘 해나가야 에르네스트도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 이야기들 사이에서 아나스타샤가 어떤 마음으로 서 있을지 발렌티나는 미처 다 파악하기 어려웠다.

반쯤은 내려놓은 표정으로 아나스타샤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잘 모르겠더라고. 사실 그보다 훨씬 이기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기적인 이유?”

“공개적인 무대에서 그 애와 상대할 기회가 영영 사라져버렸단 걸 내 무의식이 뒤늦게 깨달았다든지.”

비로소 깨닫게 되는 자신의 마음이 그녀에겐 조금 아프게 다가온 모양이다.

그건 정말 냉정한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지금까지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해 온 것을 생각한다면,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하더라도 그리 다를 바 없었으니까.

발렌티나는 곁에서 그 과정을 봐 왔으므로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아나스타샤는 이미 완고한 논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걸 무너뜨리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애가 다시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후에 이긴다 하더라도 과연 내가 어디까지 정당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나스타샤. 너 그렇게까지 생각하면 너무 힘들어.”

“그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데?”

“…….”

에르네스트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란 전제는 누구나 하고 있었다.

다만 아나스타샤는 그다음엔 더더욱 자신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건 발렌티나 역시 뾰족한 수가 없었다.

부상에서 돌아온 피아니스트는 가히 무적에 가까울 테니까. 심지어 죄책감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상태로는 상대조차 하기 어렵다.

아나스타샤가 도망치고자 했던 것도 아예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단지 발렌티나는 강하고 쿨한 아나스타샤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근간을 모두 망가뜨려 가며 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그만두려고 하는 게 너무 안타까울 뿐이었다.

덩달아 울적한 기분이 들어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는 황급히 말했다.

“아니, 아니야. 내가 네게 한 말들이 많긴 하지만 이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 피아노에 대한 개인적인 문제니까.”

모든 이야기들을 저 멀리 밀어두고 일단 눈앞에 있는 피아노에 집중한다.

아나스타샤는 지금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슬럼프라는 것이 그렇게 원인을 찾아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다.

목적을 잃은 것이 문제라고 콕 집어 인식하고 강하게 마음을 먹고 일어설 수 있는 건 사람이 아니라 로봇에 가깝다. 혹은 신이라든가.

당연히 사람인 아나스타샤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차라리 몇 년 전처럼 기술적인 슬럼프를 겪는 것이라면 테크닉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으로 해결했겠지만, 마음의 슬럼프라면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그래도 친구로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이, 아나스타샤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넌 어떠니? 발렌티나.”

“나?”

“응. 아까 보니까 점심 먹자마자 타티아나랑 어디론가 가던데. 지금 이 시간이면…… 연습실에 있었던 것 아냐?”

아닌 척하면서도 그녀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예리한 질문에서 발렌티나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짧게 생각해 본 발렌티나는 결국 말을 돌려 봐야 이상하게 보일 뿐이라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연습실에 있었어.”

“네가 가자고 한 게 아니지?”

“응? 뭐?”

“타티아나가 제안했던 것 아니니? 콩쿠르에 올릴 곡을 들어 보고 싶다고.”

어차피 두 사람이 갈 사람은 이 학교 내에서 정해져 있다시피 하고, 그것을 제안할 사람 역시 둘 중 하나이니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찍어 맞추는 식의 추측이 아니란 것 정도는 바로 느낄 수 있었다.

확신을 가지고 묻는 아나스타샤의 의도를 거꾸로 추측하던 발렌티나는 어렴풋이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발을 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선생님에게도 험한 소리를 듣고 왔다는 아나스타샤는 영 자존감도 낮고 기분도 좋지 않아 보인다.

어디까지 이야기를 더 해야 할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발렌티나마저 회피한다면 아나스타샤는 정말 이야기할 상대가 전혀 없게 되어버린다.

그렇게 이 애를 아무렇게나 놔버린다면 정말 후회할 것 같았다.

어떻게든 괜찮은 이야기로 이어지길 바라며 발렌티나가 대답했다.

“그, 그렇긴 해.”

“어떤 평을 들었어?”

“그, 그냥 들어 줄 만하다고.”

혼났다는 애 앞에서 난 칭찬을 받았다고 자랑할 순 없어서 그렇게 둘러댔으나, 아나스타샤의 영민함은 거의 탐정과도 같았다.

“아니었을 것 같은데. 그 애는 네 쇼팽 연주를 좋아해. 그리고 넌 요즘 꽤 괜찮지.”

“…….”

“진짜 큰일 났네. 난 그 애한테 완전 밉보이겠는데.”

그러나 그 결론은 울적한 목소리로 끝났다.

우울하게 조금 더 몸을 웅크리며 캔을 꽉 쥐는 아나스타샤는 표정만큼은 웃어야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발렌티나는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아냐, 아나스타샤. 왜 그래? 아무리 오늘 선생님에게 혼났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그 애가 이야기 안 했니? 어제 내 연주를 들어 봤다고.”

타티아나는 그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직접 듣기 전부터 발렌티나는 거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도 타티아나가 말하지 않은 건 사실이니 발렌티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본 아나스타샤는 후회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으로 타티아나가 음악을 두고 거짓말을 하려고 하더라.”

“……진짜?”

“나중엔 안 그러긴 했는데…… 그 정도로 내가 엉망이었다는 거지.”

대체 어떤 연주를 했는진 모르겠지만, 음악을 놓고 타티아나가 평하길 망설였다는 건 아나스타샤에게 있어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연주가 엉망이라면 엉망이라고 말해 주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중앙음악학교 학생이라면 그렇게 말한다 하더라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강인함을 지녀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가 있다. 대체 어디까지 혹평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라서 되레 위로의 말이 나올 정도라면, 정말 최악인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더라도 발렌티나가 그런 동정 어린 말을 들었다면 정말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났을 것 같았다.

심지어 상대는 타티아나였다. 음악가로서의 잣대가 분명한 그녀가 갈팡질팡 고민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였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발렌티나가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걸 봤는지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오늘 뭐 연주했니? 쇼팽?”

“응…… 맞아.”

“쇼팽을 연주하면서 봄에 있었던 일 생각 안 했어?”

“했지. 혹시나 하고 걱정했었어.”

혹시 타티아나가 쓰러지진 않을까, 발렌티나는 그런 걱정을 분명 했었다.

물론 지금은 분명 괜찮을 테니 터무니없는 걱정이라 생각하며 연주를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난 전혀 걱정 안 했어.”

조금 당황스러운 말이었지만, 그건 타티아나가 쓰러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이 아니었다.

결코 그럴 일 없다는 걸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어차피 이따위 연주로는 그 애에게 아무런 영향도 못 줄 거란 걸 알고 있었거든.”

“……피아노 치지 말지 그랬어.”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붙잡히는 바람에. 사실 그 애가 보고 있으면 조금 잘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그 마음은 발렌티나도 안다.

타티아나란 피아니스트가 옆에서 봐 준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긴장되고, 이전엔 할 수 없는 연주를 할 수 있게 되는지. 불과 몇 분 전에 겪어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도 비슷한 것을 기대할 수 있었기에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 본 것이다.

“그런데 안 되더라.”

하지만 결국 그녀는 울적한 상태로 돌아왔다.

풀이 죽은 목소리로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발렌티나.”

“응.”

“콩쿠르 같이 나가기로 했었는데. 미안해. 나도 안 될 것 같아.”

에르네스트가 콩쿠르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부터 아마 이런 연쇄작용은 예상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발렌티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꽤 큰 우울함을 느꼈다.

“…….”

그러나 정말로 아나스타샤에게 아무 의욕이 없다면 오늘 선생님에게 가서 제대로 혼나고 울적해할 일도 없었을 터다.

발렌티나는 그 부분에 희망을 걸고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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